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특별요리
하룻밤의 단잠을 자고 일어난 데이먼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 방금 뭐라고 했나?”
데이먼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나는 너무 큰 충격에 아예 말을 잃었고, 레온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먼저 말을 꺼냈던 브란이 침울한 표정으로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식재료가… 전부 없어졌습니다.”
“그럴 수가…….”
털썩.
데이먼이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그의 귀에 브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 고의로 빼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혹시 어제 그 녀석들이 아닐까요?”
브란이 말하는 ‘그 녀석들’이란 버몬과 그란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가장 의심 가는 대상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뀐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더라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이런 짓을 벌여서 놈들이 좋을 게 뭐란 말인가. 더구나 600코퍼를 퍼부으면서 이런 못된 장난을 칠 정도로 놈들이 어리석을까.
“아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루나가 눈물을 그렁거렸다.
이렇게 되면 예약 손님을 받긴 글렀다. 식재료 중에는 이웃 도시까지 가야만 구할 수 있는 것도 꽤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식재료가 전부 사라졌으니 방법이 없는 게다.
더구나 오늘은 정기 휴일이다. 마르텐은 소도시였기 때문에 다른 식료품 상점에서도 문을 닫고 큰 도시로 물자 조달을 위해 떠났을 게다. 즉, 이 도시 전체에 가장 식료품 재고가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남은 건 뭔가?”
“생선뿐입니다.”
브란의 목소리가 갈수록 침울해졌다.
생선은 운반도 까다롭고 비린내가 몸에 밸 수 있는 만큼 놈들이 노리지 못한 듯했다.
만약 이번에도 예약을 취소하면 그 피해액은 어마어마할지도 몰랐다. 단지 2골드를 벌지 못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아란스국의 상도법에 의해 예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시에는 피해자가 선금의 열 배까지도 요구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선금만 돌려받고 끝내겠다고 하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았다.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보통 다섯 배의 보상을 받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
만약 피해자가 요구한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구속도 가능했다.
10실버의 열 배면 100실버다. 즉, 10골드. 어제 받은 600코퍼를 고스란히 내놓고도 400코퍼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말이 400코퍼이지, 400코퍼는 4골드다. 4골드는 보통 공사판의 천민 노동자가 1년 동안 죽어라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인 게다.
어쩐지 너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좋은 일만 터진 적이 없었거늘.
생선만 가지고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예약을 취소해야겠네. 브란, 그들에게 연락할 방도는 있는가?”
“예, 카운터에 현재 숙소를 메모해 두었습니다만.”
“가지. 어떻게든 말을 잘해보는 수밖에.”
데이먼은 퀭한 눈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발을 떼는 것조차 무거워 보였다.
“잠깐만요.”
레온이 나섰다.
“생선은 뭐가 있죠?”
브란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생선 종류는 다양하다만, 다른 식재료가 없으니 구이밖에 할 수 없구나. 2골드나 낸 손님에게 단지 소금 뿌린 생선 구이만 잔뜩 내줄 수는 없지 않겠니. 괜히 무리를 했다가 오히려 피해 보상액만 더 커질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식재료를 구하면요?”
“마르텐에서 그만큼 다양한 식재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오늘은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을 게다. 보통 물자 조달이 휴일에 이루어지니까 상점 주인들도 떠나고 없겠지.”
“흠. 그럼 조미료는 충분합니까?”
“조미료는 그대로 있다만.”
그러자 레온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제가 한번 해보지요.”
“뭘?”
데이먼이 그를 돌아보았다.
루나가 레온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야, 너 뭘 할 생각이야?”
“이번 일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데이먼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돼 멍하니 물었다.
“뭘 말인가?”
“이번 단체 예약 손님. 제가 음식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단체 손님을? 도대체 무슨 수로? 방법이 있나?”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데이먼과 브란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레온을 보았다. 어쩐지 레온의 표정에서는 확고한 자신감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믿기 싫어도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재료는 뭘 가지고 만들 생각인가?”
“그야 생선이죠.”
레온이 씩 웃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루나가 곁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온은 아까부터 주방에서 묵묵히 생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방법이 있긴 한 걸까?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는 것은 그만큼 손님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데 레온 혼자 그들을 맞이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더구나 지금처럼 식재료라고는 생선과 쌀밖에 없는 상황에서.
데이먼과 브란은 만약을 대비해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레온이 문득 루나를 돌아보고 물었다.
“밥은 할 줄 아느냐?”
무심코 본능대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도 레온은 ‘네 이년’이라는 말이 안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루나는 장난스럽게 받아넘겼다.
“아, 예. 할 줄 압니다요.”
“그럼 밥 좀 해줄래? 아니지. 먼저 쌀을 전부 물에 담그도록 해.”
“얼마나?”
“아마도 손님이 가게를 가득 채울 테니까 될 수 있는 한 많이.”
“정말 방법이 있긴 있는 거야?”
루나가 다시 한 번 걱정스럽게 물었다.
레온이 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또 그렇게 보는 거니. 사람 부끄럽게…….’
루나는 갑자기 시선이 마주치자 어쩔 줄 몰랐다. 전에는 동생이 누나를 보는 시선이었지만 지금은 남자가 여자를, 아니, 그보다는 어쩐지 오빠가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언제 레온이 이렇게 커버린 걸까?
레온이 싱긋 웃었다.
“날 믿어봐.”
‘아, 이놈이 웃어버리면 아무 생각이 안 나.’
루나는 발갛게 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고 쌀을 물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온은 생선들만 계속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거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나중에 범인을 잡아 족쳐야지.’
레온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지금, 중원에서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요리 도전하려하고 있었다.
***
시장은 조용했다.
상점들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고, 거리에는 쓸쓸한 바람만 불었다.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데이먼이 타박타박 걸어나왔다. 양 어깨가 축 처지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브란이 보였다.
“어떻게 됐는가?”
“샅샅이 찾아봤지만 문을 연 상점이 없습니다.”
“이제 다 틀렸군.”
“그래도 레온이 뭔가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뭘 할 수 있겠나. 아무 재료도 없이 고작 생선만 가지고.”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예약을 취소할까요?”
브란이 주머니에서 메모 해둔 주소를 꺼내보며 물었다.
데이먼은 그 메모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온을 한번 믿어보세.”
브란도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이번에는 왠지 그 아이에게 걸어보고 싶군요.”
두 사람은 결국 걸음을 돌렸다.
이 난간을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을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왠지 레온에게 희망을 걸고 싶었다.
레온의 마지막 미소를 보았을 때 어쩐지 그의 뜻대로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던 게다. 비록 바람 앞의 호롱불처럼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한 믿음이긴 해도.
***
“지금이라도 이야기해. 방법이 없다면.”
루나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기보다는 조바심 때문에 말투가 거칠어진 것이다.
레온은 쌀을 물에 담아 불리라고 한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주방에 남아 있는 조미료들을 이것저것 살펴보았고, 몇 가지 향신료들을 확인하거나 맛을 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군.”
도대체 뭐가 된다는 거야. 기껏해야 조미료, 향신료, 생선밖에 없는데!
질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루나는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마지막에 레온이 자신을 믿어달라고 한 말이 아직도 또렷하게 귀에 울렸기 때문이다.
레온이 생선을 전부 조리대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칼을 줘. 오른쪽 날로.”
“응? 아, 알았어.”
칼을 건네받은 레온은 빠르게 생선 비늘을 벗기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생선을 바로 잡은 것이었다면 더 확실했을 것 같은데. 일단을 할 수 없지. 마기를 최대한 이용해 보는 수밖에.’
그는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떼어내고 사악사악 살을 발라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루나는 한동안 조바심마저 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 그렇게 배워둔 거야?”
“원래 알고 있던 거야.”
정말 배운 기억이 없었다.
다만 원래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기분이다. 레온은 생선들을 전부 같은 방법으로 다듬기 시작했다. 썰어낸 생선은 크기도 모양도 똑같았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러지?’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잠자코 레온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쌀을 불린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레온이 커다란 냄비에 소금과 설탕, 식초를 넣고 약한 불에 올렸다.
그가 문득 루나를 돌아보았다.
“할 일 없지?”
“어? 응…….”
“그럼 이거나 좀 저어.”
레온이 주걱을 건넸다.
‘이거나 좀 저으라니. 저게 정말 누나 알기를 뭐로 보구.’
루나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군소리 없이 주걱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레온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괜히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냥 젓기만 하면 돼?”
“응. 설탕이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해. 그렇게 저으면서 소금이랑 설탕을 녹이도록 해.”
“아, 알았어.”
마르텐의 남자들이 이 모습을 보면 아마도 레온을 질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리라.
비록 루나가 식당에서 서빙을 하지만, 식당을 찾는 손님들조차도 그녀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물론, 그 양아치들만큼은 예외였지만. 그만큼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에 예쁜 얼굴이었다. 식당 일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레온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설탕을 젓고 있는 게다. 데이먼도 시킨 적이 없는 주방 일을.
그래도 루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묘한 기쁨마저 느꼈다.
레온은 생선을 썰면서 틈틈이 냄비를 확인했다.
“됐어. 다 녹았군. 온도도 적당해.”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비켜주면 돼.”
‘뭐야, 칫.’
루나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레온이 불린 쌀을 냄비에 넣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놓고 센 불에 팍팍 끓였다.
“여기 있다가 밥이 끓어오르면 불을 조금 약하게 만들고, 물이 거의 없어져서 자박해지면 더 불을 약하게 해서 일각 정도, 아니, 15분 정도 뚜껑 닫아놓고 뜸 좀 들여.”
루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설탕이랑 소금이 들어간 밥이라니. 게다가 식초도 넣었지?’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이런 방식은 중원에서 초밥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물론, 송조 때 중원에서 흥행했던 초밥들은 몽고인들의 원나라가 세워진 후 대부분 그 흔적이 사라졌다. 하지만 명조 시절에도 객잔에서는 간단하게 간을 맞춘 초밥이 제법 팔리고 있었다. 주먹초밥은 혈마존이 좋아하던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만드는 것은 보통 먹었던 주먹초밥과는 좀 다른, 약간의 응용을 해본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가게 문을 두드렸다.
“내가 나가볼게.”
레온이 홀로 나가자, 어제 보았던 제임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벌써 도착한 건가요?”
“아닐세. 앞으로 두 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거라고 말해두려고 왔네.”
두 시간 후. 충분하군.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주게.”
제임스가 돌아가고 나자 루나는 다시 조바심이 타올랐다.
“벌써 온다는 거야? 정말 큰일이네.”
“큰일은 무슨. 잘 준비하고 있잖아.”
“준비가 어디에 됐다고 그래? 생선과 밥뿐이잖아.”
“그거면 된 거야.”
“뭐?”
‘아, 도대체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루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마냥 태연하게 대꾸하는 레온을 야속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