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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스16121 M줄 11피노 42-2.3, 베르콘힐 행성 분석기지◀
*수신자 : 질리 타르스트두 위브
*발신자 : 조이 모트마조르 진
질리. 예전에 박물관에서 봤던 영구선들 기억나? 크기랑 색깔별로 전시되어 있던 거 말이야. 마누스 항성처럼 번쩍이는 선체에 감탄하기만 하던 나한테 네가 그랬잖아. 저 함선이 운행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한다고. 몇 인승이랬더라… 4만 5천이었나, 5만이었나. 애초에 항성 간 전쟁으로 개발된 선박이었으니까 나도 그땐 전쟁 수습에나 다시 쓰겠지 싶었어. 아니면 그만큼 많은 인원을 실을 영구선이 왜 필요하겠어. 마지막으로 사용된 게 마누스12067 때였던가?
정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은하계의 그 누구도 상상 못 했을 거야.
아마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기지 안도 42-2.6부터 항성 간 영구선 사고로 떠들썩해. 중형 영구선인 줄 알았는데 초대형 영구선이었어. 하긴 중형 영구선 정도의 사고를 마누스 항성계 표준 중앙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크게 다룰 리가 없겠지. 다들 시페린 공영 방송국에서 찍은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어. 다 같이 멀티 룸에 모여 방송을 보고 있는 중인데…
―사고가 난 초대형 영구선 스테이크롬360의 모습입니다. 현재 영구선은 제 3시페린 행성 근처에서 소행성과 충돌하여 반으로 갈라진 채 남은 충격 여파로 인해 느린 속도로 자가 회전 중입니다. 스테이크롬360은 칼츠 행성에 위치한 시페린령 군사 위성 페림6의 연구소 기지 폭발 사고로 인한 사망자들을 싣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유례없는 이번 초대형 영구선 사고는 소행성의 궤도 측정 오류로 보고 정확한 원인을 분석 중에 있으며, 한편에선 원격 조종 시스템에 대한 논란 또한 다시 불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망자들 중에는 제 1, 제 4시페린 행성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제 3시페린의 통치자 락사므는 제 1시페린 통치자 게르흐, 제 4시페린 통치자 셍엘과의 빠른 협력을 통해 무중력 공간을 떠돌고 있는 시신들을 빛의 소멸 전에 수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시신들이 행성 궤도 밖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데다가 수만 구의 시신을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결정된 바가 없어 시페린 행성 연방 전체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만약 시페린의 관습에 따라 빛의 소멸 전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폭발 사고가 일어난 페림6에 가장 근접해 있는 칼츠 행성의 지도자 멀과 핀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낸 위성 연구소의 처리에 대해 제 2시페린 통치자 라우노어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선적으로 사고 범위 밖의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입니다.
잇따른 사고로 시페린 연방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페림6과 스테이크롬360의 사고에 대해 마누스 항성 연합 총장 엘 존은 큰 유감을 표하며 사고 긴급 대책 본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번 사고는 페림6에 위치한 화학 연구소 기지가 폭발하면서 대기와 결합해 생긴 독극성 물질이 위성 반을 뒤덮어…―
…방금 멀티 룸에서 나왔어.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한참을 보고 있었지 뭐야. 사실 중간 식사를 다 끝냈기도 했는데… 연구소 사고 현장이 너무 끔찍한 데다가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해서 더 있기 힘들었어.
생물 연구부 연구원인 쳄벨의 친구 중에 위성 페림6로 파견된 군인이 있었나봐. 아직도 생사를 모를뿐더러 현장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어. 아직 3피노는 더 기다려야 바에마 위성 관제소에서 메시지를 받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이 쳄벨도 제노아처럼 난동을 부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해.
베르콘힐 행성은 너무 외딴곳이라 중앙 방송과 몇몇 채널 외에는 모든 정보들이 상상 이상으로 느리게 전달돼. 위성 페림6의 사망자가 터무니없이 많아서 정확한 명단을 입수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항성 간 전쟁이 일어난 지도 한참 지났으니 아무도 수만 명이나 되는 사망자 명단을 만들 일이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그런 와중에 영구선 사고까지 났으니 시신 수습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정확한 집계나 가능할지….
영구선 주변으로 흩어진 시페린 행성인들의 시체가 마누스 항성만큼이나 밝게 빛나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빛의 발현 절정기처럼 보였어. 느리게 돌고 있는 영구선 주변을 둘러싼 수천 구의 죽은 시페린 행성인들로부터 뻗어 나온 빛이 멀리서 봤을 땐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항성 같았어. 굉장히 아름다우면서도 한없이 슬펐지. 만약 마누스 항성에서 태어난 종족이 있다면 분명 시페린 행성인일 거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어. 과연 빛의 소멸 전에 장례를 치를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들어.
문득 타행성의 삶과 문화 시간에 배웠던 시페린 행성의 장례 관습이 생각나. 그들은 죽은 순간부터 서서히 온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고 빛의 발현 절정기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제일 좋다고 쓰여 있었어. 그리고 빛이 소멸하기 전에 장례를 마치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고 믿는 관습이 있다 했지. 사후세계가 없다고 믿는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지만 저들에겐 죽음과 탄생이 하나의 순환 체계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여전히 놀라워.
그럼 빛의 소멸 때 장례를 치르지 못한 시페린 행성인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런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본 적 없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항성계에서 태어날지도 모르지. 혹시 내 상상처럼 그들이 마누스 항성에서 태어났다면 다시 마누스 항성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소멸한 시페린 행성인들의 빛이 모이고 모여 마누스 항성은 끝없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거지.
만일 제때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면 시페린 행성 내에서 분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사망자 수 만 명의 가족들부터 거리로 밀려나와 시위를 벌이겠지. 그렇게 되면 시페린 행성의 통치 체계가 뿌리 채 흔들릴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마누스 항성계의 경제가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사건이 될지도 모르지. 시페린 행성에선 죽은 자들의 힘이 그만큼이나 강력하다고 들었어. 이미 죽은 자들이지만 시페린 행성인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영구선이 아니라 일반 선박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시끄러운 것 같아.
반면 이곳 베르콘힐 행성은 시페린 행성과는 한참 떨어져 있어서 아주 평화로워. 멀티 룸의 애도 분위기를 제외하면 그런 일이 일어났나 싶을 정도야.
…
잠깐 영구선에 타고 있는 상상을 해봤어. 내가 베르콘힐 행성에서 죽는다면 아마 영구선에 태워져 돌아가겠지. 박물관의 영구선 행렬 제일 앞에 놓여있던 은색 일반 영구선일 거야. 분명 나는 내 몸뚱어리가 어디에 실려 어느 궤도를 향해 가고 있는지 결코 인식할 수 없겠지. 죽는다는 건 이상해.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오히려 주변에서 더 야단법석이잖아? 가끔은 죽음 앞에서 누가 더 슬픈 건지 모르겠어.
틀림없이 우주를 떠다니고 있는 죽은 시페린 행성인들도 자기들이 그런 사고가 난 것조차 모를 거야. 죽은 후에도 모든 걸 느끼고 있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것 같아. 내가 만약 그런 식으로 우주 유영 중인 내 시체를 본다면 적어도 슬프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솔직히 어떤 느낌일지 짐작이 안 돼.
어쩌면 블볼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 같지 않을까. 네가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불평했잖아. 무미를 무감으로 옮겨 생각하면 진짜 말 그대로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는 거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고 있는 거야.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사귀 하나를 따라 그저 흘러가는 거지. 그러다 사라지는 거야.
죽음이란 당사자에겐 그런 게 아닐까? 죽어보지 않아서 어떠할 진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