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억이 아주 많아. 딱 좋은 아이구나. 난 오래전부터 너 같은 아이를 찾고 있었지. 기억이 무성한 덤불처럼 빽빽하고, 아주 많은 아이. 나한텐 네가 필요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제가 뭘 할 수 있다고요.”
“흠, 너는 나를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가는 난 너를 가차 없이 죽일 거야.”
“여기는 꿈속인데 어떻게 할 거라는 말인데요?”
“너를 기억의 바다에 빠뜨려서 허우적대다가 죽게 만들겠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너의 기억의 바다는 아주, 아주 깊어. 나이에 비해 깊이가 아주 깊지. 기억이 많을수록 바다는 더욱 더 깊어지고. 너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16살이고 언니와 오빠가 한 명씩 있는 나, 이은영. 난생 내가 필요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난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때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네 꿈은 너의 무의식속에서 나온 생각뿐인 가짜 꿈이 아니다. 내가 영상을 만들어서 오늘 네가 꾸기로 한 꿈을 바꿔치기 한 거니까. 네가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네가 꿈속에서 들은 내용 그대로 할 것이다. 오늘밤 꿈에 다시 찾아가겠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꿈은 꿈일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럼 꿈에 나온 남자가 정말 실존하는 남자인건가? 난 협박을 당한 거고? 모든 게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어떻게 꿈을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건가?
“이은영! 엄마가 빨리 일어나래!”
“어, 알았어! 좀 있다 나갈 거야!”
그렇다면 엄마께 말씀을 드려볼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쓰러졌다.
“아, 그리고 네 임무는 아무한테도 말을 하면 안 된다. 말을 하게 되면 내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 버리지. 누구하나 믿지도 않겠지만, 만일에 경우에 대비해야해. 아직까지는 준비단계야...”
아! 내 생각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건가!
이런 임무를 수행하다가 정말 만약에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못마땅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또다시 잠자는 시간. 또 그 꿈을 꿀까? 눈은 스르르 감겼다.
“아마 하루를 내 생각만 하면서 다 보냈겠지.”
“당신은 누구죠? 왜 날 가지고 그래요? 난 아무것도 못해요. 두려워요.”
“나는 메모리 킬러다. 나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마. 그리고 너의 목숨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너의 영혼 한 조각이 필요한 거야.”
“제 영혼이요?”
“그래, 네 영혼. 네 영혼 중에서 한 조각만 떼어주면 된다. 그리고 그 영혼조각은 다시 너에게로 돌아갈 거야. 잠시 빌리는 것, 그뿐이야.”
“제 영혼으로 뭘 하시려고요.”
“네 남은 영혼이 너의 일상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을 시간, 예를 들면 학교에 가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 네가 나에게 ‘빌려’준 영혼 조각은 사람들의 기억을 나쁜 기억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나쁜 기억은 네 기억에서 조금만 떼어내면 되. 너의 나쁜 기억을 사람들에게 많이 줄수록 네가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횟수는 점점 적어지지. 그리고 마침내 네 나쁜 기억을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면 그 기억은 너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저 대신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잖아요!”
“그래, 역시 쉽게 넘어가지 않는군. 그렇다면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주겠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그 능력을 가지면 생각을 알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생각들이 너의 머릿속에서 유형화되지. 이정도면 할 만 하지 않아? 이. 은. 영.”
내 이름도 알고 있어! 어떻게...
깨어났다. 새벽 4시에.
저 사람은 나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정말 많다. 어떡해야하지? 유치원에서 갑작스럽게 나온 노란 액체로 인해 놀림 받은 일, 방귀 인 줄 알았는데 갈색의 물컹한 물체였던 일, 받아쓰기에서 45점 맞은 일로 쫓겨난 일... 모두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게다가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다니, 마음이 흔들릴 만 한 조검이었다. 그래도 안 되는데...
나는 그 남자에게 대답을 하기 위해 억지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은영, 생각해봤나? 대답이 빠르군. 어디,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말해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꿈에서 말했다.
“네, 좋아요,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