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이는 우두커니 선 채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오른 손에는 장사백 모르게 품에 고이 숨겨놓은 단도를 꺼내들어 쥐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 힘이 한 가득 실리었고 가녀린 소녀는, 울 제국의 병사들을 향해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호오, 이 년 봐라! 어린아이 주제에 감히 그 작은 칼로 우리들에게 대항하겠다는 거냐? 하하! 가소롭기 그지없군.”
“애석하게도, 우린 어린애라도 봐주거나 하지 않는데 말이야..”
장사백이 령이에게 크게 소리쳤다.
“령아! 이 어리석은 것. 도망을 가든, 숨든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왜 나오는 것이냐!”
“닥쳐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백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제국의 병사들 중 한 녀석이 사백의 얼굴에다 세게 주먹질을 한 것이었다. 그의 터진 입술 사이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비웃음을 짓고는 병사 하나가 령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 꼬맹이 녀석아. 그냥 순순히 죽는 것이 어떻겠느냐. 가는 길 편하게 보내 줄 터이다.”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은 그는,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곧 그의 검이 령이를 벨 것이다. 이 모습을 초조히 보고 있던 장사백은 뭔가 고민을 하고 있어보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사 놈을 보는 령이의 모습에는 여전히 두려운 기색 따윈 없어 보였고, 두 눈은 증오심으로 일렁거렸다.
“흥! 그렇게 노려보면 어쩌겠느냐! 그만 가자꾸나!”
병사의 검이 령이에게로 내려쳐지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는 뒤에서 들린 비명소리에 령이에게 검을 내려치는 자세를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뭐야?!”
자신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장사백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의 손에는 낡아 보이는 검 자루 하나가 보였다. 그는 아까 마부석에 꺼내어 품에 숨긴 것이 바로 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루에서 검을 빼들지 않은 채로 병사 한명의 머리를 쳐 기절시켜버렸다. 그 행동거지가 신속하고, 령이에게로 정신이 팔렸던 병사는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젠장,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군. 이제 네놈 혼자 남았다. 어차피 우릴 순순히 보내주진 않을 것이고, 네 녀석도 처리해야겠구나.”
한 낱 장사치에 불과한 자라, 병사들은 그를 업신여기고 있는데다 자신들에게 비굴한 자세로 살려주길 원하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장사백의 모습에는 기백이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네 녀석, 역시 장사치가 아니군! 맞아! 내 말이 맞았군! 분명 넌 풍 나라의 첩자로군 그래!”
“흥! 네가 아무리 생각해본들, 난 장사치다. 어디 장사치에게 호되게 당해보겠느냐!”
말을 마친 사백이 검 자루를 쥐고 몸을 날렸다. 성큼 다가오고 있는 그의 모습에 병사는 검을 고쳐 잡았다. 이미 그에게 뒤에 있는 령이의 존재는 까마득하게 잊은 채였다.
이윽고, 사백의 검 자루와 병사의 검 날이 맞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렸다. 사백이 상대하는 병사는 저 뒤에, 방심해서 기절한 병사와 달리 꽤나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역시 제국의 병사는 병사였다. 철저히 훈련을 하기로 유명한 제국군이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는 상대를 얕잡아보다 당하는 이들도 있긴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사백은 생각보다 병사의 저항이 강한데다, 자신은 검 자루로 상대를 하고 있어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다른 병사들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그는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검 자루에서 검을 빼들었다.
“호오, 이제 제대로 하려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만만치 않은 상대지. 흐흐..”
다시 시끄러운 소음들이 그들이 싸움을 벌이는 장소 주변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직 주변에 다른 이들이 없기에 망정이었다. 계속된 검의 교환과, 수차례 이어진 합들에도 불구하고 사백은 병사에게 작은 상처하나 입히지 못하였다. 이렇게 소득 없이 시간만 소비하는 것은 자신에게 상당히 불리한 형국이었다. 싸움 중에 잠깐 머리를 굴리던 그는, 검을 허리춤으로 향하게 한 후 자세를 새로이 고쳐 잡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터였다.
“뭐하는 작당이냐? 죽기로 결심한 것이냐? 하하! 네 녀석의 실력을 보아 하니 검을 한두 번 잡아본 솜씨는 아닐 터! 내 비록 네 녀석을 처치 못할지언정 네 녀석도 마찬가지일 테지. 결국! 주변을 수색하는 내 동료들에게 들킬 것이고 곧 네 놈은 차가운 시체로 들판 위를 굴러다닐 것이다! 하하!”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은 장사백은, 어느새 사나운 눈빛으로 병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병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편, 이들 싸움을 지켜보던 령이는 다 큰 어른들이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을 처음 보던 탓에 잠깐이나마 정신이 팔려있었다. 거기다 섣불리 다가설 수도 없었다. 령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병사의 뒤를 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단도의 날에는 달빛이 연신 반사되어 번뜩였다.
장사백은 싸움 도중에도 마차 쪽에 있는 령이의 목적을 이미 간파하였고, 자칫 령이가 싸움에 휘말리다 다칠지도 몰랐기에 어서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자신이 시간을 더 소비하다간 다른 병사에게 들키거나 령이가 싸움에 개입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다 자신이나 령이나 둘 중하나는 크게 다칠 것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제국의 병사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상당히 묵직하고 매서운 공격이었다. 거기다 재빨랐다. 이 다음 이어질 사백의 모습은 분명 그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릴 것이 그려지는 바였으나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병사의 검이 사백에게 닿기도 전에, 공중에 멈춰 섰다. 이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사백은 허리춤에 위치시킨 자신의 검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병사를 향해 치켜들었다. 마치, 전광석화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나 빠른 그의 일격에 병사의 몸이 크게 베이게 되었다. 그가 몸에 차고 있는 갑주도 그 일격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그대로 병사의 육중한 몸이 뒤로 쓰러졌다.
“?!”
령이는 사백의 일격 필살에 상당히 놀랐다. 일개 장사치인 그가 어떻게 저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는 병사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였다.
“령아! 어서 마차에 타거라! 떠나야 한다.” 사백의 말에 령은 정신을 차리고 마부석으로 향했다. 그는, 나머지 병사 한명을 기절시켰던 터라, 깨어나면 분명 본대에 알릴 것이 분명하나 사백은 더 이상 죽이기를 원치 않았다. 어차피 죽이나 안 죽이나 결국 이 상황이 발각 당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본대에 합류하러 가지 않으면 다른 병사들이 찾으러 올 것이 분명하였기에.
“이럇!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급히 말을 이끈 사백은 제국의 야영지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결국 도망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어쩐지 사백의 좁혀진 미간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령아, 우린 칠흑 숲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곧 우리가 벌인 일이 본대에 알려졌을 것이다. 그들의 추격을 이 마차로는 따돌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따라 잡히다 죽임을 당할 것이지. 우리가 살기 위해선 칠흑 숲속으로 가는 방법 이외에 뾰족한 수가 없구나, 아무리 추격대라도 칠흑 숲까진 따라오진 않을 것이다. 젠장.. 결국 그곳으로 가는 구나.”
연신 고삐를 움직이며, 말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령이는 짐칸으로 들어가더니 천을 들추고 지나오던 길을 쳐다보았다. 한번 씩 마차가 들썩이자 령이도 따라 몸이 흔들렸다. 자신들을 향해 쫒아오는 추격대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다시 마부석을 향하려던 령이의 귓가로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달렸다. 다시 천을 들추고 지켜보던 령이의 눈이 다소 커졌다.
“사백 아저씨!, 사백 아저씨!” 령이의 외침은 장사백에게 들리지 않았다. 마차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급히 사백이 있는 마부석으로 향했다. 그는 연신 말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백 아저씨! 큰일 났어!”
“령아 뭐라는 것이냐!”
령이는 사백 가까이에 가서 소리쳤다.
“제국의 병사가! 지금 우릴 따라오고 있어!”
“!!”
사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뒤를 보았다. 아직 가까이 있지 않았지만 분명, 자신들을 향해 쫒아오는 추격대가 보였다. 그들은 6명으로 구성된 기마대였다. 그의 짐마차로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였다. 붙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았다.
“젠장! 아직 숲까진 거리가 남았다. 그때까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사백의 말대로 그의 앞으로 칠흑 숲이 보이는 듯 했으나, 아직까지 거리가 상당했다. 그 사이에 제국의 기마대가 가까이 쫒아올 수 있었다. 말의 고삐를 진 그는 더욱 힘을 가해 말들을 급히 재촉하였다.
“이럇! 이럇! 어서 가자구나 애들아! 어서 달려! 이 주인을 위해 더 빠르게 달려다오!”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듯 말들은 더욱 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장사백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말들이 속력을 낸다 한들, 기마대의 말의 속도에 미치지 못했다. 제국의 기마대는 여러 말들의 종을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추격대로 쓰이는 말은 값비싼 말이었다. 말들 중 가장 빠른 종이었다. 일개 짐마차를 끄는 말에 불과한 장사백의 말들은, 추격대의 말의 빠르기를 이길 수 없었다. 점점 숲의 모습이 크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장사백은 행운이 자신의 편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령이는 다시 짐칸으로 돌아가 추격대가 쫒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령이는 한편으론, 저렇게 빠른 말이 있음을 보고 놀라기도 하였다. 령이의 행복한 나날들이 불행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오직, 제국뿐이라 계속 제국의 손아귀에서 쫒기는 상황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기에, 제국을 상대할 순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사백이 어서 말을 이끌고 칠흑의 숲으로 들어가기만을 바랬다. 추격대를 따돌리지 못하면 결국 자신의 한을 풀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럼 린의 복수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죽어 린의 얼굴을 볼 면목이 령에게는 없었다.
화려한 별들이 수놓은 밤하늘 아래로 벌어지는 일은, 조용한 밤하늘과 달리 대조되었다. 드넓은 들판 위를 내달리던 장사백의 마차와, 그를 뒤따라 추격하는 제국의 기마대. 말들의 대지를 치는 소리는 천둥과도 같았고, 그 충격은 대지를 울부짖게 만드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