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득.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단야는 주위를 살폈다. 숨어 있는 자들 대부분이 지금 나와 있는 상황. 하나 아직도 이십여 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후의 힘인 듯 꼭꼭 숨겨놓은 그들이 나올 때까지 단야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같이 있던 세 사람이 나간 것은 순전히 그들의 의지. 그 의지를 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들이 나가 그 움직임으로 인해 그들을 불러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상황은 없었다.
“잠깐만, 단 아저씨. 나 부탁하나 해도 될까?”
부탁이라는 말에 단야는 눈을 돌렸다. 월홍은 단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큰 눈을 또랑또랑하게 굴리는 중이었다.
“저… 양 누나가 저리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좀 이상하긴 한가 봐. 우리가 잘못한 게 있기는 한 거지?”
이상한 노릇이었다. 월홍은 단 한 번도 단야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와 같이한 십 년 동안 부탁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
“월홍에게 요물이라고 안 했어. 단 아저씨에게 괴물이라고도 안 했고. 좋은 사람이 아닐까?”
“…….”
요물, 괴물. 나이를 먹지 않는 월홍과 얼굴이 징그럽게 망가진 단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용현촌이란 곳에서 말이다.
용현촌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두 사람을 싫어했다. 사실 단야의 기억 속 용현촌은 거의 다른 마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중에 몇 명만이 두 사람에게 잘해주었다. 묘묘와 향 노야는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야는 그 두 사람을 찾으려 했다. 풍마단과 싸우는 것은 오로지 그 이유뿐, 명성이나 의협심 따위는 전혀 이유가 아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 좋은 냄새가 나, 가까이 하고 싶을 정도로.”
월홍은 솔직한 아이다. 말을 잘해서 그 말로 구슬리는 것 따위는 월홍에게 통하지 않는다. 사람 그 자체를 본능적으로 판단한다.
단야보다 월홍이 오히려 사람 보는 눈은 더 좋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틀림없을 터이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 저 누나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 뭔가 가슴이 조금 더 쿵쾅거려. 그리고… 응…….”
월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야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저 친근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어렵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을 거의 느껴보지 않았기에 난감한 것이다.
“에이, 말로 표현이 잘 안 되네. 하여튼 난 저 누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어.”
확실한 의사 표현이다. 이 정도까지 들었으면 더 들을 것은 없었다. 단야는 월홍을 향해 말했다.
“아직 부탁을 말하지 않았다, 월홍.”
“아…….”
단야의 말에 월홍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마차에 있는 사람들, 안 다치게 구해줘. 물론 양 누나와 다른 사람들도. 단 아저씨, 내 부탁은 그거야.”
“어렵다, 월홍”
단야는 빠르게 말했다. 이건 계산도 필요없는 일이다. 그냥 양소은과 마유조, 혁리뿐이라면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자들까지라면 솔직히 버겁다. 몸을 지킬 수 있는 세 사람에 비해 저들은 너무나 약했다.
“알고 있어, 월홍도 그거 어렵다는 거. 근데…….”
스륵, 털썩.
월홍은 손을 뻗어 단야의 허리춤에서 전통 하나를 끌러내었다. 그건 나무 화살을 넣는 전통이었는데 아무리 나무로 만든 화살이라도 꽤나 무게가 있었다.
“웃차!”
단야의 허리춤에서 푼 전통을 등에 메며 월홍은 낑낑거렸다. 그러나 상당히 많이 메어본 듯 곧 익숙하게 짊어지더니 단야의 오른편에 가 섰다.
“월홍은 알고 있어. 단 아저씨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 그치?”
“…….”
단야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일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꽤나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월홍의 부탁이라……. 십 년 동안 한 번도 부탁하지 않았던 월홍이 하는 부탁이니 안 들어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특이하다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누군가를 위해 부탁하는 것은 정말 처음 있는 것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받기 위해 움직여 온 것이 그의 삶. 지금 나선다면 그 삶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알았다. 그럼 천천히 갈 테니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월홍.”
“응.”
월홍의 대답을 들으며 단야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그 삶의 원칙 따윈 정한 적도 없었다.
제 7 장. 요녕성, 당평산의 양무곡2
땅, 따당, 따다당!
“후우!”
선두에 서 있는 마유조는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마적단의 공격은 매서웠다.
특히나 풍마단이라 하며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금세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만도만 치는 공격이라면 어찌해 볼 도리가 있었지만 이건 병기가 한 종류가 아니었다. 창에 월도에 갈고리까지 공격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싸울 수는 있는 정도.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냥 버티는 것만 해도 극렬한 내력을 소비하는 일이니 말이다.
“빌어먹을 놈들! 결국 비루한 차륜전이냐!”
양소은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거야 당연한 노릇이었다.
차륜전은 기본 중의 기본. 적의 전력을 고스란히 남기면서 상대방을 상대하는 좋은 수단인 것이다.
처음엔 좋았다. 세 사람의 무공으로 삽시간에 이십여 명을 고혼으로 만들었을 땐 정말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들이 작정하고 차륜전으로 나선 것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격은커녕 버티는 게 전부인 것이다.
“멍청한 소리는 그만하고 집중해! 여차하면 모두 죽는다!”
마유조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고, 양소은은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의 시발은 양소은이었던 것이다.
상의도 없이 무작정 암기부터 던지며 나가 버렸기에 이런 결과가 온 셈이다. 조금 돌아서 기습을 하든지, 아니면 단야를 설득해서 같이 싸웠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니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공세는커녕 수세만 계속 취할 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곳에 나온 이유는 저 마차를 끄는 여인 일행 때문이니 그들의 안전도 봐야 했다.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은 상황인 것이다.
“끼야호! 감히 뉘 앞에서 눈길을 돌려! 홍사검 좋아하네! 크하하하!”
“그 붉은 검을 네놈의 입에 처박아주마! 얌전히 죽엇!”
두두두두!
양편에 두 사내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소리치자 마유조의 눈이 깊숙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맘때쯤 무언가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아울러 오른발을 크게 앞으로 내디디며 순식간에 반 장이 넘는 거리를 뛰어들었다.
고오오오오.
마유조의 검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커다란 붉은 수실이 달린 그의 검이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하자 마유조는 더욱더 정신을 집중했다.
마유조의 무공은 양강의 무공이다. 그것도 그냥 양강의 무공이 아닌 극양강(極陽强)의 무공이었는데 이는 설산파가 가지는 무공의 특성에 기인했다.
설산은 언제나 추운 곳이다. 여름이라고 해봤자 서늘하다는 느낌이고 그나마 그 기간도 짧았다.
칠월 하순에서 팔월 중순, 약 한 달여가 전부다.
오월달에 꽃은 피지만 그 꽃 위에 아침이면 눈이 쌓이는 곳이 설산이다. 추위만큼은 정말 대단해서 그 추위에 버틸 수 있는 무공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개발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마유조의 무공 기반이 되었다. 즉, 가장 설산에서 오래된 무공을 그는 연성했고, 어느 정도 큰 성과를 보았다.
열양진공(熱陽眞功)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쉬이이이잇!
마유조의 주변에 한순간 부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의 눈이 한꺼번에 빛났다.
이는 마유조의 열양진공이 피어오르자 주위의 눈이 순간적으로 녹아 생기는 현상이었다.
“무공 고수는 무슨, 잔재주구나!”
“그 정도는 애들 장난이지!”
피이잇! 파아앗!
하나 달려오던 마적 두 사람은 당황은커녕 상당히 침착하게 공격을 전개했다.
그들의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이자 수중의 병기가 수증기 안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왼쪽은 창, 오른쪽은 갈고리였다.
카카칵!
“엇!”
하나 두 사람은 이내 놀라야만 했다. 창과 갈고리는 서로 얽힐 뿐 수증기 안에 마유조는 없었다. 헛손질을 한 것이다.
두두두두!
두 사람은 일단 병기를 거두며 앞으로 나가려 했다.
서로 큰 원을 돌며 양쪽으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말과 함께 일 장여를 빠르게 움직이던 순간이다.
“…….”
두 사람의 눈이 부릅떠졌다. 두 필의 말 사이에 홀연히 마유조가 나타난 것인데, 그는 공중에 뜬 채 말의 속력과 같이 뒤로 빠지고 있었다.
실로 절정의 경공(輕功). 절로 입이 벌어지는 이 경공은 유빙진세보(遊氷晉世步)라는 것으로써 이 역시 가장 오래된 설산의 경공이었다.
대성하게 되면 곤륜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에 버금간다는 절기가 이것이었다. 운룡대구식과 함께 유일하게 공중에서 신형을 바꾸는 것이 자유로운 무공이었던 것이다.
마유조는 대성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팔성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뒤로 튕기듯 나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부터 뒤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어떻게 하든 말과 속도를 맞추고자 했는데 그건 단 한 가지 이유. 일단 이들의 말을 제지하고자 했다.
말만 없다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시작한 승부였다. 그리고 그 승부는 결실을 맺으려 했다. 마유조의 검이 수평으로 그어진 것이다.
파아아아앗!
완벽한 검기는 아니지만 꽤 강한 내력이 대지를 수평으로 가르자 말의 목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볼 것도 없이 그건 목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생각보다 피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은 점인데, 그건 그의 검날에 실린 내력 때문이었다.
열양진공이 자르는 순간 바로 달구어진 검으로 지져 버리는 효과도 가져오기 때문인 것이다.
타탓!
두 필의 말이 땅으로 쓰러지자 마유조는 땅에 내려섰다. 두 사람의 기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 있는지는 뻔했다. 그들은 허공으로 신형을 날릴 수밖에 없다.
마저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만 마유조는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 다시 나아갔다. 공격은 계속될 것이고, 그는 계속 선봉에 서야 했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피리리리링.
작은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마유조는 살포시 웃었다. 그의 생각대로 친구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유조의 등 뒤편으로 금색의 줄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살아 있는 뱀이라도 되는 듯 줄은 정확하게 창을 쥔 사내의 목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빌어먹을! 이대로 조용히 당할 것 같냐!”
파아아앗!
기광이 번뜩이는 눈을 보니 아무래도 한 수가 있는 놈인 듯싶었다. 과연 풍마단. 졸개까지도 어느 정도 무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자가 휘두른 창이라 속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까아앙!
“으응?”
그냥 잘라져야 할 금포가 어이없게도 쇳소리를 내며 창날을 막아내자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쾌들이 쓰는 포승줄은 그저 일반적인 줄에 강도가 높은 얇은 강철선을 넣어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냥 일반적인 줄을 쓰는 자들이 더욱더 많았다.
그러니 그냥 잘려야 하는 것인데도 포승줄은 마치 단단한 철 몽둥이라도 된 듯 창날을 튕겨내니 환장할 노릇이었는데, 그때였다.
“곧 죽을 놈이 뭘 그리 놀라나?”
피리리링!
“헛!”
사내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금포는 이번엔 다시 뱀처럼 창날을 휘감으며 그에게 다가왔고, 삽시간에 그의 팔까지 나선형으로 휘감더니 어느새 목을 두어 번 감은 후 끝이 축 늘어졌다.
달리는 말에 타고 있었기에 그 관성으로 인해 그의 신형은 위로 날고는 있으나 앞으로 가는 셈이었다. 한데 혁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줄은 어느 한 지점을 지나자 팽팽히 당겨졌다. 순간 혁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내세에는 제발 착한 놈으로 태어나라.”
그리고는 오른 손목을 앞쪽으로 확 젖히자 뒤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빠가각! 우두두둑! 쿠우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사내는 목이 부러져 추락했다. 금포가 휘감았던 창과 팔까지 함께 말이다.
휘리리리릭! 턱!
삼 장이 넘게 날아갔던 금포는 어느새 다시 감겨 혁리의 손에 들어왔다. 금포이식(金包二式)이라 불리는 그의 독특한 포승법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는 금포를 다시 말아 쥔 후 시선을 옆으로 던졌다. 그곳엔 허공에 뜬 마적단을 향해 쌍검을 날리는 양소은이 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마유조와는 정반대의 기운을 쓰는 여인이었다.
카라라라락!
허공에 떠 있는 상대지만 양손은 자유로우니 갈고리를 그냥 둘 턱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양소은의 목 줄기를 노리고 파들었지만 그녀는 왼손을 쭉 펴며 막았다.
좌수검에 갈고리의 끝부분을 거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마치 자석이라도 된 듯 갈고리와 좌수검이 철썩 달라붙었다.
그건 그녀의 내력에 기인한 현상이었다. 그녀의 내력은 마유조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뜨거운 양강의 기운이 아니고 차가운 음유의 기운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양소은이 여인이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긴 했다. 하나 무조건 여인이기에 음유한 무공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추위에 대항하기 위한 무공이 필요하다면 반대로 그 추위에 순응하는 무공 역시 필요했다.
즉, 마유조와 양소은은 정반대의 무공을 배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