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습니까? 선생님.”
레온의 방을 나온 데이먼이 초조한 표정으로 헤일즈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기억상실증인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증이요? 그럼 영영 기억을 되돌릴 수 없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장담하기 힘들군요. 하지만 환자들 중에는 어떤 계기로 인해 기억이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다만?”
“레온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조금 낮아 보이는군요.”
“허어… 그런 일이.”
“하지만 너무 맘 아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레온에게도 기억을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명심하지요. 참, 레온의 성격이 저리 된 건…….”
“흐음. 그 문제는 저도 의외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성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헤일즈는 잠시 말을 끊고 안경을 올려 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다른 증상으로 보이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원인이라도 있습니까?”
“정확한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만, 학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번개를 맞고 죽다 살아난 사람은 어딘지 다른 사람처럼 성격이나 행동이 변한다고 합니다. 인성이 변하는 것이죠.”
“정말 그렇군요. 저는 오늘 레온을 보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온에게는 여느 때처럼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자를 위해서도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 기억하겠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불러주십시오.”
헤일즈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내려가고 나자 레온의 방 맞은편에서 문이 빼죽 열렸다. 문 틈새로 단아한 외모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 레온은 좀 어때요?”
“아무래도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겠구나.”
데이먼은 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설마 그 녀석, 저도 기억 못하는 걸까요?”
“음. 레온에게도 조금 시간을 주자꾸나. 혹 기억 못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좋은 기억을 심어주면 되지 않겠니?”
“쳇, 누가 약골 아니랄까봐.”
루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데이먼은 루나가 누구보다도 레온을 챙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녀는 레온보다 한 살 많았는데, 항상 몸이 약한 레온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레온이 혼자 소금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번개를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약간의 자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던 게다.
“그러지 말고 걱정되면 한 번 들어가 보지 그러니?”
“그 녀석 기억도 못한다면서요? 괜히 낯선 사람들 들락날락해서 스트레스 주는 것보단 천천히 보는 게 좋겠어요.”
“허허허, 우리 딸 다 컸군.”
“아빠!”
결국 루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
사흘 후부터 레온은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약한 몸에 번개를 맞았던 만큼 거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철추를 매단 것처럼 힘에 부쳤다.
사흘이 지나는 동안 레온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 어떤 사람과 함께 사는지 확실히 교육(?)받았다.
데이먼은 ‘꿈의 밥상’이라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카운터를 맡아보는 종업원은 브란이라는 자였는데, 그 역시 레온처럼 식당 2층에 거주하며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후우. 착잡하군.”
레온은 옥상난간에 걸터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옥상에서 보이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르텐이라는 작은 도시였는데, 식당은 비교적 도시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떠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브란이 올라와 레온을 향해 물었다.
레온은 브란을 돌아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좀 복잡한 심경입니다.”
그는 차분히 대꾸했다.
요 사흘 간 요양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 레온이었다.
“그런 큰일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브란은 레온의 곁에 다가와 검 한 자루를 불쑥 내밀었다.
“받아라. 네가 의식을 잃으면서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던 거다. 어디서 이런 골동품을 주웠지?”
레온은 거뭇한 때가 묻고 이가 나가서 우둘투둘한 검날을 보았다. 오래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번개를 맞았기 때문인지 검날은 도중에 부러져서 조금 길이가 짧았다.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그가 본 어떤 것보다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물건이었다.
레온은 자연스레 그 검을 받아들고는 손잡이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망혼…….”
“응? 너 이 글씨 읽을 수 있는 거야?”
레온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레온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거참 희한한 일이네. 이건 마치 고대어처럼 복잡한 문양인데. 언제 역사 공부를 한 적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글자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거참, 별일이군.”
레온은 볼품없는 검이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마르텐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이렇게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따악!
누군가 레온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순간 억누르고 억눌렀던 레온의 불같은 성격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감히 본좌의 뒤통수를 치다니! 웬 놈이냐!”
격분한 레온이 몸을 홱 돌렸다. 한데 그 순간, 레온은 돌이라도 씹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금발 머릿결이 차랑차랑한 여인. 이슬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에 매끈하고 오똑한 코, 앙다문 입술은 다부져 보였고,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굴곡 있는 성숙한 몸매가 얼핏 엿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허름하고 후줄근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흙속의 진주처럼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레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레온은 그녀의 한 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약골, 몸은 괜찮니?”
“웬… 년이냐?”
레온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말을 뱉고 나서 즉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이렇게 예쁘고 착하게 생긴 여자에게 웬 년이라니!’
당황한 것은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레온을 바라보다가 버럭 소리쳤다.
“너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이크크! 참아, 루나야. 레온은 지금 정상이 아니잖아.”
브란이 얼른 나서서 루나를 말렸다.
하지만 루나는 쉽게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더욱 열을 올리며 레온에게 화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흠. 이 년… 아니, 이 여자가 내 누나였나?’
레온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눈살을 구겼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어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까스로 루나를 진정시킨 브란이 레온에게 설명해 주었다.
“루나는 사장님의 딸이야. 널 친동생처럼 아껴줬는데 역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음. 그럼 친누나는 아니란 말이군.”
레온이 중얼거리자, 루나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말했다.
“친누나가 아니라서 정말 미안하구나.”
“아… 그런 뜻은 아니었다. 미안하군.”
레온은 싱긋 웃으며 사과했다.
레온이 의식을 찾고 나서 처음 짓는 미소였기 때문일까? 그의 미소를 본 두 사람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마치 마약이라도 들이킨 것처럼 몽롱한 의식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사실 레온이 지은 표정은 마소(魔笑)의 일종이었다. 중원에서 사내들이 주로 여인을 홀릴 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정신을 사로잡아 의지를 뺏는 고약한 술법이기에 마공으로 분류됐다.
레온은 지금 미약하지만 무의식중에 마소를 지어버린 것이었다.
2. 새로운 생활의 시작.
레온이 의식을 찾고 나서 한 달 뒤.
그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번개에 맞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쾌유였다. 그의 주치의였던 헤일즈조차도 믿기 힘든 놀라운 결과라고 감탄했다.
레온은 한 달 동안 자신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루나를 통해 이런저런 지식들을 습득했다.
대부분 역사와 정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한낱 식당 주인의 딸답지 않게 굉장히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한편 헤일즈는 경험과 상식 등에 관한 레온의 기억체계가 묘하게 꼬여 있는 현상에 대해서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시간이 흐르고 레온은 자신이 번개에 맞던 날, 정말 중요한 심부름을 하던 중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로 그 다음날 꿈의 밥상은 이례적으로 많은 단체 예약 손님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소금이 부족해서 레온은 이웃도시까지 가서 소금을 얻어 와야 했다. 한데 소금은 오는 길에 비에 젖어 모두 녹아버렸고, 레온은 번개를 맞고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꿈의 밥상은 여간 손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레온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약값과 진료비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레온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답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같은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레온은 몸이 완쾌된 날부터 부지런히 식당 일을 도왔다.
꿈의 밥상은 작은 식당이었지만, 제법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일손이 항상 부족한 실정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식당 주인인 데이먼과 그를 보조하는 조리사가 두 명이었다.
루나는 주로 카운터를 맡아보았고, 브란과 레온은 홀서빙을 담당했다.
처음 레온은 접시를 옮기다가도 여러 차례 깨뜨리고, 손님의 몸에 물을 엎지르는 등 실수가 잦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일에 요령이 생겼고, 나중에는 브란보다도 능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손님이 어쩌다 실수로 식기구라도 떨어뜨리면 레온은 냉큼 달려가서,
“본좌가 새 걸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라며 식기구를 교환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레온의 말투가 재미있다면서 오히려 그를 더 좋아했다.
“레온은 번개 맞고 더 건강해진 것 같단 말이야.”
브란이 레온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곁을 지나던 루나가 싱긋 웃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야. 저 녀석 보름 전부터는 매일 옥상에 올라가서 운동까지 하더라고.”
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접시를 날랐다.
브란도 매일같이 고된 하루를 끝내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됐다. 침대에 몸을 눕히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고, 아침 해가 뜨면 잠을 깨는데도 한참 뜸을 들여야 했다.
한데 레온은 어떻게 된 건지 병석에 있을 때도 새벽 다섯 시만 되면 깨어나서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무슨 운동을 하는지 다시 내려올 때는 전신이 땀에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확실히 레온은 눈에 띄게 건강을 되찾았고, 지금은 브란의 말대로 예전보다도 훨씬 건강한 모습이었다.
루나는 카운터로 걸어가서 활기차게 일하고 있는 레온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말 큰일이 있었지만 저렇게 건강을 되찾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훈훈했다.
“이대로 그 녀석들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언제 다가왔는지 주방에서 잠깐 나온 데이먼이 루나 곁에서 레온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루나의 표정도 짐짓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 나쁜 놈들…….”
루나는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나타나서 사고를 치는 두 녀석. 그 녀석들은 도시에서도 유명했다. 재벌인 부모만 믿고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면서 온갖 횡포를 일삼는 양아치들이었다.
좀 심하다 싶은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도시에서는 누구도 선뜻 그들을 고발할 수 없었다.
예전에 랄프라는 상인이 그 두 녀석들을 고발했다가, 금전에 매수된 병사들이 오히려 랄프에게 영업 정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그 후로 두 녀석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온갖 행패를 일삼았고, 상인들은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죽을 맛이었다.
그 녀석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앞장서서 제제한 사람은 바로 레온이었다.
놈들에게 레온은 그저 심심풀이 장난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늘 레온은 그 두 녀석들에게 얻어터졌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밤새도록 끙끙 앓아 누워있어야 했다. 다음날 일을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때문에 의사인 헤일즈와 레온은 서로 보는 일이 잦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해진 것이다.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레온을 지켜줄 거예요.”
루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