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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레온
작가 : 눈매
작품등록일 : 20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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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
작성일 : 16-07-07     조회 : 445     추천 : 0     분량 : 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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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으음. 으으음.”

 혈마존은 악몽에 시달렸다.

 대머리 독수리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대머리 독수리는 날갯짓을 한 번 할 때마다 ‘아미타불’을 외쳐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내리쳤다.

 혈마존은 대머리 독수리와 벼락을 피해서 계속 내달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독수리쯤은 천멸살검(天滅殺劍) 일로(一路)만 휘둘러도 끝내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지금의 혈마존은 어찌 된 건지 불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아이였다. 그에게는 천멸살검 따위를 시전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결국 혈마존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리치는 벼락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꽈앙!

 “끄아아악!”

 혈마존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억. 허억.”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뭔가…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했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담요도, 덮고 있던 이불도 땀에 젖어 눅눅했다.

 ‘무슨 꿈이었지?’

 막상 악몽에서 깨고 나니 꿈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이도 갈았는지 턱과 이가 얼얼했다.

 “레온!”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사내가 달려 들어왔다. 누런 턱수염이 보기 좋게 번져서 편안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그는 걱정과 반가움이 뒤섞여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레온이라니… 누구…….’

 혈마존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중년인을 마주 보았다. 중년 남자는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레온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이제 정신이 들었니?”

 사내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필시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혈마존은 호흡을 고른 후 기력이 쇄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잘못 보았군. 본좌는… 레온이 아니다.”

 “레온?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본좌라니? 무슨 말이냐? 네가 레온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구나.”

 중년의 사내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혈마존을 눕히려고 부축했다.

 하지만 혈마존은 그의 손을 탁 뿌리쳤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년인에게 차갑게 일렀다.

 “본좌는 레온이 아니라… 본좌는… 본좌는…….”

 순간 혈마존은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혈마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린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따스한 바람. 하늘거리는 커튼. 조금 작지만 아담한 크기의 방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 포근했다.

 한데 이 모든 광경이 생소했다.

 방을 찬찬히 둘러본 혈마존은 마지막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 역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온을 마주 보고 있었다.

 “본좌는… 누구지?”

 “레온, 설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냐? 이거 큰일이구나! 계속 이상한 말만 하고.”

 그러고 보니 이 중년인이 하는 말도 뭔가 생소했다. 어쩐지 꿈속처럼 다른 세계에서나 사용하는 말처럼 들렸다. 한데 의미는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혈마존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어지럽기만 할 뿐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중년인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브란! 브란!”

 잠시 후 계단을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삼십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역시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아! 레온, 일어났구나!”

 그 역시 혈마존을 보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하지만 곧 이어진 중년인의 목소리에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가서 헤일즈 선생님을 모셔오게! 아무래도 레온이 이상하네. 나도 못 알아보고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것 같네!”

 “그, 그런! 당장 모시고 오겠습니다!”

 브란이 헐레벌떡 방을 나가고 나서, 중년인은 측은한 표정으로 혈마존을 바라보았다.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 네가 열 살 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일하지 않았느냐? 나는 아직도 그때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단다. 넌 처음 보는 내게 또렷또렷한 표정으로 말했었지. 일찍이 부모를 잃어 너를 보증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믿고 일만 시켜만 준다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돈도 필요 없고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이야. 나는 아직도 그때 너의 딱 부러진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게 벌써 정확히 10년 전이구나.”

 혈마존은 멍한 표정으로 중년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 남자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이곳에서 10년을 일했고, 나이는 이제 스무 살이 되었다는 말이다.

 한데 10년을 함께 생활한 이 남자도 생소했고, 자신의 나이마저도 생소한 지경이니, 그런 세세한 것이 기억날 리가 없었다.

 ‘내가 고아였다고? 그리고 스무 살. 이곳에서 일한 지 10년?’

 혈마존은 자신을 가리키는 여러 단서들을 두고 머리를 쥐어짰다.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를!’

 

 ***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자신을 헤일즈라고 소개했다. 그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나이에 비해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호남형이었다.

 헤일즈 역시 혈마존에게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고 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역시 혈마존과 상당히 각별한 사이였고, 자주 대화를 나누던 사이좋은 관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혈마존의 기억에 헤일즈와 관련된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헤일즈는 혈마존과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질문을 해댔다.

 “네 이름이 무엇이니?”

 “본좌는… 본좌는… 기억이 안 난다.”

 “흐음. 아까부터 본좌, 본좌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니?”

 “본좌는 나다.”

 “그럼 네 이름이 본좌라는 것이니? 자, 그럼 본좌야, 네 성은 무엇이니?”

 “멍청한!”

 혈마존이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그가 산짐승도 잡아먹을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헤일즈를 노려보았다. 전신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데 옆에서 더 답답한 소리를 해대니 본의 아니게 그의 천성이 드러나 버린 게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것은 헤일즈뿐만 아니었다. 곁에 있던 데이먼도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데이먼이 얼른 다가가 그를 달랬다.

 “레온,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란다. 지금은 조금 답답하겠지만 차분히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떻겠니?”

 그제야 혈마존도 스르르 눈에 힘을 풀고 살심을 누그러뜨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도 애써 주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살심을 품었다는 것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모두 나를 위해 애써주고 있지 않나.’

 인간의 천성은 본래 선한 것인가. 아니면 혈마존의 천성이 본래 선했던 것인가.

 중원을 호령하던 시절, 여인과 갓난아이에게마저도 살육을 강행했던 그가 지금은 순간적인 자신의 분노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도 그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혈마존이 진정이 되자, 헤일즈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네 이름은 레온이란다.”

 “레… 온.”

 “그래, 그게 너의 이름이란다. 너는 벼락을 맞고 일주일 째 의식을 잃고 있었단다. 어찌 보면 너는 신의 축복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구나.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이니까 말이다.”

 ‘지랄하네. 벼락 맞은 게 신의 축복이란 말이냐!’

 혈마존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왜 이렇게 성질이 못돼먹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어떤 놈이었기에 이 따위로 꼬여 있는 거지?’

 문득 혈마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고개를 든 것일 뿐인데, 그 눈매가 워낙 매서웠기에 헤일즈와 데이먼은 헛바람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왜, 왜 그러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마, 말해보렴.”

 처음부터 꼬박꼬박 반말만 내뱉으니, 헤일즈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본좌는 기억을 잃기 전, 어떤 새끼… 아니, 어떤 놈이었지?”

 “너는 총명하고 착한 아이였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였단다. 데이먼은 너를 친아들처럼 여겼고, 너 또한 데이먼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단다.”

 “흐음. 나쁘지 않군.”

 “하하, 혹시 번개를 맞았던 그날, 기억나는 건 없느냐? 굳이 그날이 아니라도 좋다. 과거의 기억이면 어떤 거라도.”

 혈마존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짓장처럼 하얗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없다.”

 “그날 너는 이웃 도시 프리프에 가서 소금을 받아오는 길이었지. 그리고 오는 도중 번개를 맞은 거야. 프리프가 해변 도시라는 건 알고 있지?”

 “모른다.”

 “음?”

 헤일즈는 눈썹을 찌푸리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 부분은 조금 이상했다.

 보통 기억을 상실한 환자의 경우, 자신의 경험에 한해서 기억을 잃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환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 외의 다양한 지식들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한데, 지금 레온의 증세를 보면 뭔가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왜인지 알아야 할 것과 몰라야 할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본좌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이 식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거들어주고 있었단다.”

 헤일즈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본좌가 그딴 일을……!”

 혈마존이 다시 불같이 화를 내려다가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헤일즈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이들에게 많은 은혜를 받은 몸이지 않나.

 이들의 표정이나 행동, 말투를 봐서 거짓말을 할 사기꾼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꼬박꼬박 이들을 향해 반말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미, 미안… 합니다.”

 의외로 차분해진 반응에 헤일즈와 데이먼은 또 한 번 놀랐다.

 이번에는 그래도 좋은 변화였다. 어쩌면 조금씩 레온의 본 성격이 돌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헤일즈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괜찮네. 아무래도 이제 막 의식을 되찾은 네게 너무 무리한 기대를 한 것 같구나. 아, 마지막으로 이 거울을 한 번 보겠니?”

 헤일즈는 어른 몸통만한 거울을 내밀었다.

 혈마존은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병약한 몸이 거울 속에 비쳤다. 번개를 맞아서 더 그렇겠지만, 본래부터 허약한 체질인 듯했다.

 헤일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게 너란다. 너는 이렇게 살아 있단다. 그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이지 않겠니? 힘을 내고 곧 건강을 되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울 속의 본좌의 모습은 어쩐지 본좌 같지가 않소. 생소하기만 하군요.”

 혈마존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란다. 기억이 없으면 어떻겠니? 이제부터 너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 말을 끝으로 헤일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을 붙들고 너무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주면 도리어 병세가 악화될 수 있었다.

 “그럼 푹 쉬거라.”

 데이먼은 혈마존을 자리에 눕히고는 헤일즈와 함께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간 후, 혈마존은 누운 채 이마를 짚었다.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땀이 흥건했다.

 사실 헤일즈와 대화를 나눌 때는 짜증이 치밀어 상대를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도대체 난 어떻게 되어먹은 놈이기에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혈마존은 치를 떨며 이불을 덮어썼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에게 극진히 잘해주고 있다. 일주일 동안 자신이 건강을 되찾도록 간호를 해주었으며, 깨어나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기뻐했다.

 그런 저들이 자신을 가리켜 ‘레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레온이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의하면 레온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레온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래, 과거 따위야 아무렴 어떤가.

 저렇게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면 과거는 보듬어 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내일을 보고 걸으면 될 터.

 모든 것이 생소하지만 이게 모두 번개를 맞아서 몸이 아프기 때문일 게다.

 혈마존 아니,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은 레온이 아니라 과거 중원을 종횡무진하며 악행을 일삼던 혈마존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내뱉어대는 거친 표현들이나, 불같은 성격들은 기억을 잃기 전 본래 자신의 성격이었다는 것을.

 또한 그가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천만다행히도 원래 육체의 주인인 영혼과 운명적으로 뒤바뀌는 과정에서 인식된 긍정적인 부작용이라는 것도.

 어쨌거나 이 계기로 인해 혈마존은 레온이라는 이름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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