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가시덤불 - 1화. 기억 바꿔치기
이은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꿈에서 말했다.
“네, 좋아요, 하겠어요!”
“잘 생각했다. 내일 밤 12시 정각에 너를 깨우겠다. 잠을 미리 자 둬야 할 거야.”
“나를 깨운다고요? 어떻게요?”
마지막 말은 꿈속에서 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 한 것이었다. 옆에서 계속 깨우고 있었는지 언니가 이은영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언니도 못 깨우는데 꿈속에서 겨우겨우 등장하는 남자가 어떻게 나를 깨우겠다는 거야. 악몽이라도 꾸게 할 건가? 악몽은 이미 꾸고 있는데!
이은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제안을 받아들인 게 과연 좋은 걸까? 겨우 기억을 없애는 것과 생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과연 흡족한 걸까? 그렇지만 목숨이 달려있질 않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퍼 담을 수는 없는 일...
이은영은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고 밤 9시 반에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여러 과자, 아껴두고 있던 오렌지 주스, 소보로 빵 등등. 나를 어디 먼 곳으로 데려갈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배고프겠지. 오, 그건 안 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좀 편하게 이불을 겹겹이 깔아놓고 배게도 푹신하게 준비했다. 절대 잠에서 깨어나지 않겠어. 그렇게 10시 반에는 드디어 잠이 들었다.
“일어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와 빛에 잠을 깼다. 철석같이 깨지 않겠다고 준비했는데, 이게 뭐람! 그런데 빛이 이상했다. 검은색 빛이었는데, 방 안이 훤히 밝혀졌다. 빛이 검은색인데 밝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넌 이것도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내 능력을 조금 써서 빛으로 방을 밝히고 너희 가족들은 내가 허락할 때 까지 깨어나지 않는 주문을 걸어 놓았다. 내가 주문을 취소하거나 죽지 않는 한 내 주문은 절대 없어지지 않지. 하지만 날 죽일 생각은 마. 괜히 그랬다가 내가 주문을 취소할 생각을 버리면 끝이니까.”
“시끄러워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니까. 이제 16살이 되는 학생인데 누굴 죽이기야 하겠어요? 난 살인마가 아니에요!”
이은영은 나름대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저 남자는 내가 이 말을 얼마나 다리를 후들거리며 말했는지 모를 거다. 후, 심장 떨려...
“두렵구나. 아무렴, 두렵겠지. 그런데 너의 임무는 두려운 게 아니란다. 즐겁고 뿌듯한 일이지.”
“내 임무가 정확히 뭔데요?”
“너의 임무는 사람들의 기억을 바꿔치기 하는 거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너희 가족이 잠들어서 너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시간에, 너의 영혼 중 나에게 빌려주기로 계약한 영혼조각이 육체에서 빠져나와서 사람들의 기억을 바꾸는 거지. 처음에 널 만났을 때는 네 영혼조각이 네가 활동하는 시간에 임무를 하라고 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나름 급해서 이렇게 하려고 한다. 전혀 위험하지 않단다. 영혼은 무사히 네 몸 속으로 스며들 수 있어.”
“그러면 제 학교는요? 하루라도 빠지면 어머니께서 학원을 학교 빠진 날 만큼 더 다니게 하실 거예요! 그건 안 된다고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임무를 끝마친 후에 시간을 되돌리는 주문을 걸어주마. 그러면 너는 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바꾸고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이상이 없을 거야.”
이은영은 그 남자를 정신병자 보듯이 쳐다봤다. 시간을 되돌리면 내가 기억을 바꿔치기... 한 것도 다 없어지는 거잖아!
남자는 이은영의 의문을 알아챈 듯 이어 말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주문을 걸어도 바꾼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왜 그러냐고 물을 거지? 그건 너의 나쁜 기억이 모두 어린 시절 속의 기억이기 때문이야. 네가 6살 때 겪었던 나쁜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로 옮기면 그 사람도 6살 때 겪었던 일로 생각하게 되는 거지. 그런데 시간을 되돌리는 주문은 네가 6살이 될 때 까지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잖아? 6살 때의 기억은 6살 때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그 일을 하지 않아야만 기억이 없어지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 어릴 때 기억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나서 시간을 되돌리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물거품이 되지 않아. 이미 전에도 실험을 해 봤기 때문에 확실히 밝혀진 사실이야.”
그런데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면 그 시간에 했던 일도 되돌려지는 건데, 그 기억이 어릴 때 기억이라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어렵잖아! 차라리 공부가 더 쉬웠다.
“그래요, 그래요. 그러려니 할 테니 빨리 합시다. 어쨌든 아무이상 없으면 된 거죠.”
“넌 빠릿빠릿해서 좋구나! 내가 이 일을 시킨 어린이들은 모두 정확히 알려고 하고 자꾸 일을 뒤로 미뤄서 몇 번 죽였는데. 운이 좋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같은! 꼼꼼하게 알려고 한 건데 그걸로 인생마감이라니! 호기심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였던가!
“좋아, 마음에 든다. 이제 밖으로 나와라. 아니, 육체는 남겨두고. 육체가 있으면 일을 못하니까.”
“어떻게 하라는 거죠? 처음인데 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의 숨결을 모두 내보내야 해. 폐에서 모든 산소를 빼내야 하지. 그리고 나올 때는 천천히 나와야 해.”
이은영은 마시고 있던 공기를 도로 내뱉고, 숨을 내쉬었다. 계속. 계속. 계속. 그리고 일어서는 느낌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물에서 나오는 느낌이 났다. 영혼이 빠져 나온 건가?
“그래, 그래, 아주 잘했어! 너의 영혼은 정말 순수하고 고결해. 육체와 거의 똑같은 수준의 영혼이라... 좋아!”
육체와 똑같은 영혼? 이은영은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냥... 똑같았다. 이게 영혼? 영혼은 자고로 좀 투명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몸, 아니 영혼을 만져보니 역시, 그냥 몸 같았다!
“네 영혼이 맞다. 기억이 많고 순수한 사람일수록 영혼이 육체와 거의 흡사하지. 난 너 같은 영혼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임무를 맡기에 딱 적합해. 네가 내 계획에 많은 기여를 해 주겠구나.”
“많이 기여하든 말든... 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넌 처음이니까 나에게 실습을 해 봐라. 네가 잊고 싶은 기억을 네 육체에서 찾아서 내 머릿속에 넣으면 된다. 나쁜 기억은 나에게 양식이 되기 때문에 해롭지 않지.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사람의 무의식 영역에 넣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감쪽같이 처리해도 들통 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거든. 들통 난 사람들과 일을 못 처리 한 애는 내가 기억의 바다 수초에 휘감아 놓았고. 무의식 영역은 다른 곳 보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 영역은 검고 불투명해서 눈에 띄지. 그곳에 집어넣으면 된다.”
남자는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칼을 꺼내서 자신의 머리를 반으로 자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