<마물토벌은 게임이 아니다> (11)
굳은 현의 표정을 여유로운 얼굴로 번갈아 보며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겨우 시작에 불과한데 너무 기뻐하는군요."
그를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들으면 칭찬이라도 하는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제국의 2황자님을 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소년처럼 개구지게 웃던 르안은 어디갔는지 어느세 의젓한 몸짓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황자에게 예를 표하였다.
"이런, 이런곳에서까지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네르안 공."
"보는 눈이 많을수록 언사와 행동에 조심을 하는것이 안전하죠."
어깨를 으쓱이며 르안이 말하자 아헨은 흥미롭다는듯이 쿡쿡 웃기 시작하였다. 그때 르안이 자세를 갈무리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헨에게 말하였다.
"그나저나 2황자님께서는 좀 달라지신것 같네요."
그 말에 아헨은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입니까?"
"뭐, 아무리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저에게 말을 높이시진 않으셨거든요."
"....그렇습니까."
그의 말에 아헨은 표정을 날카롭게 굳히며 별다른 악의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르안에게서 눈을 떼었다. 그리곤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으흠!! 뭐, 전의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르안공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혀...류양은 또 만나는군요."
"...제국의 2황자님을 뵙습니다."
현 또한 허리를 굽혀 그에게 예를 표하자 황자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을뿐, 어느새 본래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류양도 아까 참 훌륭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되는것을 오늘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황자전하."
현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채 무덤덤하게 그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그때 르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현에게 말을 건내고 있는 아헨에게 말하였다.
"그나저나 황자님께서는 여기에 왜 오신겁니까.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것보다 황태자님과 함께 참모진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것이 더 나을텐데요."
충분히 무례하다고 생각할수 있는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아헨은 표정하나 굳히지 않은체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말하였다.
"아, 그렇군요. 전해드릴게 있어서 온것이랍니다."
그 말과 함께 아헨은 자신의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현에게 건내주었다.
"암기는 살수들의 생명이죠. 이것을 가져오는것을 잊으시다니, 류양답지 않군요."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과 함께 현은 그 자리에서 굳을수 밖에 없었다.
이 말,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어..
하지만 아헨은 시종일관 미소가 띈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류 현양."
"...!!!"
그 말에 현은 마법에 걸린것처럼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헨은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가 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르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르안공, 앞으로도 힘내주세요."
"......"
뒤를 돌아서자 펄럭이는 망토 탓에 그의 얼굴이 가려졌으나 아마 여전히 미소 진 얼굴일것이라고 르안은 확신하였다. 점점 자신과 멀어지는 아헨을 바라보다가 르안은 이내 자신의 옆에 멍하니 서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현..?"
"......"
르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으나 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물끄럼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암기를 바라보고 있을뿐이었다.
"현, 괜찮아?"
"......"
"현..!!"
"..어?아, 응. 아니, 네...저는 괜찮아요."
그의 부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현은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얼마나 당황한 것인지 말까지 여러번 헛나왔다. 하지만 이내 손에 쥐고있었던 독침들을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만하면 꽤나 쉰것 같은데요, 다른곳으로 옮겨야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현이 넌 괜찮은거지?"
"네..괜찮고 말구요."
애써 미소 지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 보다가 르안은 고개를 돌려 동굴안을 바라보았다.
"이 동굴 꽤나 오던곳이지만 정말 적응이 안된단말이야."
"여기를 많이 오셨었다구요?"
어느새 완벽히 정신을 차린것인지 동그랗게 뜬 두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물음에 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응, 마탑의 임무 때문에 여길 좀 드나들었었거든..근데 이 악취랑 습기는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것 같단 말이야."
"그렇죠..어디서 이렇게 악취가 나는걸까요.."
지금은 다행이도 보호막을 친 상태라서 아까보단 냄새가 심하진 않았으나 은연중에 공기에 흩어진 냄새는 미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이 악취에 독이라도 든건 아니죠?"
"응, 그건 아니야. 아무래도 여러 마물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보니 그런거 같아. 사람들도 용변을 보면 안 좋은 냄새가 나잖아?"
"...그 말은 즉, 마물들도 용변을 본다는것인가요.."
현이 설마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자 르안은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당연하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대부분 다 배설을 하며 살아가는것. 아, 물론 식물들 빼고."
"..그래서 냄새가 이렇게 심한것이었군요.."
현은 그제서야 알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 한곳에 시선이 박혀버렸다. 르안은 한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발견할수가 있었다.
"...부상자들이 꽤 나왔네요."
"아무래도 우리같이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일반 기사들은 힘들수 밖에 없지."
둘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군의관들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현이 르안에게 물었다.
"르안님, 힐링 마법 쓰실줄 아시나요?"
"쓸줄 알았다면 내가 지금 너랑 같이 바라 보고만 있지 않았겠지?"
그 말과 함께 한숨을 짓는 르안에 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돌연 무언가가 생각난듯이 부상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현??"
르안은 동그래진 눈으로 현을 바라보다가 뒤쫓아갔다. 현의 걸음이 멈추자 르안 또한 멈추었다.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도 좀 있네요.."
"그러게.."
예상보다 상처가 심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이자 현은 군의관들과는 약간 떨어진 발치에서 부상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습기와 함께 공중에 떠다니고 있는 물의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나를 좀 도와줄수 있겠니?"
'어, 이스님??'
'이스님이다!!!'
'와아아아!!!'
현이 정령들을 바라보며 말을 건내자 정령들은 인기스타를 능가할 정도로 격하게 환호하였다. 그 반응에도 현은 동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저기 다친 인간들 보이지?"
'응!보여요!!'
'보여, 보여!!'
"저기..지금 누구랑 대화하는거야..?"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정령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 사이로 르안이 물었다. 그러나 현은 그런 그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정령들에게 말하였다.
"저기 다친 인간들을 치료해줄수 있겠니?"
'물론이죠!!'
'당근, 당근!!'
정령들은 그 대답 끝으로 부상을 입은 기사들에게 날아가 그들의 상처위에 살포시 앉았다.
"어...?"
"이건..."
"이게 뭐지...?"
정령들이 상처위에 앉아 치유력을 증폭할수록 희미하게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자 병사들은 시원한 느낌과 함께 점점 드러나는 정령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놀란것은 기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고 있던 군의관들, 마법사들 그리고 르안 또한 눈을 크게 떴다.
"현...?"
"운다인,"
르안이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을 소환해내었다. 그러자 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운다인은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네, 이스타샤님.'
"저기 상처가 심각한 기사들을 치료해주겠어요?"
'명 받들겠습니다.'
현의 부탁에 운다인은 끝까지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보다 더 부상이 심각한 기사들에게로 날아갔다. 운다인은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날아가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 시작하였다.
"으윽..."
정령들이 일제히 파란빛을 내며 상처를 치료하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군의관들 그리고 마법사들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아니, 이게 도데체 무슨..."
"정령인듯 보이는군요!!"
"오오- 신이시여!!"
하지만 그러한 탄성 가운데 현은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현을 본 르안은 눈을 깜박이다가 그녀를 다시 뒤쫓아갔다.
"현,"
"..네."
르안이 그녀를 부르자 현은 조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동 하나 없이 깨끗한 두 눈동자에 르안은 잠시 머뭇거릴수 밖에 없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
"..정령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