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YYYY MM 19D 00:00:00, 위치 확인 불가◀
*수신자 : 질리 타르스트두 위브
*발신자 : 조이 모트마조르 진
질리, 출발 전에 여유가 생겨서 주변을 좀 둘러보고 있어. 어차피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이지만 잠시 혼자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해서…. 메네 행성에 분포된 빛의 밀도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긴 해도 거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멍하니 있을 때는 공기 중에 퍼져있는 빛을 찬찬히 살펴보게 돼. 마치 대기 중에 주의를 끄는 힘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로-벨조가 어제까지 그려온 지도를 봤는데 대부분이 노란색이었어. 말했었나?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한 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색깔을 이용해 표시하기로 한 거 말이야. 나와 폰포플이 수색하는 지역은 대부분 돌 아니면 흙이라 회색과 검은색이 많아. 로-벨조는 현재까진 사막이 펼쳐진 구간만 다닌 걸로 보이는데 조금 신기한 점은 곳곳에 염분 함량이 높은 부분이 표시되어 있었단 거야. 오늘은 그쪽을 더 수색할 것으로 보여. 그 부근에 어제 발견했다던 정체불명의 기기도 표기되어 있었거든.
그리고 내 작은 바람이 이루어졌어. 티르헬 경감이 로-벨조에 합류해 기기 운반을 도와주기로 했대. 이젠 로-벨-티조라고 불러야할 것 같아. 우리 쪽은 이제 조-폰-클조가 됐어. 수색원에 생물학자에 경관까지, 평소 같았으면 상당히 괜찮은 조합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생명을 위협할 만한 것은커녕 생명체 자체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이런 상황에선 무기가 과연 얼마나 쓸모 있을까 싶어. 하지만 시페린 경찰들을 만난 것처럼 다른 행성인을 또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우리 외에도 사고를 당한 자들이 더 있을까? 만약 시페린 경찰들이 사고 반경 안에 있어서 휩쓸려 온 거라면? 그렇다면 잎사귀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설명이 될 거야. 그런데 그런 상황이었으면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뭔가를 발견했어야 말이 되겠지. 여전히 사고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사고로 여기에 불시착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여. 분명 경찰들이 출발한 곳에 단서가 있을 거야. 확실히 티르헬 경감이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내 생각을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가 필요해. 근거 없이는 아무도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폰포플에게는 잠시 비밀로 하고 당분간은 혼자 움직여야 할 것 같아. 걔는 소심해서 이런 의심을 감추지 못할 거야. 잘못하다 티르헬 경감이나 클레인 경위가 눈치라도 채는 날엔 수색조를 바꾸자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경위는 경감과는 좀 다른 것 같아 보이긴 해도 아직은 경감과 한 통속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어. 괜히 내가 먼저 섣부른 행동을 할 필요는 없겠지. 두 사람의 의견이 상반된다면 경위가 먼저 다가올 테니까. 나는 그저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기만 하면 돼.
사고 지역으로 의심되는 범위를 계산해뒀는데 일단은 157도 방향에 있는 어제의 원래 목적지부터 먼저 가보려고. 제노아가 발신기에 쓸 만한 부품의 목록을 적어줬어. 티르헬 경감의 말이 맞다면 고철 폐기장 같은 게 있을 테고 거기서 뭐라도 건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경감이 뭔가 숨겨놨을 지도 모르고…. 너무 앞서갔나?
티르헬 경감이 클레인 경위를 불러 뭐라 얘기하고 있어. 한 번 의혹을 갖기 시작하니까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워 보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어쩌면 운데리안들을 잘 감시하라는 말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막 만난 타행성인들만 무기를 갖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제노아한테 가서 소닉 드릴을 빌려 달래야겠어. 로블에게도 위급시 무기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구를 하나 갖고 가라고 일러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그렇지, 질리?
…
중간 식사를 일찍 끝내고 고철 더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중이야. 티르헬 경감이 얘기한 고철 폐기장이란 게 진짜 있더라고. 하지만 그게 그 자에 대한 신뢰도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 가끔씩 클레인 경위를 지켜봤는데 그다지 의심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그저 제노아의 부품 목록을 보며 열심히 고철 더미를 뒤지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 같았고 덕분에 부품도 꽤 찾았지. 내가 소닉 드릴을 무기 삼아 가져온 게 민망할 정도로 말이야. 그래도 소닉 드릴이 아주 필요 없지는 않았어. 스크류 드라이버 대용으로 꽤 쓸 만했거든. 물론 드릴이다 보니 절단면이 좀 거친 건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기체 해체할 때 줄곧 써서 그런지 소닉 드릴 하나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쓸 수 있게 됐어.
왜 이런 곳에 고철 폐기장처럼 보이는 장소가 덩그러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2피노 정도는 더 와야 할 만큼 기기 잔해들이 많이 쌓여있어. 정말로 어딘가 존재하는 폐기장의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처럼 보여. 주변은 덤불과 잡초가 듬성듬성 있는 곳 외엔 죄다 흙바닥이거든. 심지어 폐기장 아래의 흙과 겉을 둘러싼 흙의 성분마저 달라서 더 이상해. 내가 전에 메네 행성은 마치 이것저것 엉망으로 갖다 붙인 것 같다고 했었지. 여기도 딱 그래 보여.
로-벨-티조가 향한 사막 지역에도 염분 함량 모래가 드문드문 분포되어 있었어. 바다가 존재했던 흔적이라고 하기엔 면적이 너무 좁았단 말이지. 이곳은 보면 볼수록 더 모르겠어. 정말 ‘미에네’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
“폰포플, 운데르 사어 중에 ‘괴상하다’는 말이 뭐야?”
“위르에스트라노?”
“우이르…뭐?”
“위-르-에-스-트-라-노!”
“글자가 더 괴상해. 왜 사어가 됐는지 알겠다.”
언어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난 지금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됐어. 아마 다시 태어난다 해도 언어학자는 못될 거야. 뭣보다 방구석에만 틀어 박혀 문자만 죽어라 들여다보고 있는 건 나랑 안 맞아.
“조이! 여기 소닉 드릴이 필요해요. 제노아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표시해 놓은 부품을 찾은 것 같아요!”
“지금 가요!”
…
질리, 좋은 소식이야! 지금 막 기지에 돌아와 고철 폐기장에서 가져온 짐을 마저 내리고 있는데 아까 클레인 경위가 출력 증폭기를 찾았어. 고장 난 상태였지만 제노아가 충분히 고칠 수 있다며 바로 가져갔지. 그걸로 발신기의 출력을 상당히 높일 수 있을 거래. 기지에 먼저 도착해 있던 티르헬 경감이 언제 알았는지 제일 먼저 다가가 지켜보고 있어. 우리 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경감은 유독 더 메네 행성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가봐. 꼭 뭔가 쫓기는 사람 같다니까. 아무튼 이제 구조 요청 신호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오래된 단파 라디오도 하나 발견했어. 구조 요청은 기지에 있던 수신기를 역방향으로 바꾼 걸 계속 개조해서 쓰고 있으니까 이걸로는 최대한 가까운 행성의 방송을 수신하는 데 쓰기로 했어. 운이 좋다면 마누스 표준 중앙 방송의 주파수가 잡힐 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여기가 적어도 마누스 항성계인지 아닌지나마 알 수 있으면 좋겠어. 할 일이 많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가끔씩 이런 것도 지친다는 생각이 들어. 특히나 잠들기 전에는 더 그래.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어서 보였으면 해.
로-벨-티조가 염분 사막에서 가져온 몇 가지 기기는 이미 상당 부분 녹이 슬어 못 쓴다고 하더라고. 헛걸음했지. 대신 무슨 전자력을 가진 검은 상자 같은 걸 찾아 왔다나 봐. 아직 자세히 안 봐서 뭔지는 잘 모르겠어. 우선 나머지 짐부터 옮기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내일 다시 고철 폐기장으로 가서 나머지 구역을 뒤져야 하거든.
수신이든, 발신이든, 부디 진전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