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절호의 기회.
레온이 신전을 찾았을 때는 어쌔신 둘이 마당에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알, 룬.”
레온이 부르자 두 사람이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두 어쌔신의 신성명이 바로 알과 룬이었던 것이다. 누구든 원하기만 한다면 신전에서 신성명을 받을 수 있다.
두 사람이 어쌔신으로 지내고 있을 때는 이름 없이 그저 번호로만 불렸기에 레온은 신관에게 그들의 신성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신성명으로 불렀다.
알은 다소 흰 피부에 키가 컸고, 일전에 레온의 목을 내려치려고 했던 자였다. 그리고 룬은 조금 거뭇한 피부에 보통 키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자, 레온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또 싸우고 있었냐?”
“…….”
“너희들은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 같이 일했던 사이가 아니냐? 그런데 왜 자꾸 싸우는 거야?”
둘은 머리를 푹 숙였다.
알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룬이 자꾸 쓰레기를 제 쪽으로 넘겼습니다.”
“야! 내가 언제? 네 자리에 있던 쓰레기가 바람에 날려와서 다시 보내준 것뿐이야! 그것도 딱 한 번 그랬을 뿐이라고!”
룬이 발끈해서 맞받아쳤다.
사실 두 사람은 레온이 오기 전까지 신전 앞마당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알과 룬은 각자의 구역을 담당하기로 했는데, 바람이 불면서 쓰레기가 상대 구역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레온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유아 수준으로 돌아가니, 정신도 유아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서로 말다툼을 하던 알과 룬은 이내 손까지 섞기 시작했다.
“에잇!”
알이 먼저 룬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자 룬도 알의 볼을 꼬집었다.
두 어쌔신(?)은 그렇게 서로를 꼬집은 채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서로 협박했다.
“놔! 안 놓으면 죽는다.”
“너야말로 먼저 놓지? 살가죽을 벗겨 버리기 전에!”
알은 정말 볼 살이 뜯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십사 번! 너 자꾸 이러면 명령 불복이다! 이건 하극상이다!”
“웃기시네! 아직도 우리가 어쌔신이냐? 신성명까지 받은 주제에 무슨 명령이냐!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너랑 나랑 동급이야! 나이도 같잖아!”
사실 어쌔신으로 활약하던 시절, 알은 룬보다 몇 계급 위에 해당했다. 경력과 실력으로 철저하게 매겨진 순위였다. 때문에 룬은 알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다.
하지만 레온 때문에 그 모든 힘을 잃고 나서부터는 계급이 사실상 무의미했다.
게다가 앞으로 평생을 신전에서 일하며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과거의 계급에 연연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게다.
알과 룬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볼 살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닭똥 같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과거였다면 소드를 섞어서 승부를 결정지었을 그들이 지금은 서로의 볼 살에 자존심을 걸고 있는 게다.
따악!
레온이 두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결국 둘은 동시에 손을 놓고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야, 이놈들아. 자꾸 시시한 걸로 싸울래? 네놈들이 계집년이냐? 볼 꼬집고 싸우게?”
“하지만 알이 자꾸 저한테 일을 전부 시키려고 하니까…….”
“시끄럽다! 이십사 번!”
“너야말로 시끄러! 난 이십사 번이 아냐! 룬이다!”
“직업을 잃었다고 명예마저 잃었단 말이더냐!”
“명예가 밥 먹여주냐!”
두 사람이 다시 다투기 시작하자, 레온이 버럭 소리쳤다.
“둘 다 입 다물어!”
그의 고함 소리에 앞마당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레온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시간 후로 한 번만 더 싸운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라도 하면, 너희들 뼈를 갈아 마시겠다. 내가 정말 뼈를 갈아 마실지 궁금하면 어디 한번 싸워봐.”
두 어쌔신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라면 충분히 갈아 마실 놈이다.
레온이 룬을 불렀다.
“룬, 앞으로 알을 예전처럼 윗사람으로 대하도록 해. 어쨌든 알은 널 보살피던 대장이었잖아. 이제 와서 은혜를 저버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이건 내가 정한 서열이니까 확실히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알.”
“예.”
“앞으로 룬을 번호로 부르지 마라. 만약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너희들의 이야기는 신관님을 통해 내 귀로 전부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그리고 룬을 아껴주도록 하고. 서로 역할 분담은 확실히 하도록 해. 윗사람에 대한 존중은 절대 강요될 수 없는 거다. 존중이라는 것은 저절로 우러나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야. 너 스스로 존중받는 윗사람이 되도록 행동해.”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레온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레온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묘하게 이끌리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레온이 싱긋 웃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
“…뭔가요?”
“지금 룬이 여기서 막내지만, 곧 그 밑에 한 놈 더 들어올 거야.”
“한 명 더요? 혹시 그놈도 레온님 모가지를 따려고 했습니까?”
알이 궁금해서 물었지만, 곧 레온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보고는 실수를 깨달았다.
“그놈은 그럴 배짱도 없는 놈이지. 피라미 중의 피라미야.”
“그럼 그놈, 제 아래가 되는 거군요?”
룬이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그동안 알에게 여러 가지 심부름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래. 네 밑이지.”
“좋았어. 흐흐.”
“그리고 조만간 내가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
“떠난다니요?”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마르텐에서 떠날 수도 있어. 내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여길 벗어나지 마라. 벗어나봐야 너희들 목숨만 더 위태로워질 뿐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희소식 하나 더 말해줄까?”
“무엇입니까?”
“너희 몸은 다시 고칠 수 있다.”
“예에?”
알과 룬이 또 놀라서 소리쳤다.
몸을 고칠 수 있다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딜 어떻게 건드린 건지 두 사람은 정말 꼬마보다도 힘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신전에서 잔심부름만 거들어도 그날 밤 녹초가 되곤 했었다. 어쌔신으로서 범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운동신경과 감각을 가진 그들이었건만. 지금의 몸은 그야말로 저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이 몸을 고칠 수 있다니!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레온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레온이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몸, 나만 고칠 수 있어. 그러니 내가 없는 동안 어디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정 믿지 못하겠으면 가도 좋다. 내가 너희들을 굳이 붙잡을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얻는 게 무언가.
없다. 그렇다면 믿는다. 믿어서 희망이라도 가지는 게 낫다.
두 사람이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믿습니다. 당신을.”
“그럼 여기서 착실히 일하고 있도록 해. 내가 다시 이곳으로 오는 날, 너희들이 정말 개과천선했다면 몸을 고쳐주마.”
“최선을 다해서 착해지겠습니다!”
“좋아. 그런데 신관님은?”
“신관님은 안에 계십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냐, 됐어. 혼자 가지.”
레온은 감동에 젖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걸음을 옮겼다.
***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메이븐 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커피를 호로록 마시면서 레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레온은 메이븐 신관을 만나서 오늘 왕궁 요리사로부터 소개장을 받게 된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상담했다.
물론 처음에는 왕궁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주위에서 모두 가라고 부추기니 지금은 조금 갈등이 됐던 것이다.
메이븐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생각에도 다른 분들처럼 왕궁으로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어째서입니까?”
“사람은 넓은 곳을 보며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좁은 곳을 보면 생각도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지만, 넓은 곳을 보면 그만큼 생각도 넓어지지요.”
“하지만 저는 신관님을 매일 만나면서 성직자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촌구석에서 매일 저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몸소 체험해 보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며, 많은 체험을 몸소 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부가 된답니다.”
“왕궁으로 가도 계속해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에 대한 소개장을 써드리겠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지방 신관에 불과하지만, 제 소개장도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본좌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궁으로 가십시오. 가서 많은 것을 경험하십시오. 게 중에는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좋은 일도 있을 것이고, 살심이 일어날 만큼 좋지 않은 일도 겪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경험을 소화해 내십시오. 그리고 언제든 루카스 여신의 뜻을 되새겨 보십시오.”
레온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관님, 사실 한 가지 또 다른 고민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여신께서 당신과 고민을 함께하실 것입니다.”
“저는 착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착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한 연놈들을 보면… 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살심이 일어납니다. 죽여 버리고 싶단 말입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메이븐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미 당신은 착합니다. 요는 당신이 착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고, 당신의 단점을 지금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가요? 전 정말 훌륭한 걸까요? 정말 전 착한 걸까요?”
“당신은 훌륭하고, 또한 착합니다.”
레온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은 분명히 악한 것 같은데, 신관이 착하다고 하니 마냥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착하다는 것이 뭡니까? 신관님.”
“착하다는 것은 참되다는 것이고, 참되고 선한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제가 아름답다는 말씀입니까?”
메이븐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신관님. 한데도 왜 전 나쁜 생각만 계속하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할 땐 제가 별로 아름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메이븐은 잠시 레온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화단에서 성직자 한 명이 한쪽 팔을 잃은 장애아와 함께 놀고 있었다. 아이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는지 흉한 자국도 있었다.
“저 아이를 보면 어떻습니까?”
“불쌍하군요.”
“그럼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저 아이는 추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솔직히 추하게 보입니다. 정상이 아니니까요.”
“그럼 당신이 두 눈을 잃었다고 가정하고 잠시 눈을 감아봅시다. 그리고 방금 본 저 아이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만 들어봅시다. 어떤가요? 여전히 아이는 추합니까?”
“추하지… 않습니다.”
“왜인가요?”
“아이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는 해맑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처음의 그 추함은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눈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순간 레온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을 떴다.
눈앞의 메이븐 신관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제게 당신은 그저 상처받은 아이처럼 보일 뿐입니다. 당신의 본질은 착하고 아름답습니다.”
“아, 신관님. 존경하는 신관님. 본좌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야 신관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신관님, 그렇다면 저도, 이런 본좌도 대신관이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어떤 미래든 포기하지 않는 한 가능성이란 줄곧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인가요?”
“더없이 맑고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궁극에는 저 꽃처럼 말이지요.”
메이븐은 다시 화단의 꽃을 가리켰다.
“누군가 저 꽃을 꺾는다면 꺾일 것이고, 밟는다면 밟힐 테지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이 그저 한 자리에 피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 꽃을 보면 어떻습니까?”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꽃은 그저 스스로 아름답게 피어 있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전염시킵니다. 마음이 태풍처럼 사납던 자도 저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순화되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저 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꺾이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겠지요.”
“대신관은 바로 저 꽃과 같은 분이 되는 것이군요.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돕고,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줄 알며, 타인을 교화시키기고, 궁극에는 저 꽃처럼 스스로 아름답게 피는 것이군요.”
메이븐 신관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저 꽃과 같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한낱 꽃과 달리 사고를 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결단을 내리며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더불어 살아간다.
홀로 아름다워지고자 한다고 해서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위의 환경에 따라 그것은 지극히 어렵고도 험난한 일이다.
하나 그는 레온에게 이 정도만이라도 일러두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좀 더 간단하게 정리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렇습니다. 여신께서 바라시는 궁극적인 바는 신성력으로 치료 따위를 해주는 것도 아니요, 성기사로서 적을 무찌르는 것도 아닙니다. 좀 더 인간들이 선하고 참되게 살아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 역시 좀 더 저를 수양하고, 제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을 심어주도록 하겠습니다.”
“여신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봄 햇살 같은 빛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메이븐 신관은 부드럽게 웃으며 레온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양피지 두루마리에 레온에 대한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 소개장을 들고 간다면 왕궁에서도 계속해서 신전을 다니며 대신관을 향한 길을 걸을 수 있을 터였다.
메이븐과 이야기를 마친 레온은 꿈의 밥상으로 향했다.
그는 오늘 들은 이야기의 핵심을 계속 중얼거렸다.
“주변사람들에게 선심을 심어주는 것이라. 후후.”
메이븐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나 한 걸까?
레온의 표정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선심, 확실히 심어주지. 크크큭.”
아마도 그는 조금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