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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YYY MM 7D 00:00:00, 위치 확인 불가◀
*수신자 : 질리 타르스트두 위브
*발신자 : 조이 모트마조르 진
아직도 구조대는 올 기미가 안 보여. 벌써 4피노는 지난 것 같은데, 분명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거겠지. 구조 요청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당장 부품이 없는 상태에선 통신 기기를 고치기가 힘들대. 발신기나 유도 장치를 만들기도 어렵고 말이야.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보니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많지 않아. 다행히 멀티 룸의 식품 저장고 덕분에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것도 여기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위험해질 거야.
시간 하니까 제노아가 내 메시지 저장함을 살펴봤는데, 이건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위치를 제공받는 형태라 자기가 어떻게 손 볼 수가 없대. 제작 회사 특유의 독자적인 시스템이라나 뭐라나. Y나 M이라는 표시도 뭔지 도통 모르겠고 깜빡이는 원들은 시간이 있어야 하는 자리이지 않나 싶어. 0이 이렇게나 많이 쓰인다는 게 도대체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어. 여기가 어딘진 몰라도 아마 이쪽에서 쓰는 단위겠지. 아니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행성 어딘가에서 사용하는 것이거나. 할 수 없이 이런 상태로 써야 할 것 같아.
대신 이걸 이용해서 1D의 길이를 알아냈어. 내가 1D가 1피노보다 짧은 것 같다고 얘기했었잖아. 그땐 그냥 추측이었지만 계산해보니 1피노가 거의 2D에 가까운 시간이더라고. 난 그저 1D라는 게 1피노보단 짧아도 0.8피노 쯤 되겠거니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았어. D라는 수치가 바뀌는 동안 지켜보니 1D는 0.5333333333333333피노란 걸 알 수 있었어. 차라리 1.875D라고 표시되는 편이 훨씬 알아보기 쉬웠을 텐데…. 매번 0.5333333333333333피노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튼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엔 불편하기도 해서 제노아가 컨트롤에서 떨어져 나온 계기판으로 마누스 표준 시간 시계를 세 개 만들었어. 정확한 기준이 될 만한 게 없기 때문에 실제 흐름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길이는 정확히 42-3.0이야. 하나는 컨트롤 위에 세워두고 공용 시계로 쓰기로 했고, 나머지 두 개는 수색 나갈 때 한 팀씩 가지고 나가기로 했어. 우리도 마냥 손 놓고 앉아 구조대를 기다리기만 할 순 없으니까.
수색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그것보다 시간의 흐름을 지켜봐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따로 있어. 내가 이곳의 이상한 빛에 대해 말했잖아. 우린 사고에서 깨어난 이후로 동시에 모두 잠들어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걸 알았지. 그래서 각자 깨어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을 하나로 맞춰봤어. 그런데 안개처럼 퍼져있는 빛의 양이 많아지거나 적어진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아직도 제자리에 있는 연기처럼 말이야. 마치 공전이나 자전 현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움직이지 않는 행성은 들어 본 적도 없어.
여긴 대체 어딜까? 아직도 모르겠어. 이곳을 부를 이름이 하나 필요할 것 같아.
그동안 쳄벨과 폰포플은 한 번 더 크게 싸웠고 나와 로블이 양쪽에 붙어서 말리느라 꽤 힘들었어. 사실 싸웠다기보다는 쳄벨이 일방적으로 폰포플을 쏘아 붙이는 상황이긴 했지만. 매번 서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쯤 되니 둘 다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쳄벨도 마냥 막무가내로 우기는 건 아닐 테고, 폰포플도 무슨 짓인가 하긴 했는데 다만 의도적이었던 게 아닌 것 같아. 어쨌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뭘 하기는 했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본인조차 그걸 정확히 모른다는 거지.
반면 제노아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 1피노당 섭취해야 할 식량을 나누면서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대응했어. 라쉴 때문에 기지에서 난동 피우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지. 오히려 큰 사건이 터진 이런 상황에서 더 침착하고 냉철해 보였어. 베네디는 얼마 남지 않은 화학 물품을 이용해 하얗게 변한 잎사귀의 반응을 살폈는데, 결과는 베르콘힐 행성에 있을 때와 같았어. 표본 상태가 검은색이든 하얀색이든 변화와 관계없이 현재 분석이 가능한 조건상에선 이상이 없단 거지.
아니, 애초에 잎사귀에 문제가 있는 게 맞긴 할까?
쓸데없는 데 힘 낭비하지 말라는 제노아의 말을 대신 되풀이하면서 생물 연구부원들을 진정시키며 설득하는 동안, 제노아는 어느덧 식량 분배를 끝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정리했어. 먼저 회복하는 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베네디는 기지에서 잎사귀에 대한 몇 가지 실험과 계산을 더 해보기로 했어. 그리고 제노아가 남은 기계를 모아다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는 동안 우린 두 팀으로 나뉘어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지. 아까 말한 수색 말이야.
참, 내가 아직 말 안 했었나? 모래밭에서 구식 나침반을 주웠다고. 책에서 참고 그림으로나 볼법한 굉장히 오래된 방식이었는데, 자기장을 찾는 거니까 쓸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뭐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에 살던 자들이 사용하던 건지 누가 오래전에 떨어뜨리고 간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건 중요치 않았어. 나침반이 꼭 사방이 자기장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끊임없이 돌며 갈피를 못 잡더라. 근처에 혼란을 줄 만한 것도 없었고 뭐가 문제인가 싶어 장비함에 있던 전자 나침반을 확인해 봤는데 수치가 나오질 않았어.
우린 여기서 시간도 잃고, 방향도 잃고, 죄다 잃어버린 거야.
고민 끝에 종이 발명 직후에나 했을 법한 아주 옛날 방식을 이용하기로 했어. 기지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계속 수색해 나가면서 대략적으로 어디에 뭐가 있는지만 표시해 두는 간단한 지도를 그리기로 말이야. 수색 범위만큼 표시한 뒤 돌아오면 다시 하나로 합쳐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보기로 했어. 이런 지도 관련해선 던피트가 잘했는데 걘 꼭 필요할 때는 없지….
먼저 출발 전에 생물 연구부 벽에 붙어있던 도표를 뜯어내 빈 뒷면 정중앙에다 기지를 표시했어. 그리곤 가로 세로로 선을 길게 긋고 기지 각 사방에 위치한 가장 가까운 큰 지표들을 표시한 다음 종이를 반으로 접어 찢고 한 팀에 한 장씩 나눠 가졌지. 비록 방향은 잃었지만 다행이도 거리까지 걸음으로 재야하는 끔찍한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어. 수색 관측부 안을 정리하던 중 도구 캐비닛을 뒤지다 거리 측정기를 찾았거든. 물론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운 좋게 마침 멀쩡한 기본 장비함도 몇 개 있어서 그것도 하나씩 나눠 가졌어.
정확한 방향을 대신해 임의로 90도를 재설정한 다음 기지를 중심으로 꽃잎 모양 수색을 펼치기로 했어. 두 팀이 양쪽 끝에서부터 반원을 만들며 점점 좁혀가는 식으로 양쪽을 둘러보는 거야. 베르콘힐 행성에서도 적용했던 수색 방식이었지. 로블은 쳄벨과 함께 모래밭이 펼쳐진 0도 방향으로 움직였고 나와 폰포플은 그 반대인 180도 방향으로 갔어.
일단 통신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걸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어. 그게 아니면 적어도 수신이 가능한 물건이 필요했기 때문에 종류에 상관없이 크든 작든 기기류가 있기를 바라야 했지. 그래야 제노아가 해체해서 뭐라도 만들 테니까.
걸어 다니면서 흥미롭다 싶은 건 뒤져보고 지표가 될 만 한 건 그려 넣으면서 쓸모 있는 건 가져오고, 그냥 그런 단순 반복 작업의 연속이야.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난 그림이라면 질색이고 뭘 그려도 전부 엉망이잖아. 그래서 지도의 표시는 폰포플이 맡기로 하고 나는 수색 관측부의 능력을 발휘하기로 했어. 로-벨조도 같은 상황이었지.
딱히 생물 연구부원들을 욕하는 건 아니지만 이름만 ‘생물’연구부지 베르콘힐 행성에는 식물 외엔 있어 봤자 미생물 정도뿐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연구실에서 식물 관찰만 하던 애들을 무턱대고 앞장세울 순 없지 않겠어? 그래서 수색 관측부원들이 거리 측정기를 잡고 제노아가 만들어 준 시계를 수시로 확인하면서 42-1.5 안에는 돌아오기로 정한 다음 출발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