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토벌은 게임이 아니다> (12)
"음..그렇다고 볼수도 있겠네요."
의외로 침착한 현의 목소리에 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지금 이 애가 정령사가 어떤 존재인지나 알고 대답을 이리 하는것인지..
"그렇다고 볼수 있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다는거죠."
간단명료한 그녀의 대답에 순간 르안은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라고 대답할뻔한것을 고개를 흔드는것으로 눌러내렸다.
"아니..정령사가 맞긴 한거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애매모호한 그녀의 대답에 르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아니, 정령과 계약해서 불러내는것이면 정령사지 아니면 뭐야?"
"......."
그 말에 현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 아직 모든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니 불확실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그에게 만족스러운 답변 줄수 없다는 판단하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한숨이 섞인 그녀의 사과에 르안은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그리곤 몬스터의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나야 말로 미안해. 추궁하려던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하지만 알잖아, 마법사 또한 귀하지만 정령사는 더욱 드물다는거. 그런 대단한 사람을 만났다는게 신기하고도 놀라워서..."
횡설수설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진심어린 감정에 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나도 미안해.."
그가 다시 한번 사과를 하자 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친절하고도 솔직한 사람..'
전생에 너무도 소중한 사람의 배신과 죽음에 이곳으로 와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벽을 치고 살았다. 그것이 상대방을 위한것이라고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피하기만 하는 자신보단 올곧은 눈으로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며 끝없는 진심으로 부딪히는 사람.
그것이 르안이었다.
마음속 단단히 세워둔 벽에 약간의 금이 가는것이 느껴졌다. 낯설었으나 싫지만은 않은 느낌에 현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르안님께선 사과하실 필요 없으세요."
다른 사람이 기댈수 있는 편안한 버팀목 같은 사람.
"사과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될 말이에요. 르안님께선 그저..궁금하셨을뿐인걸요."
"류..."
현의 따뜻한 말에 르안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왜 그녀를 믿지 못했던것일까.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줄터인것을.
"부상자들이 더 있나 보러갈까요?"
어느새 무거워진 공기를 밝게 하고자 방긋 웃으며 입을 연 현의 모습에 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르안과 같이 남몰래 정령들에게 부탁해 부상자들을 치료해주다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병사들을 임시 천막을 쳤고 취사병들은 한곳에 모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현은 자신과는 조금 떨어진곳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2 황자를 바라보았다.
'...류 현양'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안것일까. 이곳의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할때 대부분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말하곤 하였다.
뭐, 그래봤자 르안과 에릭 이 둘 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성오빠.."
복잡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밖으로 몰래 꺼내보았다.
"여기 주저 앉아서 뭐하는건가."
하지만 그때 자신을 향해 익숙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현은 고개를 들어 음성의 출처를 바라보았다.
"..에릭님."
잠시 씻고 온것인지 그의 몸에 묻어있던 몬스터들의 피가 사라져있었다. 그는 꾀죄죄한 모습의 현을 물끄럼이 내려다보더니 이내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 한장을 그녀의 머리에 올려주며 말하였다.
"근처에 무해한 연못이 있다."
"에..?아.."
평소와 같이 무심한 그의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남모를 걱정이란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을 어렴풋이 느낀 현은 머리 위의 수건을 끌러내렸다.
"씻고 와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천막으로 향하였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좀 지저분하긴 하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자 온갖 먼지와 모래, 몬스터의 피가 뒤엉켜 벌써 굳어있는 상태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정령에게 부탁해서 간단하게 씻어도 되긴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일일히 부탁하긴 싫었다.
그리 멀지 않은곳에 못을 발견한 현은 그 주변에 주저앉아 물에 비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았다.
"윽..머리카락에도 묻었던것인가.."
피가 굳어 딱딱하게 굳어있는 머리카락 몇가닥을 이제서야 발견한 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연못에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히도 정수리 부분까지는 피가 튀지 않은 터라 머리카락 아랫부분만 물에 담겨 살살 비벼주었다.
굳어있던 피가 물에 점점 녹아가면서 머리카락 또한 부드러워지는것을 느낀 그녀는 머리카락을 물에서 빼내서 짜내고 얼굴과 몸에 튄 피를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이럴때는 샴푸 같은것이 있는 한국이 그리워졌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하며 에릭이 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었다.
"개운하네...으앗, 깜짝이야."
"아, 죄송합니다."
기척도 없이 자신의 뒤에 서있는 한사람을 발견하고 현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2 황자님을 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없는곳에서까지 굳이 예의를 차려야겠습니까."
"그럼 편히 하도록 하죠."
그의 말에 현은 바로 숙였던 허리를 피며 꼿꼿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행동변화에 어이가 없는것인지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였다.
"큭..여전하군,요."
"?네, 뭐.."
뒤의 존댓말이 어색하게 따라 붙은거 같았지만 현은 그것을 착각으로 넘겼다.
뒤의 존댓말이 어색하게 따라 붙은거 같았지만 현은 그것을 착각으로 넘겼다.
'그나저나 바로 뒤에 있는 그의 기척을 못 읽었다?'
하지만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척은 커녕 인기척 또한 느끼지 못한것에 대해서 현은 적지 않게 놀랐다. 전생에 살수로 활동했을 당시 그녀가 읽지 못하는 기척은 하성과 한진 빼고는 거의 없었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소리 없이 나타나고 또 소리 없이 사라지는 그를 자신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황자가 맞긴 한건가..'
검을 다루는 사람들중에 기척을 완벽하게 지울수 있는 이는 마스터뿐이었다. 그렇지만 현은 그 어떤 보고서 가운데서 제국의 2 황자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설마 2 황자가 살수 교육을 받았을리는 없지 않는가.
1 황자인 미하엘에게 가려져서 언제나 중간만을 유지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2 황자. 몇몇의 귀족들 가운데에서는 비운의 황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느낀 2 황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맹수들 가운데 치명적인 독을 숨긴체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뱀. 그런 사람이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뭔가가 묻기라고 한겁니까."
"네?아뇨.."
"하도 제 얼굴을 빤히 보시길래 뭐라도 묻은줄 알았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고 또 봐도 그 기운의 색만은 하성의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내 입을 꾹 다무는것으로 잡념을 떨쳐내려는 가운데 현은 미약한 살기와 기척을 느꼈다. 그녀 뿐만이 아니라 아헨 또한 느낀것인지 인상을 찡그리며 살기가 느껴지는곳을 바라보았다.
"방금.."
"네.."
아헨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운과 살기는 사람의 것? 아님 마물의 것?
미약하게 느껴지는 탓에 좀처럼 종잡을수 없는 정체에 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보죠."
"위험합니다. 병사들을 불러모으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어요."
현의 말에 아헨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하였다. 하지만 현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금방이라도 끊어질듯한 기운에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것인가.
"하지만..."
"그럼 이렇게 하죠, 저는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볼테니 황자님께선 막사로 가셔서 병력들을 모아와주세요."
"다시 말하는거지만 위험합니다. 그것도 혼자라면 더더욱이요.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찾아갈 자신이 있어서 그런것입니다. 게다가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운에 초조해진 현은 그에게 단호하게 말하였으나 그는 완강했다.
"안됩니다. 차라리 내일 날이 밝으면 모두 다 같이 찾아보는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현은 익숙한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이 기운은 그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