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스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었다.
절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너 같은 것이 절대 연주할 수 있을 리가 없어.
평민이라도 아주 부자들이나 가져볼 수 있는 악기였다.
한편 루나는 이젠 오히려 어떤 기대마저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레온이 이번에는 또 어떻게 놀라게 해줄까 하는 기대가 됐던 것이다. 물론, 그만큼 걱정도 앞서긴 했지만.
잠시 후 레온이 심호흡을 한 번 더했다.
사람들 모두 긴장하고 그를 보았다.
비이이-
레벡이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 선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실내에 가득 퍼져나갔다. 레벡으로부터 울려 퍼진 선율은 그들을 몽환 속으로 이끌어갔다.
그들은 마치 푸른 산꼭대기에서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노니는 새가 된 기분을 느꼈다.
청운무(靑雲霧).
이 역시 악수라가 작곡한 곡이었다.
악기를 쥐는 방법도, 활을 쥐는 방법도 모두 틀렸는데도 레온의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이번에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대로 그 여운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환상적인 음악이로군.”
“말이 필요 없소이다.”
사람들이 감탄했다.
세이스도 더 이상 레온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물었다.
“왜지?”
“뭐가 말입니까?”
“왜 연주법이 엉망인데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냔 말이다.”
“경께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악기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그게 이유라면 이유지요.”
레온이 싱긋 웃으며 악기를 건넸다.
세이스는 그저 충격받은 표정으로 악기를 받았다. 그는 다시 라니첼에게 악기를 건네주고는 레온의 뒤를 따라 자리로 돌아왔다.
루나가 감격한 듯 말했다.
“정말 다시 봤어, 너.”
“지금까지 어떻게 봤기에 이 정도로 본좌를 다시 보는 거냐?”
“지금까지는 그저 손이 많이 가는 동생 놈.”
“누가 할 소린데.”
“너!”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세이스는 자리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연주 경합을 벌이는 동안 음식은 이미 나와 있었다. 레온은 루나와 떠들며 허겁지겁 먹기 바빴는데도, 세이스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레온만 바라보았다.
루나가 세이스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는 넌지시 물었다.
“식사… 안 드시나요?”
“아, 생각이 없어졌소. 먼저 실례하겠소.”
세이스가 벌떡 일어나서 걸어갔다.
루나가 채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쿠쿠. 열 받아 죽겠지? 아, 난 왜 이럴 때마다 재미있는 걸까? 내 속에 악마가 있는 게 분명해.’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그가 앞에 놓인 와이번 꼬리 볶음을 보더니 포크를 가져갔다.
“이거 먹어도 되겠지?”
“안 먹는다니까 그렇겠지?”
“후후. 잘됐다.”
레온은 와이번 꼬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하지만 곧,
“으으. 맛없잖아. 왜 이런 걸 시켜먹는 거야? 저놈은?”
“쉿! 듣겠다!”
“들으면 어때?”
“그래도 귀족이잖아. 제발 조심 좀 해.”
“괜찮아. 네 말대로 정 안되면 글라니스한테 받은 소개장이라도 보여주지 뭐. 그 사람 말로는 왕궁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휴우. 널 누가 이기겠니.”
루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했다.
정말이지 레온은 번개를 맞고 나서 사람이 백팔십도로 변한 것 같았다.
8. 뜻밖의 추격자
레온과 루나는 세이스 덕분에 며칠째 편안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세이스로서는 로렌트 궁 여관에서 자존심이 한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온과 루나를 내팽개치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자칫 옹졸해 보일까 봐 의식한 것이기도 했고, 루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이동하는 동안만큼은 루나와 단 둘이 마차에 있을 수 있지 않나.
한편 며칠째 짐마차를 타고 가며 조식을 운행한 레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공이 증진됐다. 단지 기억을 잃고 몸이 바뀌었을 뿐 본능은 이미 극마의 경지를 넘어선 그였다.
그에게 있어서 한 시간은 범인의 하루와 같았고, 그에게 있어 하루는 범인의 1년과도 같았다.
꾸준히 달려온 마차는 이제 수도 아란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후우.”
레온이 길게 숨을 뿜어내며 두 눈을 떴다.
그는 망혼검을 들고 서서히 마기를 손에 집중시켜 보았다.
우우웅.
마기의 영향을 받은 망혼검이 미세하게 우는 소리를 흘렸다.
“아직까지 검기를 제대로 부릴 정도가 안 되는구나.”
레온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기분대로라면 검기는 물론, 검강도 가볍게 부릴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저 검에 공명을 일으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가 검을 내려놓았다.
대신 그는 옆에 두었던 나무 조각과 말총을 들었다. 그가 첫날부터 만들기 시작한 마두금이라는 악기였다. 악기는 제법 모양을 갖추고 있었는데, 나무에는 말가죽이 덧씌워졌고, 줄도 벌써 하나가 완성되었다.
본래 마두금은 현이 두 줄로 되어 있는 악기다. 하나는 수말의 말총 백서른 가닥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암말의 말총 백다섯 가닥으로 이어서 만든다. 이미 이어놓은 것은 수말의 말총이었다. 레온은 암말의 말총을 마저 잇고 있었다.
이것이 완성되면 활만 만들면 끝이었다. 활은 백마의 말총을 사용하는데, 지금까지 지나친 도시에서는 백마의 말총을 구하기가 특히 힘들었다. 때문에 활은 아란스에 도착하면 만들 생각이었다.
악기를 만드는 것은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가 묵묵히 악기를 만드는 가운데, 마차는 꾸준히 숲길을 달렸고, 태양은 서서히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
“이럇!”
사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말은 사내의 다급함을 읽기라도 했는지 무서운 속도로 숲을 헤집고 달렸다.
한데 말이 달리는 곳은 정상적으로 난 길이 아니었다. 수풀이 우거지고 나뭇가지가 어지러이 뒤엉킨, 그야말로 길이 아닌 숲속을 헤쳐 가며 내달리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자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가죽 갑옷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한데 복면의 한쪽이 길게 찢어져서 턱까지 거의 다 드러난 상태였다.
게다가 어깨와 허벅지는 상처로 길게 찢어져 있었는데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 메인 단검은 아뮬렛이 박혀 있었다. 필시 마법의 효능이 적용된 고급 단검인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사내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들이 시야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척에 다가왔다는 것을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끈질긴 놈들!”
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는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는, 너덜거리는 복면을 찢어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정체를 숨기는 것도 틀렸다. 오로지 살아남아서 목적한 곳까지 가야만했다.
쒜에엑! 쒜에엑!
파박! 타악!
연이어 날아온 화살이 그가 지나간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박혔다. 그럼에도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쒜엑! 쒜에엑!
어떤 것은 그의 옆을 지나쳤고, 어떤 것은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숲을 헤집으며 말을 모는 사내의 기술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이나마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말 엉덩이에 화살이라도 박히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빌어먹을! 오러 쓰레드까지!”
스쳐 지나가는 화살들은 모두 거뭇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추격자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화살에 오러를 입힐 정도의 고수인 것은 틀림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남자는 전방에 나타난 숲길을 보았다.
‘근처에 마을이라도 있다면!’
마을이 있다고 해서 추격자들이 추격을 멈출 리는 없다.
다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먼저 잡히고 말 게 분명했다.
그가 막 숲길로 뛰쳐나가려던 순간.
쒜에엑!
푸욱!
이히히힝!
말이 기겁을 하며 요동을 쳤다.
쿠당탕!
“크억!”
사내가 말과 함께 구르며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말에서 떨어진 사내는 말발굽에 치이면서 더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컥!”
말과 사람이 따로따로 굴러서 숲길까지 미끄러져 나갔다.
***
세이스 일행은 마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어차피 노숙을 작정하고 있었기에 서산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옆에 끼고서 여유롭게 마차를 몰고 있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변화를 제일 빨리 눈치챈 사람은 바로 짐마차를 몰던 마부 두 명이었다.
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전방의 동쪽 숲을 바라보았다.
한편 그 순간 레온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쿠당탕!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가고 있던 숲길에 말 한 마리가 넘어지며 숲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이어서 사람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튀어나왔다.
세이스가 탄 마차의 마부가 기겁을 하며 말을 세웠다.
“워어! 워!”
마차가 갑자기 멈추자 세이스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저어, 그, 그게!”
마부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짐마차를 몰던 두 마부가 어느새 달려왔고, 뒤이어 레온도 터벅터벅 걸어왔다. 세이스와 루나도 호기심에 끌려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을 본 순간,
“어머! 부상을 심하게 입었어요!”
루나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쓰러진 말은 뒷다리에 화살을 맞아서 버둥거렸고,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세이스는 루나를 의식해서 더욱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도와줘야겠군!”
하지만 짐마차 마부 중 한 명이 그를 가로막았다.
“위험합니다.”
그들은 어느새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뺨에 검상이 새겨진 자는 롱 소드를, 눈이 가늘어 간사한 인상을 풍기는 마부는 짤막한 메이스를 쥐고 있었다.
“발터?”
세이스가 짐짓 이맛살을 구기고 자신을 가로막은, 뺨에 검상이 있는 사내를 불렀다.
그러자 메이스를 든 사내가 발터를 거들었다.
“구린내가 납니다, 세이스 공.”
“네리스, 자네까지?”
세이스는 두 사람의 경고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짐마차의 마부 행세를 해왔지만, 사실 그들의 진짜 임무는 자신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리카드 백작가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가진 검사와 마법사였다. 그런 둘이 만류하자 세이스로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게다.
그때 뒤로 다가온 레온이 비웃듯 말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저 사람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자는 겁니까?”
레온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이스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레온을 거들었다. 물론, 거기에는 루나의 환심을 사고 싶다는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의 말이 맞네. 내 한 몸 안전을 생각해서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발터와 네리스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표정을 굳혔다.
세이스가 이렇게 말하는 이상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세이스가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무엇이 두렵냐는 듯. 하지만 그때,
쒜에엑! 타악!
“헉!”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세이스의 발아래 박혔다. 세이스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을 때, 발터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그를 데리고 옆으로 피했다.
동시에 네리스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실드!”
우우웅!
흰색 빛깔이 둥그렇게 빛나면서 반투명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쌌다.
쒜에엑! 쒜엑!
탕! 타탕!
연이어 쏟아진 화살은 그 둥근 기운에 부딪치며 튕겨나갔다.
한편 그 모습을 본 레온의 눈빛에는 이채가 서렸다.
‘호오. 새로운 종류의 호신강기(護身剛氣)인가?’
그의 눈에는 네리스가 펼친 실드가 다소 의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