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다니면 자취할 수 있는 특권도 생긴다. 물론 기숙사에 들어가서 룸메이트를 만나고 한 학기동안 지루할 틈 없이 다투기도 하는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독고다이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선 자취가 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한밤중에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룸메이트도 없고 나만의 공간이 이만큼이나 생긴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단점이 있다면 식사를 내가 알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점.
그래서 이번 학기도 자취다. 사실 여기엔 다른 사정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급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학기가 시작되고 내가 신청한대로 수업에 들어가며 일주일을 지내야 하는 생활굴레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찾아왔다.
아니 잠깐만, 솔직히 ‘그것’이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을 했던 나를 비난하면서 벽에 머리를 두 번 박았다. 좋아, 훨씬 낫군.
그래,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아니라 ‘그녀’였다. 내가 ‘그것’이라고 칭한 이유는 처음 보자마자 현실성이 너무 없는데다가 인간이라고까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화감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 성찬이와 함께 서점에 잠시 들렀다. 성찬이는 시각디자인과라서 캐릭터 관련 책을 사느라고 나를 불렀으니 마지못해 나온 격이었다. 성찬이가 생각보다 두꺼운 책을 하나 사서 돌아가는 도중 서점을 열자마자 옆에서 달려오는 누군가와 내가 부딪혔다. 얄미운 성찬이는 마치 발레라도 하는 것 마냥 예술적으로 피해갔다.
“흐악!”
꽤 세게 부딪혀서 우리 둘 다 넘어졌다. 예상한대로 달려오던 사람은 여자였다. 그리고 아쉽게도 만화처럼 내 위로 여자가 올라타거나, 여자가 자빠져서 치마가 올라가서 팬티가 슬쩍 보이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녀는 뒤로 자빠져서 내 위로 올라타지는 못했고,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팬티는 꿈도 못 꾼다.
“아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괜찮…?”
바로 이 순간.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것’이라고 인식하고 말았다.
잠깐, 머리를 다시 벽에 박아야겠다. 한 번, 두 번, 좋아. 나아졌어.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팔과 다리 정확히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발끝부터 허벅지 중간까지의 피부가 배터리 없는 핸드폰의 액정처럼, 도시의 밤하늘처럼, 스타킹을 낀 것 마냥 검은 색이었으니까.
바디페인팅은 아니었다. 그 피부는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너무도 관리가 잘 되어있는 피부처럼 검은색이 햇빛을 받아 윤기마저 흐르게 만들었다.
“와우.”
성찬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 또한 최대한 아무 말 없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아마 이 여성분은 나 때문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겠지.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 순간이었다. 성찬이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물론 나한테가 아닌 여자에게… 여자는 성찬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나는 그걸 뒤에서 바라보며 왠지 비참하고 쓸쓸하게 혼자서 일어나야했다. 분명 예상하건데, 성찬이는 여자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있을 것이다.
“어우, 피부가 좋으시네요.”
“네?”
야, 잠깐만 뭐라고?
“아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헛소리를 참 많이 하는 녀석이라서!”
나는 급하게 성찬이의 어깨를 잡아당겨서 최대한 그 ‘헛소리’를 무마했다. 신이시여! 저런 피부를 가졌으니 당연히 사는 동안 주목을 많이 받아서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야?
예상대로 여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괜찮아요. 이젠 익숙한 걸요. 알아요. 거무튀튀해서 보기 좀 그렇죠? 장갑이라도 껴서 좀 가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성찬이의 생각없는 한 마디 때문에 이렇게 상처를 얻고 가는구나. 나중에 성찬이한테 일대일로 말해서 반성 좀 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성찬이는 여전히 입을 닫지 않았다.
“어… 굳이 말하자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죠. 반대에요. 최고에요!”
“네?”
“윤기 있는 검은색이라서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보이는데, 전 스타킹이 좋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좀 만져 봐도 될까요?”
짝!
예상한대로였지만 여자는 기분나쁜 경멸의 얼굴을 하면서 성찬이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성찬이의 얼굴이 돌아가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래, 넌 맞아도 싸다.
쓰러진 성찬이를 보고 다시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은 얘가 맞을만했네요.”
***
“제발 너의 개인적인 패티쉬는 좀 숨기고 살면 안 되냐?”
“스타킹이 뭐 어때서. 애초에 스타킹도 하나의 패션아이템이라고.”
“너 그 발언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건 알고 있지?”
“어… 그러냐?”
“진짜 가끔씩 나는 네가 어떻게 대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니까.”
“나 미술 예체능으로 들어왔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너처럼 생각 없이 사는 녀석도 대학에 간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소리였어.”
성찬이의 뺨엔 선명한 손자국이 생겼다. 보기만 해도 얼얼한데 본인은 오죽했을까. 손으로 살살 문지르는 성찬이의 오른쪽 눈가가 촉촉했다. 확실히 맞을만해서 맞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여자랑 다신 안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말했다. 성찬이가 잠시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 한마디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다시 만나고 싶긴 하네.”
흠, 눈치 챘군.
“하지만 그 여자가 신비체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성찬이가 말했다.
“그런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을 본 적 있어?”
내가 대답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병명일 수도 있지. 나한테는 병이라고 부르기도 뭣하지만.”
“그렇게 스타킹이 좋냐.”
“최고잖아. 너도 나중에 느끼게 될 거야.”
“나한테까지 전파하려고 하지 마.”
“됐다. 너처럼 스타킹의 멋짐도 모르는 친구랑 백날 대화해봤자 넌 알지 못하겠지.”
“그거 다행이네.”
걷다보니 드디어 우리 둘의 분기점이 나타났다. 성찬이는 이대로 왼쪽이지만 나는 오른쪽이다. 하지만 성찬이는 잠시 나의 어깨를 잡았다. 얼얼한 뺨은 조금 가라앉았는지 선명했던 손자국이 조금은 희미해졌다.
“잘 들어. 네가 어떤 놈인지 알지?”
“난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 그 여자가 신비체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가까운 시일내에 또 너랑 마주치게 된다면…”
성찬이는 조금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성찬이와 말을 맞췄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위험할 수 있으니까…”
“도망치라고.”
“도망쳐… 그렇지! 잘 아네.”
“알았어~”
“또 할리우드 액션영화마냥 그러고 싶지 않으면 내말 들어.”
“알았다니까!”
“친구로서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니까 건성으로 듣지마.”
“알았다고! 나도 알아!”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봐.”
성찬이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 날’을 겪은 것은 나다. 성찬이가 아니다. 성찬이는 그냥 내 얘기를 들어줬을 뿐이다.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안단 말이다. 조금은 고마웠지만 조금은 성가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걱정해봐야 나는 다시 ‘그들’을 마주해야한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걷는다. 날이 더워서 운동화대신 슬리퍼를 신고 올 걸 하면서 후회했다.
나는 이유없이 스마트폰을 꺼내서 통화내역을 보았다. 저번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단 두 명과의 반복적인 통화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한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증거지만 나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들을 치워버리고 현재를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으로 뭐 먹지?”
하지만 내 운명은 허락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길 건너편에서 방금 그 여자가 보였다.
***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마주치면 안 된다. 최대한 떨어져서, 최대한 멀리 달려간다.
버스정류장? 아니야 저 여자랑 너무 가까워. 더 멀리 가야해.
더 멀리 있는 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자취방까지는 좀 돌아서 가자.
어떻게든 저 여자를 마주치면 안 돼.
설사 만나서 말을 걸었다고 해도 무시하고 도망쳐야한다.
제발 부탁이야. 저리 가. 저리 가주세요. 제 눈앞에서 제발 사라져주세요.
부탁합니다!
이렇게 애원할게요!
제발 평생 모르는 사이로 지내게 해주세요!
달리면서 머릿속에 든 글자가 제멋대로 글자를 조합해서 생각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 만나지도 못하는,
다른 나라의 평범한 사람과 다른 나라의 평범한 사람처럼,
다른 지역과 다른 지역의 토박이들처럼,
잠깐 스쳐지나가는 그런 사람들도 아닌,
이대로 그냥 저 멀리 가게 해주세요!
제발!
저 멀리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동시에 내 뒤에서 달려오는 버스도 보인다. 번호를 보니 저게 아니면 집에 못 간다. 이제 진심으로 달려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달리자! 달려!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자! 중학교에서 육상으로도 갔었던 내 다리를 믿자!
최대한 여자에게서 도망치자!
겨우겨우 버스가 나를 제치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도 정류장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손을 흔들자 버스가 나를 기다려준다.
좋아. 운이 좋다. 이대로 여자에게서 떨어지자.
안 그러면…
“어?”
안 그러면…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의 생각회로가 잠시 중지되었다.
삑! 내 교통카드가 버스에 결제된다. 이미 결제된 버스라서 내리기도 뭣한데,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 버스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이 좋기는 개뿔.
팔다리가 검은색인 그 여자가 버스에 타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곧바로 들어왔던 방향으로 다시 나갔다. 운전사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솔직히 하나도 안 들린다.
버스를 보내고나서 깨달은 점은 교통비 천원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는 것과 자취방까지 그냥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버스에서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
“저기요.”
“으아아아아!”
“꺄아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내 어깨를 잡은 의문의 손짓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거기에 놀라서 저쪽도 소리를 지르니 우리 둘의 모습은 참 가관이었을 것이다.
아니, 뭐 그리 유쾌한 상황도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잡았던 사람은 바로 그 여자였다. 손발이 검은 여자. 하지만 어째서? 버스는 이미 지나갔… 아 이런, 중간에 멈추고 저기 이제야 가는 군. 설마 나를 보고나서 버스를 중간에 세우고 내린 건가.
하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그렇게 달렸는데도 결국 도망치지 못했다.
“저를 왜 피하시는 거에요?”
그녀가 나에게서 말이다.
***
“그쪽이 저를 따라다니시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제가 왜 그쪽을 따라다녀요?”
“그러면 왜 자꾸 저랑 만나죠?”
“그쪽이 저를 따라다니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아니면 우연이거나.”
“솔직히 그냥 우연 아닌가요? 게다가 우린 오늘 처음 만났다고요.”
“하아… 그래요. 그런데 제가 장담하는데 내일도, 다음날도, 어쩌면 그 다음날도 당신이랑 저는 만나게 될 거에요.”
“제가 무서우세요?”
“정확히는 당신이 무서운게 아니라 당신을 노리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거죠.”
이런,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하다보니 그만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오 멍청한 고상현! 20년 동안 살면서 대화하는 법도 잊어버린 거냐!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제기랄. 망했다.
“당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죠?”
“아뇨.”
도망치자. 도망쳐서 이대로 이 여자를 피하고 살자. 그렇다면…
하고 다리를 하나 내딛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내 움직임은 정지화면마냥 멈춰버렸다.
무언가 검은 것이 나의 몸을 감싸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붙잡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팔이라고.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죠?”
알지. 엄청나게 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