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5세에 부모를 잃었다.
8세에 조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때부터 2년 동안 거지로 지냈다.
10세에 변검술사의 눈에 띄어 유랑단에 들어갔다. 단장인 변검술사의 수발을 들며 변검, 연극, 노래, 악기, 요리 등을 배웠다. 단장은 매일같이 지독하게 훈련을 시켰다.
23세에 연극 도중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단장은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렸다. 그날 밤, 독기를 품고 돈을 훔쳐 유랑단에서 도망 나왔다. 그 돈으로 작은 식당을 차렸다.
27세에 절친한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해 패가망신하고 아내마저 잃었다.
30세에 방황하던 중 우연히 은거기인을 만났다. 은거기인에게 변검술을 비롯한 다양한 재능을 인정받고 제자가 됐다. 그때부터 내공심법을 연마하고 변검술과 역용술의 조화를 이루어 변장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35세에 스승이 자객들로부터 살해당했다. 스승은 영약과 무공비서를 남겼다.
1년 후, 사악한 무공비서를 가졌다는 이유로 무림의 공적이 되어 쫒기기 시작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55세에 영약의 기운을 완전히 소화하고, 스승의 무공비서를 통달했다. 그때부터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자는 남김없이 죽였다.
60세에 혈마교(血魔敎)를 창설했다. 이제 무림의 누구도 그를 죽이려고 덤벼들지 못했다.
65세에 중원을 종횡무진하며 살풍(殺風)을 일으켰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복수인가.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여인과 아이마저도 잔인하게 도륙했다. 중원은 피로 얼룩졌고, 무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70세.
고된 삶이었다.
버림과 배신으로 얼룩진 인생. 숱한 죽을 위기 속에서 발악하듯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의 고비를 앞두고 있다.
“클클클, 이게 얼마만인가.”
그가 히죽 웃었다.
거뭇한 피부와 대조되는 새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났다. 허옇게 샌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백귀(白鬼), 광귀(狂鬼), 악귀(惡鬼), 살마(殺魔), 혈마(血魔)……. 등등등!
전부 그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무서운 호칭만이 그를 표현할 수 있다.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부족한 표현이리라.
그는 완전히 살인에 미쳐버린 괴물이니까.
당대 마교의 교주.
그를 부르는 숱한 호칭 중에 인(人)이라는 글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공식적인 별호는 혈마존(血魔尊).
스윽.
혈마존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은 때가 타서 그런지 거뭇하고, 검날은 이가 나가서 우둘투둘한 것이 영 볼품없었다. 손잡이에는 망혼(忘魂)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미타불. 인명은 제천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끔찍한 살상을 즐기는가. 내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네. 스스로 죄를 물어 뉘우침이 어떠한가? 그대가 참회하여 그 대가로 사악한 힘을 버린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는 않겠네.”
승복을 입은 대사가 합장하며 말했다.
소림의 방장, 현정(賢正) 대사다.
무림 고수들은 그를 두고 혈마존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성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만약 이 시대에 현정 대사가 없었더라면 무림은 마인의 시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흑(黑)과 백(白)의 거탑.
그 두 사람이 오늘 호북(湖北)의 융중산(隆中山), 암운루(暗雲嶁)에서 만났다. 한데 암운루에는 두 사람 외에도 네 사람이 더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놓고 기회를 엿보는 맹수들처럼 혈마존을 둘러싸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자들.
하나 사냥감으로 보기에는 혈마존의 기운이 그들 개개인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혈마존이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무당파의 문주 청위자(靑爲子), 화산파의 매화제일신검(梅花第一神劍)으로 불리는 우위건(遇威建), 당대 최고 세가로 꼽는 하북 팽가의 가주 팽양문(彭陽文), 마지막으로 개방의 방주 소취개(小醉丐)까지.
혈마존이 땅이 떨릴 정도로 웃어댔다.
“크하하하! 본좌보고 스스로 단전을 때려 부수라는 거야, 뭐야? 땡중이 대가리에 햇볕을 너무 쬐여서 실성했나보군.”
“대사께서 친히 기회를 주셨거늘 그대 스스로 발로 걷어차는구나!”
매화제일신검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팽양문이 목소리를 높였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대의를 위해 손을 쓸 수밖에!”
“결국 이 방법을 쓰는구려.”
마지막으로 말을 맺은 사람은 무당의 청위자였다.
그들이 스르르 움직였다.
현정 대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보법을 밟고 있었다.
능지처사진(陵遲處死陣).
한 번 잡은 상대를 절대 놓치지 않고 참살하고야 마는 진. 능지처사진에 당한 자는 일격에 죽지 않는다. 사지가 천천히 도검에 도려지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일격으로 죽이기에 힘든 궁극의 고수를 상대할 때만 펼치는 진이다.
사실 정도문파에서는 이 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 손속이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능지처사진은 상대에게 죽음보다는 고통을 주기 위한 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나 혈마존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의 빌어 처먹을 대의, 대의! 지겹지도 않나? 그 잘난 대의 때문에 본좌의 인생이 고달파!”
“아미타불. 장례는 치러줌세.”
“시건방진 소리 하고는!”
파핫!
혈마존이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의 거뭇한 검신에서 푸른 광채가 휘몰아치듯 솟아났다.
“합!”
쩌엉!
단 일합으로 태산이 송두리째 흔들릴 만큼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맞부딪친 현정과 혈마존이 동시에 튕겨나가며 바닥을 밟고 주룩 미끄러졌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명숙(名宿)들은 상황에 따라 신축성 있게 진을 유지하며 보법을 밟았다.
구르릉… 구릉……!
여섯 사람의 사투를 하늘도 지켜보는지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혈마존이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에워싼 다섯 명도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툭, 투둑, 쏴아아아-!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하앗!”
혈마존이 먼저 소리를 내지르면서 쏘아져 나갔다. 맞은편에서 현정 대사가 비를 뚫으며 부딪쳐왔다. 찰나, 사방의 명숙들도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쩌엉! 쩡! 쩌엉!
천지가 뒤흔들린다. 여섯 사람의 합이 어우러질 때마다 폭우는 폭풍으로 변한다. 가히 강호의 역사에 새겨질 만한 싸움이었다.
쿠르릉… 쿠르르릉! 쾅!
날씨도 더욱 사나워졌다.
바닥 군데군데 고였던 빗물은 서서히 붉은색을 머금어가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은 자는 여섯 사람 모두다.
과연 혈마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여섯 사람이 합공해서 그에게 상처를 입히면, 반드시 여섯 중 하나는 그보다 더한 상처를 입어야 했다.
얼마나 긴 시간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을까?
번쩍!
번개 한 줄기가 암운루 위에 수직으로 떨어졌다.
꽈앙!
쏟아져 내리던 비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웃!”
“크웃!”
명숙들이 튕기듯 몸을 물렸다.
쏴아아아-!
잠시 후, 비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원하게 쏟아졌다.
번개가 떨어진 자리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생겼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싸우던 혈마존.
그가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천지를 격동시켰던 그 혈마존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현정 대사와 명숙들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
쏴아아아……!
그저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만 텅 빈 자리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1. 뒤바뀐 운명.
“뭐? 아직도 레온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방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던 데이먼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는 얼른 주방 뒷문을 열었다.
쏴아아아-!
문을 열자마자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몰아쳤다.
번쩍! 우르릉, 꽈앙!
때마침 번개가 치고, 천둥까지 요란하게 울려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세상을 온통 물에 담가버릴 기세였다.
“이런……!”
데이먼은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브란이 걱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프리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마땅히 비를 피할 곳도 없을 텐데… 가지고 오던 소금이 젖기라도 하면…….”
“지금 소금이 문제인가!”
데이먼이 뒤를 홱 돌아보고는 버럭 소리쳤다.
브란은 사장의 기세에 억눌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큰일이군.’
데이먼은 턱을 매만지며 주방 한쪽을 연신 서성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마른하늘이었건만 이토록 비가 쏟아질 줄이야.
브란의 말대로 프리프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피한다고 해봐야 숲의 나무 아래가 고작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날, 그런 곳에서 비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가지러 갔던 소금은 모두 비에 젖어 녹아버렸다고 봐야 한다.
그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레온이다.
레온은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아이였다.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아이다. 한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니!
아무리 비가 퍼붓고 있다고 한들, 레온이라면 다 녹아버린 소금 포대자루라도 가지고 와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브란!”
“예, 사장님.”
브란이 얼른 데이먼 가까이 다가와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레온을 찾아보도록 하지.”
“예,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레온은 제게 맡겨 주시고…….”
“아닐세! 나도 같이 찾아보겠네. 레온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어. 필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게야. 가봐야겠어.”
“하지만 그럼 내일 단체 예약 손님들에게 나갈 음식은 어떻게…….”
데이먼은 우의를 챙겨 입으면서 브란의 말을 가로질렀다.
“어차피 소금이 없으면 음식도 틀렸어. 사람을 보내서 내일 예약은 불가피 준비되지 못했다고 양해를 구하도록 하게나. 손해 배상 문제는 상세히 받아 적어 오도록 하고.”
말을 마친 데이먼은 브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뒷문을 열고 나갔다.
***
쏴아아아-!
굵은 빗방울이 숲속 곳곳에 떨어지며 대지를 차갑게 적셨다. 어찌나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지 지면에 튕겨지는 물방울들은 희뿌연 안개마저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달아오른 대지가 차가운 빗물에 열을 뿜어내며 식어가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 숲 한쪽에 유난히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이 안개가 아니라 연기라는 것도 금방 알아챌 수 있으리라.
연기가 안개에 뒤엉키며 풀풀 피어오르는 그곳.
한 청년이 너덜너덜한 옷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여린 체구의 청년은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면서 조금씩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크으……!”
이윽고 청년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떴다.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눌러 참으며 가까스로 윗몸을 일으켰다.
“빌어 처먹을. 어떻게 된 거야?”
곱상한 청년의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구기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숲 한쪽에 수레가 옆으로 넘어져 있고, 포대자루가 질척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는 망혼(亡魂)이라고 적힌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글자를 읽어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검을 쥐었다.
“크음. 여기… 어디지?”
나무를 짚고 비틀비틀 일어난 그는 쓰러진 수레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때려죽일 놈의 땡중도 보이지 않고.”
그는 이번에도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막말을 뱉으며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데도 목이 탔다.
청년은 마실 물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걸어 가다보니 움푹 파인 바닥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웅덩이 앞에 엎드려 허겁지겁 빗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찰나,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외모를 보고 기겁했다.
“어헉!”
청년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유약한 몸.
‘내가… 아니다!’
“이건… 나… 혈마존이 아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는 격심한 두통에 비틀거리다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마지막으로 현정 대사와 명숙들의 합공을 물리쳤을 때, 벼락을 맞았다. 그런데 그 후, 영혼은 엉뚱한 청년의 몸에 들어와 버렸고, 몸뚱이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아니면 외모가 완전히 변해 버린 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혹시 그 빌어먹을 땡중의 술수인가! 아니면 벼락 때문에 뭔가 초자연적으로 뒤틀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황이 빌어먹게 됐다.
“이런, 니미럴!”
분에 복받쳐 고함을 내지르던 혈마존은 순간 전신을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는 격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커헉! 쿨럭! 쿨럭!”
피까지 한 움큼 토해 버린 혈마존은 나무기둥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쳐죽일 놈의 땡중… 만나면… 가만두지…….’
가물가물해져가는 의식 저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저기 레온이 있어!”
“레온! 정신 차려! 레온…….”
하지만 혈마존의 눈은 이미 허옇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레온이라니… 이 청년의 이름이었나? 본좌는 레온이 아니라 혈마존이야.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언어인데… 여긴 남만인가? 아님, 서역……?’
결국 혈마존은 그 생각을 끝으로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과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이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다.
물론, 의문을 품었다고 한들 초자연적으로 뒤틀린 이 괴현상에 대해 이해할 리도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