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야기의 결론이 그따위로 납니까! 게다가 사저가 간다고 뭐 결과가 달라지기라도 할 겁니까? 이건 뭐…….”
“아주 맞을 소리만 골라서 한다? 그럼 내가 짐이라도 된다는 거야!”
“사실 뭐 어느 정도는… 히익!”
묘안은 찔끔하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양소은이 어느새 장심에 내력을 모아 후려치려 했던 것인데 물론 진짜로 칠 생각은 없을 터였다.
“이 녀석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야! 가긴 누가 간다고 그래?”
결국 마유조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유조의 입장에서 보면 확실한 짐 덩어리 두 개. 이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던 것이다.
“흐음, 확실히 짐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가 되진 않을 것 같은데? 양 소저도 어엿한 무림인이 아닌가? 그것도 꽤 하는.”
“무슨 말인가! 저 철부지 녀석이 같이 가면 없던 일도 생길 판인데!”
뜻밖에도 혁리가 선선히 그녀의 동행을 승낙하자 마유조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장난이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월홍을 두고 갈 수도 없으니 이 기회에 월홍을 맡겨도 좋을 듯해서 그러이. 게다가 이 일행의 수장은 누가 뭐래도 단야 저 친구가 아닌가? 그의 생각부터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
혁리의 말을 듣던 마유조는 흠칫했다. 혁리는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순간 일행의 고개가 자연적으로 단야를 향해 한꺼번에 모였다. 그러자 단야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어차피…….”
눈 아래 두른 천 사이로 가로로 찢겨진 구멍이 있었고, 그 사이로 단야는 술잔을 밀어 넣었다.
바로 술잔 하나가 기울여지자 그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월홍하고 둘이 갈 상황에 여러분이 참여하는 것일 뿐.”
담담하지만 그 내용은 틀린 것이 없었다. 정말로 단야 혼자 가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끼어든 셈인 것이다.
“역시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하오. 그것만 생각하신다면 상관하지 않겠소.”
단야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혁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양소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가도 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한데… 이봐요, 단야.”
“…….”
단야는 고개를 들었다. 그를 부른 것은 양소은. 그녀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이 녀석, 십 년 전에 만났다고 했죠?”
월홍에 관한 이야기였다. 단야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녀는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월홍, 대체 몇 살이에요?”
“…….”
대답하기는 쉬우나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왠지 한 여인의 좋은 상상을 망치는 것 같은 기분에.
***
“으읍, 읍!”
거의 전라의 여인이 두툼한 요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손을 묶인 여인의 입술에서는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건 그녀의 입술 위에 거무튀튀한 커다란 입술 하나가 덮여졌기 때문이다.
“흐으… 오늘은 꽤 즐겁게 놀 수 있겠구만그래. 역시 가만히 있는 것들은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좋아, 반항해 봐라. 잘하면 할수록 네년이 살 확률이 높아질 것이야.”
잠시 떨어진 사내의 입술에선 비릿한 비웃음이 실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눈물범벅이 된 여인은 신음성을 흘리다가도 그 목소리에 부르르 떨었다.
실로 두려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여인을 통한다면 정말 적나라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두려움은 여인의 머릿속에서 이성이라는 것을 가져갔다.
여인의 몸을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여인이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였다.
살 수 있다는 사내의 말에 좌우로 허리를 틀면서 갓 잡힌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던 것이다.
“좋아, 좋아. 이래야 기분이 나지. 자, 흔들어! 흔들어봐!”
퍼어억!
“아아악!”
여인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흘러나왔다. 사내가 슬쩍 상체를 들어 올리더니 그 커다란 주먹을 들어 옆구리를 후려친 것이다.
움직이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하의를 훌렁 벗어 내렸다.
“지금까진 아주 좋으니 안심해라. 이제부턴 극락을 맛보게 해주지. 그동안 고생한 대가라 생각해. 큭큭큭.”
“으으으…….”
여인은 이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사내가 괴소를 지으며 하물을 잡아 여인의 옥문에 넣으려 할 때였다.
“다, 단주님, 계십니까? 단주님!”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물론 그 소리는 자신의 수하. 도고라는 놈으로 눈치가 꽤 있기에 거의 부관처럼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한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눈치없게 굴고 있었다. 그가 있는 파오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자신을 부르다니…….
“도고 이 개자식아! 지금 내가 뭐 하는지 몰라!”
거칠게 소리치며 사내는 여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소리만 쳤을 뿐 하던 짓은 계속하고 있는데, 그때였다.
“몰라서 그랬겠느냐? 제 놈도 당황하니 그런 것이지.”
“…….”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내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오른손을 뻗었다. 항상 수족과 같은 그의 만도는 언제든 손에 잡을 수 있도록 몸 주변에 놓았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놀라지 마라, 사단주.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이곳으로 바로 온 것이니.”
“후우, 셋째 형님. 진짜… 이 차추만가(車推灣可), 놀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를 차추만가라 부른 사내는 바지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만도를 놓으며 풀썩 앉았다. 진짜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불청객이 입을 열었다.
“풍마단의 사단주가 뭐가 그리 무서운 게 있다고 난리냐? 어서 정신이나 차려라. 오구가 당했다.”
“…말머리꾼 오구 말입니까?”
차추만가의 목소리에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차추만가는 험악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가 뒤를 봐주는 놈을……. 셋째 형님, 그럼 제가 가서 싹 다 목을 베어올까요? 그래야 다시는 우리에게…….”
“그럴 생각이라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다. 네 녀석은 아직도 이 하기(下起)가 그리 생각없이 굴 것 같더냐?”
“…….”
차추만가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셋째 형이자 풍마단에서 삼단주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땅딸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부를 차고 있지만 그의 무공은 절대 자신이 따라갈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생각보다 똑똑한 자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놈이 당평산 양무곡으로 올 것 같더구나. 앞으로 삼 일 정도 남은 셈이지.”
“양무곡에요? 호오,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요. 하면 형님 계획은 거기서……?”
차추만가는 대강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씨익 웃었다. 아마도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일 터였다.
“그래, 대강 그렇게 되지. 한데 이번엔 형님들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구나. 지난번의 일로 큰형님이 좀 무서워졌거든.”
“아…….”
차추만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난 마행(馬行)에서 하기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혼자서 하다 일을 그르쳤다. 괜한 꼬리 하나를 붙게 만든 것이다.
어차피 별것없는 마을. 한 사람은 원래 목적한 곳으로 가고 다른 사람은 다른 마을을 갔었다. 조금 돈이 되는 곳으로 눈길을 슬쩍 돌린 것뿐이다.
뭐, 자신이 보기에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저 대형이 화를 내는 것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대형이 화가 나면 진짜 무서우니 말이다.
“실수를 했으니 반드시 원상태로 해놔야겠지. 그래서 이번엔 너와 내가 같이 움직이려고 한다. 수하들도 모두 데리고서.”
“설마 그놈들을 잡는 데 같이 움직이잔 말입니까? 숫자가 꽤 되나요?”
차추만가는 살짝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수하는 근 팔구십여 명에 이르는 상당한 세였다.
물론 이전에 좀 손실이 있어 조금 적을지도 모르지만 꽤 많은 숫자였다.
둘이서 움직인다면 웬만한 지방 관아도 박살날 정도로 힘이 있었던 것인데, 아무리 지난번에 일이 잘못되어 질책받았다 하더라도 너무 조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하다고 생각하느냐?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하기는 당장에 차추만가의 생각을 읽었다. 그러자 차추만가는 씨익 웃었다. 말 대신 대답을 한 셈이었다.
“지난번에 내 수하 시신을 봤겠지? 활을 쏘는 놈, 그놈이 온다.”
“삼조장을 죽인 놈이로군요. 꽤나 하는 놈이 오긴 오는군요.”
“그놈뿐만이 아니다, 차추만가. 이상한 놈들이 붙었어.”
차추만가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이상한 놈들이라는 것은 참으로 애매한 것인데, 다행히 하기는 끌지 않고 바로 말해주었다.
“설산의 홍사검 마유조, 그리고 포쾌 금포 혁리가 붙었다고 하더군. 귀찮을 수도 있겠어.”
“……!”
차추만가는 그제야 왜 하기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 뒤의 세력이 중요한 것이다.
설산과 관, 이 둘 중 하나만 와도 무서운 상황이다. 설산은 이 지역의 패자.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홍사검 마유조는 그 설산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란 평판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설산도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금포 혁리는 이 지방에서 혁혁한 전과를 가진 인물. 들리는 말엔 독자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발이 넓은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것참, 귀찮게 되었군요. 그냥 두고 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놔두기도 뭐한 상황이군요. 막는 거야 그렇다 쳐도…….”
“신경 쓸 것 없다. 우린 마적이야. 언제 우리가 누굴 두려워 손을 안 쓴 적이 있냐?”
“…….”
생각보다 큰 배포에 차추만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왠지 이건 하기답지 않았다.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것밖에 되지 않는 꼴이니 말이다.
저 투박한 얼굴 아래 번뜩이는 기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때론 그 생각이 묘책이 되어 나타날 때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면 좋겠지만 성격상 해줄 턱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형님들에게 말하지 않고 우리만 움직이는 이유는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함이다. 이 점 꼭 명심해 주기 바란다.”
“물론입니다, 셋째 형님. 두 형님에게는 보고 안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핫핫!”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한데 그 사람 좋은 웃음을 본 사람은 차추만가 외에 한 명 더 있었다.
“나, 나으리! 인자하신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제발요!”
“응?”
바로 차추만가가 범하려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하기의 신발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아마도 중원이 아니라 변방의 여인인 듯싶었다. 이런 예를 취하는 것은 그쪽이니 말이다.
“아이가 둘이나 있습니다. 어린놈들이라 제가 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제발 절 불쌍히 여기셔서…….”
“머저리 같은 년.”
차추만가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참 좋은 상황이었다. 눈물 펑펑 쏟아가며 애들 이야기까지 하면서 살려달라고 하니…….
그러나 사람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는 하기라는 사람을 너무도 잘 알았으니 말이다.
“나으리! 그러…….”
파아앗!
차추만가는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익숙한 광경이니 무서워 감은 것이 아니었다. 눈에 뭐가 튈까 봐 그런 것이었다.
뜨끔한 그 감각은 사람의 피였다. 여인의 몸은 허리에서 반 동강이 난 상태였다. 어느새 하기의 거부가 허공에 들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저분하게 어디다 침을……. 넌 골라도 이런 것들만 고르느냐?”
한술 더 떠 싫은 인상을 가득 지은 채 차추만가를 책망하고 있었다. 하기는 원래 저런 자였다. 어쩌면 풍마단을 이루는 네 명의 단주 중 가장 성격이 더러운 인간일 수도 있었다.
누가 자신을 만지는 것 차제를 싫어했다. 여인을 안을 때도 양팔을 자르고 만질 만큼 병적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차추만가도 그에게 손끝 하나 댄 적이 없음은 당연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 형님. 뭣하시면 다른 애들 좀 품고 가시렵니까?”
“됐다. 수하들이 있는 곳에 가면 더 좋은 것들이 있지. 만지지도, 말도 하지 못하게 혀와 팔을 자른 것들이지. 몇 명 보내주랴?”
“아닙니다, 형님. 전 취미없습니다. 큭큭.”
싱글싱글 웃었지만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알겠다. 그럼 그만 가도록 하지. 이틀 후에 양무곡에서 보자꾸나.”
“예, 형님. 살펴 가십시오.”
슷.
파오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기의 신형은 이미 사라졌다.
통통한 몸에 비한다면 정말 날랜 신법이었는데, 문득 차추만가의 눈길이 죽은 여인의 몸에 머물렀다.
아직도 뜨거운 피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그 여인을 향해 차추만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등신 같은 년, 그냥 조용히 있으면 극락이라도 보고 가지. 쯧쯧.”
바짓단을 추스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냄새가 요동치는 이곳에서 방사를 하기는 적당치 않았다.
차라리 새로 파오를 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
“야! 여기 정리하고 새로 잠자리 마련해! 계집도 다시 내오고!”
“예, 단주님! 힉!”
도고 녀석이 바로 들어오다 잘린 시신을 보고 흠칫했다. 차추만가는 피식 웃으며 신형을 움직여 나갔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니 그야말로 온 세상이 하얀 빛이었다.
“빌어먹을! 달, 드럽게 좋네. 춥지만 않으면 딱인데. 제길.”
여기저기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눈이 많이 오고 있었다.
괜히 만도를 들고 죽어라 휘두르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었다. 차추만가는 오른손의 만도를 들어 올리며 작게 입을 열었다.
“단야라…….”
차추만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어쩐지 즐거운 것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인데, 그때였다.
“한데…….”
문득 드는 생각 하나에 차추만가의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의 선후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하나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의 수하들이 죽은 것은 이해가 갔다. 단야인지 뭔지 하는 놈의 화살에 죽은 것이 확실하니 거기엔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러나 맨 처음 그 마을을 갔던 자들, 그들은 달랐다. 마을 사람 거의 모두를 죽여놓고서 왜 죽었는지 말이다.
“제놈들끼리 싸웠나?”
그로선 최선을 다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