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레온은 다시 제프리 일가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밤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병들은 어제와 전혀 다른 태도로 그에게 인사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잠시 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길이네.”
사병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길을 비켜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온은 바로 어제 이곳에서 보았던 집사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사병들이 언제 근무를 교대하는지도 꼼꼼히 관찰했었다.
이제 막 야간 교대를 마친 사병들은 집사가 밖에서 들어오자 내심 놀랐지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비록 집사가 출타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지만, 바로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더구나 도시 제일의 부자인 제프리 일가는 영주와 은밀한 사이이기도 했다. 때문에 집사는 밤늦게 영주를 찾아가는 일이 잦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네.”
레온이 대문을 통해 들어가다가 문득 사병 한 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걸 도련님 방문에 걸어놓게나. 혹시 주무시다가 깨시면 곤란하니 문고리에 걸어놓도록 하게. 내 잠시 볼일을 보고 갈 터이니.”
레온이 내민 것은 작은 천주머니였다. 행여나 의심을 살까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영주님이 친히 하사하신 걸세. 기력회복에 좋다는군. 소중한 것이니 잘 다루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갖다놓겠습니다.”
“그리하게나.”
사병은 천주머니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레온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남은 사병에게도 한마디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제처럼 소란이 없도록 주의하게.”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훗, 멍청한 놈들.
레온이 조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설 때쯤, 심부름을 마친 사병이 막 나오고 있었다.
“걸어놓았나?”
“예, 문고리에 걸어놓았습니다.”
“수고했네.”
그가 사병을 무심히 지나치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만약 레온을 아는 자가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혀를 내둘렀으리라.
그는 어제 잠깐 집사를 봤을 뿐이다. 한데 그는 완벽하게 집사의 연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말투나 표정, 몸짓 하나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가 중원에 있던 시절, 유랑단 소속이었을 때 모진 매질까지 당해가며 배운 연기력이었다.
그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눈빛과 호흡마저도 완전히 모방했다. 성대모사 역시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살았던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게다.
‘놈은 아직 병석에 있을 테니 일층이겠지?’
사병이 되돌아 나오는데 걸린 시간만 봐도 이층보다는 일층일 가능성이 컸다.
레온은 우선 일층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중간쯤에 천주머니가 걸린 문짝이 보였다. 레온이 사병에게 건네 준 그 주머니였다.
‘여기군.’
레온이 천주머니를 들었다.
사실 사병에게 천주머니를 갖다놓게 한 것은 버몬의 방을 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주머니 안에 든 것은 정말로 버몬에게 줄 것이긴 했지만.
똑똑똑.
늦은 밤이었지만 그는 과감히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방 안에서 버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이 밴 목소리였다.
레온이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사?”
버몬이 호롱불을 켜놓고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집사가 깨웠지.”
버몬이 퉁명하게 말했다.
싸가지 하고는.
레온이 방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보면 모르오? 좋을 리가 없지. 그나저나 이 야밤에 무슨 일이오?”
아무래도 버몬은 집사가 잠을 깨운 것이 몹시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레온이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 앞으로 물건이 왔더군요.”
“물건? 이 시간에 인편으로?”
“예, 도련님께 꼭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레온이 천주머니를 버몬에게 건넸다.
버몬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천주머니를 풀어헤쳤다. 다음 순간, 그는 ‘기력에 좋다’는 그 물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왜 그러십니까?”
“이, 이걸 누가 준 거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것은 피로 얼룩진 손가락 두 개였다.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확 바뀌었다.
“누가 주긴. 네가 보낸 쥐새끼 두 마리가 줬지.”
“뭐요……? 잠깐, 당신 누구야?”
그제야 목소리가 확 달라진 걸 깨달은 버몬이 기겁을 했다.
집사가 조소를 지었다.
“널 죽이려고 온 저승사자다.”
“설, 설마! 너, 너!”
“쉬. 조용히 해. 안 그러면 정말 네 목을 가져갈지도 모르니까.”
버몬이 몸을 달달 떨었다.
말도 안 된다. 레온이 어째서 집사가 됐단 말인가. 이 녀석 정말 정체가 뭔가!
“어, 어떻게 네가…….”
“아직까지 살아 있냐고?”
버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레온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것 아냐. 그딴 쥐새끼 두 마리 보내놓고 설마 본좌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럼 그 어쌔신들은.”
이놈이 보낸 게 맞군. 빌어먹을 놈.
“그거 보면 몰라? 전부 죽여 버렸지.”
이제 버몬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떨어댔다. 레온이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버몬은 숨이 그대로 멎을 것만 같았다.
얼굴은 집산데 목소리가 레온이라니.
이 녀석 혹시 마법사인걸까?
마법사 중에는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기술은 상당히 높은 클래스였던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최악이 아닌가. 번개를 맞고 괴물이 된 것이든, 원래 하이클래스 마법사였든.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이 레온인 것이다.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댄 레온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이번에도 개수작부리면 다음에는 잘린 네 손모가지를 보게 될 게야. 그러니 쥐새끼는 그만 보내도록 해. 장담하건데 이게 마지막 충고다. 내가 어려운 것 시켰어? 아니잖아. 그냥 가게에 와서 무릎 꿇고 사과만 하라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어? 죽어도 못하겠어?”
공포에 질린 버몬이 도리질했다.
“그래, 할 수 있지?”
끄덕끄덕.
“좋아.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안 하면 너는 평생 그 자리에 누워서 지내야 할 거야. 약속하지.”
끄덕끄덕.
레온이 마지막으로 씨익 웃었다.
버몬은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사지가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지금 레온의 미소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 레온도 버몬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레온의 마지막 미소 역시 혈마존의 심공(心功)인 멸심마소(滅心魔笑)였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꿈에 젖은 것처럼 무기력하게, 또는 공포에 질려 끝없는 절망에 빠지게도 하는 마소였다.
아직 내력이 미약한 레온이었지만 버몬을 상대로는 그 정도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레온이 만족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왕 온 거 손가락 하나만 자를까?”
버몬이 모가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도리질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큰 소리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휴, 관두자. 귀찮아졌어.”
그가 정말로 귀찮아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가져온 손가락은 내가 다시 가져간다. 괜히 시끄럽게 일 만들기 싫거든. 명심해. 또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잘 생각해 봐. 너한테 뭐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일지. 수치는 짧지만 불구는 평생이야. 그리고…….”
그가 상큼하게 웃었다.
“…뒈지면 영원이고.”
레온은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버몬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저놈, 저놈은 분명히 자기 말을 증명할 놈이다. 나쁜 약속일수록 죽어도 지킬 놈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날 찾아와서 먼저 죽이고 죽을 놈이다. 지독한 놈. 마귀 같은 놈.
레온에게서 본 악마의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버몬이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
사흘 후, 프라이스와 고든은 예정대로 꿈의 밥상에서 해고됐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데없이 해고라니!”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이쪽 사정이 그렇게 됐다네. 대신 두 사람에게 임금이 더 높은 일자리를 알선해주지 않는가.”
데이먼이 달랬지만 프라이스는 강하게 반발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실 그가 높은 임금을 마다하고 이토록 반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동안 꿈의 밥상에서 식재료를 사며 횡령한 공금만 해도 제법 짭짤한 수익이었던 탓이다.
그게 전부 지나치게 착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 좋은 데이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다른 일자리로 간다면 그 짭짤한 수익이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닌가.
‘혹시 레온이 그 일을 고자질한 건가?’
그러면서 그는 데이먼 옆에 서 있는 레온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사실 레온은 지난번 그의 해고를 슬며시 언질 해두었지만 프라이스에게 그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고든은 오히려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알선 받아서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프라이스를 보며 이 사람이 이렇게 의리가 좋은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네, 프라이스. 가게 사정이 그렇게 됐으이.”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동안 같이 일한 시간이 얼만데.”
“내, 자네 마음을 왜 모르겠나. 그래도 소개해 준 그곳이라면 여기보다 좋은 대우를 해줄 걸세.”
“저는 임금보다도 사람을 보고 일합니다.”
아우, 썅! 닭살이 다 돋는다.
그러시겠지. 사기 치기 좋은 사람보고 일하겠지. 어떻게 내가 버젓이 보는 앞에서도 저런 소리를 할 수가 있나.
레온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느끼며 내심 콧방귀를 꼈다.
데이먼은 그의 말을 진짜로 생각하는지 연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결국 프라이스는 항의를 포기했다. 어쨌거나 주인이 더 이상 고용할 의사가 없는데다가 더 높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까지 구해주었으니 할 말은 없는 게다. 언제까지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정을 운운하며 매달릴 수는 없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부디 건강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두 사람이 데이먼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그 순간 레온은 프라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읽어냈다.
‘뭔가 일이라도 낼 것 같은 표정이구만.’
아니나 다를까, 프라이스는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나를 잘라? 두고 보자. 후회할 날이 올 게다.’
그런 속 심정을 모르는 데이먼이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미안하네. 자네들도 부디 건강하게 잘 살게나.”
데이먼으로서는 마치 가족을 잘라내는 심정이었다.
***
그 후, 꿈의 밥상에서는 한동안 평온한 나날이 흘렀다.
대신 남은 사람들은 전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레온이 주방에 들어가는 일은 잦아졌다. 그가 식재료를 보는 안목도 탁월했기에 자주 주방에서 보조 역할을 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운반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야채를 다듬거나 간단한 조리, 그리고 고기를 재워놓는 일도 도맡기 시작했다.
야채를 처음 다듬던 날, 레온은 이가 나가고 보기만 해도 흉측한 망혼검을 꺼내들었다. 결국 데이먼과 브란이 기겁을 하면서 말린 후에야 주방용 칼을 사용했다.
데이먼은 식재료를 거의 확인하지 않았다. 다듬어진 식재료로 요리만 할 뿐이었다. 그만큼 자기 직원을 믿고 행동해왔던 것이다.
‘저러니 사기를 당하지.’
레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데이먼은 사실 장사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좋았다. 그게 제일 큰 흠이라면 흠이었다.
레온은 주방 보조 일을 도와주는 일이 잦아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주로 가게 매출을 올리는 것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대로 매출이 오르지 않으면 정말 빚 때문에 장사를 접어야 할지도 몰라. 보조 일을 하면서 매출을 올릴 방법이 없을까?’
마음 같아서는 직접 요리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요리사이자 주인인 데이먼의 자존심 문제도 걸려 있어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레온은 틈틈이 데이먼의 요리를 보면서, 그리고 야채를 다듬으면서 거듭 고민을 해보았다. 가게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