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십시오.”
글라니스와 제임스에게 다가 온 사람은 레온이었다.
보통 남자 손님은 루나가 접객했지만, 지금은 루나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기에 레온이 다가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레온이 허리춤에 망혼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가게의 설정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글라니스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말했다.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내오게.”
“저희 가게 요리는 모두 맛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제일 자신 있는 것으로 내오란 말이네.”
레온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별 거지 같은 놈들이 굴러 들어와서는… 콱 죽여 버려…….’
하지만 레온은 곧 마음을 다스리곤 미소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레온이 가고 나서 글라니스는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자네, 술 한잔 하겠나?”
“임무 중에는 술 마시지 않습니다.”
“거 참 딱딱한 친구 하고는.”
“술 드시겠습니까?”
“일단 지켜보고.”
제임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늘 그랬다. 글라니스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맛있으면 정말 식사만 했다.
하지만 맛이 없을 때는 음식을 물려놓고 술을 시켜서 술만 마셨던 것이다.
잠시 후 레온이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양 꼬치 볶음과 생선살조림입니다.”
레온이 내려놓은 음식을 본 글라니스는 묘한 인상을 받았다.
단지 흔히 볼 수 있는 양 꼬치 볶음과 생선살조림이었는데, 그릇에 담긴 모양이라든지, 음식의 색깔이 묘하게 구미를 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향 또한 제법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어디 한 번 먹어볼까? 자네도 들지.”
글라니스는 먼저 양 꼬치 볶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 생각보다 맛은 평범하군. 그런데 확실히 뭔가 달라. 모든 요리의 기본은 식재료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요리에 사용된 식재료, 확실히 괜찮은 재료에 손질 또한 잘 됐군.’
그는 단번에 식재료의 선택과 다듬질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다시 생선살조림을 먹어 보았다.
‘이것도 괜찮군. 이곳 식당은 요리사보다 보조 조리사가 더 궁금한데?’
한편 그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계속 먹는 것을 보고 제임스는 다소 의아했다. 지금쯤이면 호불호가 갈려 맥주를 시켰을 시간인데.
“괜찮습니까?”
“자네는 어떤가?”
“그냥 그럭저럭 평범한 맛입니다만.”
“확실히 맛은 평범하군.”
“그런데 왜 맥주를 시키지 않습니까?”
“맛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점도 있어서네.”
“무슨 말씀이신지?”
“후후후. 내일은 이곳에서 생도들과 함께 식사를 했으면 하는군.”
“예에?”
제임스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는 다시 음식을 먹어보았다. 역시 평범한 맛이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생도들에게 보여줄 정도의 맛인가?
“요는 식재료라네. 메인 요리는 그럭저럭이지만 식재료의 선택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잘 다듬어졌어. 칼질이 잘되어 있다는 뜻만은 아닐세. 적당히 데쳐지거나 구워진 정도, 또는 숙성 정도 말일세. 그런데 이 재료들 도대체 어떻게 숙성시킨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군. 보통 그런 건 보조 조리사가 하는 것이지. 그리고 보기에도 구미가 당기게끔 접시에 음식을 담는 방법 또한 인상적이야.”
“그렇… 군요.”
평생 소드만 쥐고 살아온 제임스는 잘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글라니스가 이 정도로 칭찬을 하니 어쩐지 지금까지 먹었던 요리의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여보게.”
“예, 부르셨습니까?”
레온이 냉큼 달려왔다.
“주인장을 불러주게나.”
레온이 다소 걱정 섞인 어투로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닐세. 음식은 괜찮았네.”
레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얼른 데이먼을 불러왔다.
“손님 제가 이곳 주인장입니다만.”
“내일 이곳에서 단체 예약을 했으면 하오만. 그러고 보니 내일은 정기 휴일이었던가?”
데이먼의 귀가 솔깃했다.
단체 예약을 한다는데 정기 휴일이 무슨 상관이랴. 그렇잖아도 자금난에 허덕이는 이 판국에.
“단체 예약 말씀입니까? 언제쯤 오시는지요? 손님은 몇 분이나…….”
“언제 올지 잘 모르겠으니 괜찮다면 내일 하루 가게 전체를 빌리도록 하겠소. 2골드 드리지. 선금으로는 10실버 드리리다. 어떻소?”
데이먼은 저도 모르게 입을 척 벌리고 말았다.
요즘같이 장사가 안 되는 날, 2골드라는 건 뜻밖의 횡재였다. 2골드면 200코퍼가 아닌가.
“무, 물론 괜찮습니다. 요리는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글라니스가 푸근하게 웃었다.
“아무것이나 상관없소. 그나저나 이곳 보조 조리사는 누구요?”
“오늘은 이 아이입니다만. 혹시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데이먼이 레온을 소개시키며 역시 걱정스럽게 물었다.
글라니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외다. 그냥 한 번 물어보았소. 식재료가 좋기에.”
“하하하. 그렇지요? 이 아이가 식재료를 알아보는 눈은 귀신이랍니다.”
“호오.”
글라니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데이먼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이다. 가세, 제임스.”
“아직 다 먹지 않았는데…….”
제임스가 어정쩡한 자세로 대꾸하자, 글라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와서 먹게나.”
“할 수 없지요.”
제임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글라니스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정말 먹을수록 묘한 매력이 있는 음식이었다. 일종의 중독성이 있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카운터에서 오늘 먹은 음식 값도 따로 계산하고 나갔다. 그들이 식당을 나가자, 데이먼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아빠! 그 사람들 정말 10실버나 주고 갔어요?”
루나가 얼른 달려와 물었다.
“응? 아, 응.”
데이먼은 돈주머니를 풀어보았다. 정말 1실버짜리 은화가 열 개 들어 있었다.
레온이 활짝 웃었다.
“정말 잘 됐군요.”
“하하, 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꿈의 밥상 식구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날 저녁.
꿈의 밥상 식구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을 무렵, 도시의 양아치 이인조가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버몬과 그란은 쭈뼛쭈뼛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몸이 불편한지 다리를 조금 절었다.
데이먼과 브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았고, 루나는 매섭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또, 왜 온 거죠?”
“저, 그게…….”
레온이 주방을 정리하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버몬과 그란은 레온을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감히 레온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은 탓이다.
두 사람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루나가 차갑게 일렀다.
“오늘 영업 끝났어요. 돌아가 주세요.”
“그런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용기내서 레온의 눈치를 살폈다.
레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순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악마!
버몬과 그란은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땅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지금까지 가게에서 소란을 피워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놀란 것은 오히려 데이먼 측이었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큰절을 올리고 있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레온처럼 번개라도 맞고 온 걸까?
갑자기 왜 이렇게 딴 사람이 됐나.
그들 중 오로지 레온만이 느긋한 태도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버몬과 그란이 다시 소리쳤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데이먼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두, 두 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그동안 저희들의 외상입니다! 피해액도 조금 보탰습니다.”
두 사람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모두 당황해하는데 레온이 태연히 걸어가더니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와, 이거 꽤 되는데요? 이거 얼마죠?”
버몬이 대답했다.
“삼, 삼백 코퍼입니다.”
“그럼 두 분이니까 삼 골드?”
“그, 그렇습니다!”
“와. 그동안 많이도 드셨었구나. 공짜로.”
레온이 천진난만하게 말하자 루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레온이 씩 웃으며 데이먼을 돌아보았다.
“이분들이 이렇게 뉘우치고 있는데 그냥 성의를 봐서 받도록 해요, 아저씨.”
“크흠. 그런데 좀 갑작스러워서…….”
사실 데이먼이라고 왜 돈이 싫겠나. 저 돈을 다 받아도 아직 빚을 청산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하지만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뀐 양아치들을 보자 왠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이렇게 나왔다가 나중에 또 얼마나 뒤통수를 치려고 저러나 싶었다.
그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버몬이 말했다.
“아무 뜻 없습니다. 그저 저희들이 깊이 반성하고, 뉘우친 것입니다. 부디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사실 따지고 보면 성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것에 불과했다.
레온이 더 부추겼다.
“받도록 해요, 데이먼.”
“크흠. 그, 그러지. 두 분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받도록 하지요.”
데이먼이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완전히 일어서고 나서도 바닥만 바라보았다. 레온과 눈을 마주치기도 싫었던 탓이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만약 도시 사람 누구라도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리라.
버몬과 그란은 황망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거리로 나오자마자 그들은 도망치듯 걸음을 서둘렀다.
이걸로 된 거다. 이거면 저 괴물로부터 해방된 거다. 가게를 들어갈 때만 해도 이 치욕을 어찌 감당할까 두려웠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모든 게 끝나고 나자 마음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한편 꿈의 밥상에서는 모두들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오늘 하루는 대박이 터진 날이었다. 데이먼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돈을 구경한 날이기도 했다.
“브란, 재료는 확실히 준비되었는가?”
“예, 방금 또 확인해 보았습니다.”
단체 예약 손님을 받으려다가 소금이 부족해 큰 실수를 한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준비도 꼼꼼히 했다.
브란은 몇 번씩이나 필요한 건 없는지, 또 빠진 건 없는지 살펴보았다.
“정말 잘 됐습니다, 사장님.”
“앞으로 일이 잘 풀리려나 보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들이 악몽과도 같은 아침을 맡게 될 거라곤 이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