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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YYY MM 5D 00:00:00, 위치 확인 불가◀
*수신자 : 질리 타르스트두 위브
*발신자 : 조이 모트마조르 진
질리, 꽤 오랜 시간 동안 엉망인 기지를 정리했어. 우선 연구실마다 돌아다니며 무너진 벽면의 일부나 탁자, 캐비닛, 대형기기 같이 무거운 것 위주로 치웠어. 쓸 만 한 물건이 없나 살펴보면서 말이야. 하지만 사고 당시에 대부분 파손되어서인지 멀쩡한 게 그리 많지 않아. 하긴 기지의 우측 컨트롤 반이 통째로 움직였으니 우리가 정신을 잃은 동안 엄청난 충격이 있었겠지. 꼭 지진 사고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죄다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결과적으론 사상자도 나왔고 말이야.
특히나 화학실이 완전히 초토화 상태라 베네디가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어. 우린 나머지 물질 반응이 멈출 때 까지 기다렸다가 바르몬과 누크, 에이사의 시신을 옮겨 나왔어. 그리고 일단은 아주 잘 가공된 것처럼 보이는 석조판 위에 눕혀놨지. 이미 석화가 반 정도 진행돼서 꼭 석판과 한 세트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 같아 보여. 이곳에 호수 무덤으로 쓸 만한 데가 있을지 모르겠어. 현재 시야 내에선 없어 보이긴 한다만, 우린 시페린 같은 시간제한 장례 문화 같은 건 없으니까 조금 나중에 처리해도 되겠지···.
베네디의 다친 꼬리는 아물고 있긴 한데 아직까진 균형 잡기가 어려운가봐. 걷는 게 썩 편해 보이진 않아. 그래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연구실마다 뭐가 있었고 어떤 걸 건드리면 안 되는지 모르니까, 서로 걸리적거릴 바엔 흩어져서 내부를 마저 수습하기로 하자는 베네디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어. 화학실은 더욱더 조심해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는데 별 일 없어서 다행이었어. 틀림없이 병도 대부분 깨지고 이미 합성되거나 반응이 끝난 물질이 많아서 사실상 정리할 게 거의 없었을 거야.
제노아는 제어실에서 시작해 컨트롤 쪽으로 돌아다니며 사용 가능한 기계나 부품을 모으느라 바빴고, 쳄벨이랑 폰포플은 정리하는 것보다 싸우는 소리가 더 많이 들렸던 것 같고···. 나와 로블은 모니터링하던 기계에서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을 모아 제노아한테 가져다줬어. 물론 관측실 역시 손상되긴 했지만 제어실이나 컨트롤만큼은 아니었거든. 그걸로 통신 장비를 만들려는 것 같아. 아니면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측정해서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계라든가. 뭐가 됐건 제노아라면 분명 도움이 될 만한 걸 만들어 낼 거야.
그 외엔 수색용 장비를 재정비하면서 보냈어. 어쩌면 우리가 떨어진 이 미지의 행성을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수색용 카트나 정찰부에서 쓰던 소형 정찰선 같은 건 사고 당시 전부 차고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탈 만한 걸 찾기 전까진 당분간 걸어 다니며 조사할 수밖에 없겠지. 간단한 전동 보드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기지 주변에 알 수 없는 물체들이 많이 흐트러져있긴 하지만 그다지 도움이 될 만 한 건 없어 보여.
연구실 안에 있을 땐 아직 베르콘힐 행성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시선을 조금만 돌려 나오면 밖이 휑하니 보여서 사고가 났다는 게 실감이 나. 야외와 맞닿은 벽은 엉망으로 찢겨나갔고, 박살난 우측 컨트롤 보드에서 일직선상에 죽은 화학부 연구원들 셋이 누워있는 넓은 석판이 있어. 하아··· 왜 갑자기 스테이크롬360의 사고 영상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위성 페림6의 연구소 사고, 우주를 떠도는 시페린 행성인들의 시체, 수습에 열을 올리는 엘 존 총장의 모습. 그런 광경들 말이야.
하지만 우리에게 닥친 사고는 마누스 표준 중앙 방송엔 나올 거리도 안 되겠지. 기껏해야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 초대형 영구선 사고 보도 영상 아래 알아보기도 힘든 작은 글씨로 지나가는 정도였을 거야. 애초에 베르콘힐 행성 같이 볼 것도 없는 변방의 행성 분석 따위에 누가 관심이나 가졌겠어? 다들 알타라이스타나 데네비아가 관련된 튜세리아스발 가쉽 거리에나 흥미를 느끼겠지. ‘오늘도 베가틱이 어느 행성에서 사고를 쳤습니다!’같은 거···.
운데르엔 베르콘힐 행성 분석기지 사고 소식이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 이름도 시페린 행성인들의 사망자 명단처럼 방송에 나오고 있진 않을까? 질리 네가 내 이름을 보고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지만 사고 현장엔 우리 시체가 없잖아. 그쪽 상황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우리가 기지 일부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쯤은 알았을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래야만 하고.
아니··· 혹시 절멸 폭탄 같은 거에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하지만 우린 여기 있어. 멀쩡히 살아서 말이야. 증거가 없는 이상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모른 채 찾는 걸 포기해 버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우린 아무도 모르게 여기서 죽어 돌이 될 테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우연히 여기에 들른 어느 행성인이 완전히 엉뚱한 곳에서 죽어버린 운데리안들을 발견할 거야. 만약 우리가 운데르에서 왔다는 것도 모른다면 무슨 석조 장식품 취급 정도에서 끝나는 슬픈 운명을 맞이하겠지. 아니면 그 누구도 우릴 영영 못 찾을 수도 있을 테고.
미안해, 이런 상황에선 나도 모르게 점점 비관적인 생각만 드네. 질리, 네 작품들은 그 어떤 것보다 밝고 희망적이잖아. 지금 당장 네가 만든 음악이 너무 듣고 싶어. 그럼 이 구렁텅이에서 좀 덜 허우적거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비노에게 음악킷을 빌려주는 게 아니었어! 하필이면 이럴 때···. 이보다 멍청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다시 들을 수는 있을까, 질리··· 아아, 질리.
···후아.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사고 시점부터 깨어난 시점까지 녹음된 걸로 계산해봤는데 1피노 이상 지났더라. 그런데 이곳의 시간 체계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지금 보니 5D라고 나와 있어. 4는 언제 건너뛴 거야? 아니면 처음부터 4가 없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이전 메시지 이후로 1피노는 족히 지난 것 같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게 맞는 것 같아. D라는 게 확실히 피노 같은 개념으로 보여. 1피노보다 1D라는 주기가 좀 더 짧은 게 맞나 봐. 나머지 것들은 전혀 변화가 없네. 이 원들은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깜빡이기만하고. 제노아한테 시간을 알 수 있을 만한 것도 만들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기지 주변을 둘러싼 빛 말이야.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어. 어떤 방법을 쓰든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일정한 빛의 양이 안개처럼 퍼져있어. 우리가 흩날려 놓은 연기도 그 모양 그대로 머물러 있고···. 마치 대기현상 같은 게 전혀 없는 것처럼. 가설이긴 해도 시공간학 시간에 모든 것이 멈춰있는 빈공간이 있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암흑의 공허라고 했던가. 혹시 내가 있는 곳이 그런 공간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어.
기지도 엉망이고··· 시간도 이상하고··· 지금은 그저 구조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