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한은기(陰寒隱氣)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운을 좌수검에 흘려보내 상대의 무공을 끌어당긴 것인데 이후 우수검을 쫙 펴서 갈고리를 거는 줄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틀어 마치 실타래를 감듯 빠르게 회전하자 그녀의 몸은 팽이가 되어 마적에게 접근했다.
“누굴 호구로 아나!”
차아앙!
사내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손엔 줄 대신 어느새 만도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빠르게 양소은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하나 양소은은 침착했다. 그녀는 양손을 비틀었고, 양손검에 감긴 줄은 한꺼번에 뜯겨졌다.
양손이 쫙 펴지자 그녀의 신형은 한순간 회전이 사라졌다.
파아앗!
머리 위에 끊어진 줄의 파편이 휘날리는 순간 양소은의 머리 위로 만도가 내려쳐졌다. 하나 결과적으로 그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쐐애애액!
“…….”
사내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만도가 닿기 직전에 그녀의 신형은 빙글 돌려세워진 것인데 공중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형을 이동시킨 것이다.
불과 도와 머리가 한 치를 남겨두고 신형이 늘어나듯 옆으로 이동하자 사내는 절망했다.
회심의 일격이 벗어나면 다음에 올 것은 너무도 뻔했다.
카각! 파아아앗!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그의 가슴에 커다란 검상이 새겨졌고, 양소은은 쓰러지는 그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는 힘을 주며 허리를 뒤로 젖히자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회전했다.
퍼어어억!
당연히 땅에 떨어진 사내는 곤죽이 되어 널브러졌고, 양소은은 사뿐히 일 장여 뒤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그제야 긴 호흡을 내쉬었다.
“호오, 천방지축인 줄 알았더니 연습은 하고 있었구나. 유빙진세보가 구성이 넘은 것이냐?”
“그나마 잘되는 것이 이것뿐이니까요, 사형.”
양소은의 목소리에 마유조는 피식 웃었다. 쌍검을 휘두르며 눈길을 끄는 양소은이지만 진짜 그녀의 장점은 검법이 아니라 그녀의 두 다리였다.
유빙진세보의 성취는 자신보다도 양소은이 더욱더 나았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쉽게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마유조는 작은 웃음을 한 번 짓고는 다시 거두었다.
비록 이제 작은 승리를 거둔 것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일단 얕보이지 않은 것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침묵 이후엔 더욱더 강한 공격이 올 것임을 그는 직감했다.
물론 그건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
이대로 가면 차륜전이 될 것이고, 그럼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뿐인 것이다.
그것이 싫어 무리를 하면서도 내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상대를 도발해 한 번에 승부를 내려 하는 것. 위험할 수는 있지만 어차피 이쪽에는 별 상관 없었다. 유리한 것을 던지는 것은 저들이니 말이다.
“역시 쳐 죽일 놈들이구나! 좋아, 제대로 한번 죽고 싶다 이거냐!”
다행히 먹혔는지 얼굴까지 시뻘게지며 차추만가가 고함을 치기 시작하자 마유조는 한층 더 내력을 끌어올렸다.
제일 처음에 날아오는 이 선공을 막으면 승산이 조금은 높아질 테니 말이다.
“야! 모두 저놈의 상판을 날려……!”
차추만가의 입에서 커다란 고성이 흘러나오려 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이어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훗, 그런 거였나? 보기보다 잔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었구만.”
“…….”
돌연한 사태에 마유조는 미간을 좁혔다. 잘되는 듯하더니 한순간 차추만가가 평정심을 회복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죽을 놈들이 꿈틀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건가. 큭큭.”
“…….”
마유조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건 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하니 한 가지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냉정하게 판단하면서 말이다. 마유조는 눈을 치뜨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기에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차추만가의 음성이 다시 들린 것은 그때였다.
“낭패란 얼굴이구만. 좋아, 그럼 그 표정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어야겠지? 야! 끌고 와!”
“예, 단주님!”
마유조 일행이 싸울 때 상단 일행은 이미 제압된 상황이었다. 마적들은 그중 사내 두 명을 끌고 왔는데 차추만가는 두 사람을 무릎 꿇렸다.
“아주 대단한 무공을 지니신 분들이라 조금 더 재미있게 상대해 주고픈 마음에 하는 짓이다. 잘 보도록.”
스릉!
허리에서 만도를 꺼낸 차추만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손여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은 여인의 시신을 안은 채 여러 시비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더 이상의 동요가 없도록 다독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런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슬픔이나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모습이었다. 공포나 두려움에 질린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차추만가는 뭔가 가슴속이 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있음을 느꼈다. 어쩐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린 듯한 생각이 확 드는 것이다.
“빌어먹을, 네년의 얼굴도 마음에 안 드는구나.”
파팟!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스스로 겁을 먹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차추만가의 만도는 두 남자의 목을 쳤고, 두 사람은 비명도 없이 스러졌다.
그러자 손여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
“이 무슨 짓입니까! 이들은 대항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는 협이란 글자가 있긴 한 것입니까!”
아름다운 얼굴과는 달리 추상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차추만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 애 둘이 죽었으니 나도 죽인 것뿐이다. 협? 그딴 게 뭔데? 아, 그건 저기 서 있는 저 세 놈에게 해당하는 거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차추만가의 왼손이 올라갔고, 그러자 바로 앞에 있던 시비 하나가 손에 잡혔다.
“아아악!”
“향비야!”
손요는 소리쳤지만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추만가는 향비란 여인을 잠시 보다가 한쪽으로 던졌다.
“너,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넷, 단주님!”
차추만가는 사이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 미소를 마유조에게 보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저 빌어먹을 것들이 우리 애들을 죽이면 바로 그년을 죽여 버려. 아니, 검으로 막기만 해도 죽여. 팔부터 시작해서 아주 잘근잘근. 알았냐?”
“예, 단주님. 맡겨주십시오! 큭큭.”
정말 즐거운 역할을 맡은 듯 사내는 괴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향비를 무릎 꿇리곤 그 옆에서 만도를 들어 올렸다.
“아, 아씨! 살려주세요, 아씨!”
“향비야! 그만두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손여의 입에서 애원의 말이 흘러나오자 차추만가는 더더욱 짙은 웃음을 흘렸다. 이 느낌이었다.
언제나 느끼던 상황이 이제야 전개되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저 정파의 협사들에게 말해보지 그래? 혹시 알아? 들어줄지도. 크핫핫핫!”
턱짓으로 마유조를 가리키며 차추만가가 소리치자 마유조는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하나 그것뿐이었다.
한 번에 저들을 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추만가의 말처럼 반항도 하지 못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빌어먹을 놈이 할 줄 아는 게 고작 그따위 짓밖에 없냐? 네놈이 그러고도 남자야!”
보다 못해 양소은이 소리쳤지만 차추만가는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는 턱짓으로 한 번 더 마유조를 가리켰고, 그러자 네 마리의 말이 순차적으로 달려나갔다.
두두두두두!
말은 최대한 빠르게 마유조를 향해 달려왔는데, 한순간 마유조는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검이 빠져나갔다.
터텅!
검은 얼어붙은 대지에 박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러자 혁리와 양소은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맨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조! 어서 검을 들어!”
혁리가 소리쳤지만 마유조는 양손을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벼락같이 앞으로 내밀며 내력을 집중했다.
쩌어어엉!
한 필의 말이 스치듯 지나가자 마유조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마유조는 소매를 둘둘 말아 거기에 내력을 집중해 막아낸 것이다.
“오호, 한번 해보자 이거지? 차아앗!”
쩌어어엉!
“큭!”
두 번째 공격이 닥치자 마유조의 입에서 작은 핏줄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마상 공격을 맨손으로 막는 건 무리인 것이다.
하나 마유조는 인상만 쓸 뿐 막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세 번째 공격이 들이닥쳤다.
쩌릉!
“쿨럭!”
결국 붉은 피가 마유조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혁리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벌벌 떨리는 양손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이없는 일에 당한 셈인데, 문득 그의 귓가에 차추만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크하하하! 역시 빌어먹을 놈이구나. 그래, 그렇게 뒤져라. 아주…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온다. 크핫하하하!”
세상이 떠나가도록 그는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조롱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광대처럼 사람을 웃겨줄 줄은 몰랐다.
정을 지향하는 위군자들이 얼마나 바보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 진짜로 죽으려 하다니…….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마지막 일격. 그의 부관인 도고가 직접 나가서 만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건 어찌해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죽엇!”
도고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의 오른손이 크게 휘둘러졌다. 말의 속도에 도고의 무공이라면 볼 것도 없었다. 한데,
카라라랑!
조금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분명히 병기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하나 그렇다고 마유조가 버린 검을 주워 든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 한 사람의 신형이 버티고 있었다. 쌍검을 교차시켜 가슴에 댄 채 크게 숨을 쉬고 있는 양소은. 그녀가 더 보지 못하고 나와 막은 것이다.
“사매, 이게 무슨…….”
“죄송해요, 사형. 도저히 난…….”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일 터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을 떨어뜨렸다.
차마 저쪽에 있는 여인들을 볼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는 들었다. 막기만 해도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그 말은 양소은의 가슴속에 비수가 되었다.
양소은의 마음속에 저울이 매달려졌다. 그리고 그 저울은 사형에게로 확 기울어졌고, 그래서 이렇게 막은 것이다. 저 여인들이 어떻게 되든 말이다.
이래서야 저 뒤에 손 놓고 있는 단야란 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말만 협을 추구한다 해놓고 결국 하는 짓은 단야와 같으니 위군자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다.
“그럼 그렇지. 정파는 무슨……. 좋아, 약속을 지켜주지. 야!”
차추만가는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상황. 이제 조금 더 진한 여흥을 즐길 수 있었다.
“예, 단주님! 이야아아아!”
향비의 목을 노리던 사내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목을 치려는 심산. 향비란 여인은 해쓱한 얼굴로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차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나 어차피 죽을 것,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콰각!
향비의 귓가에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 그리고 이어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쉬리리리링, 떨그렁.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향비는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한순간이지만 눈앞의 정경이 확연히 보였다.
그건 기다란 칼이었다. 유려하게 꺾어진 초승달같이 생긴 칼. 바로 그녀의 목을 치려던 사내의 만도였다.
“…뭐야?”
짜증 섞인 차추만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이 소리가 목을 베는 섬뜩한 소리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향비의 목도 여전히 건재했다. 차추만가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목을 베라 했던 사내의 오른손 팔꿈치에 무언가 달려 있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길쭉한 막대기. 그건 화살이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박혔던 것인데, 그냥 박힌 것이 아니었다.
팔꿈치를 뚫고 들어와 옆구리까지 깊게 틀어박혔던 것이다.
“다, 단주… 님.”
팔에 화살을 맞은 사내. 그 자신도 크게 놀랐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그 표정은 이내 중인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퍼어억!
“…….”
차추만가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그의 미간에 꽂혔던 것인데, 사내는 뒤로 이 장여나 튀어나가고 있었다.
진정 활의 위력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그는 하나의 사실을 기억했다.
그간 잊고 있었던 사실. 오늘 여기서 함정을 판 것은 바로 이 화살을 쏘는 자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야라 했던가?
뽀드득, 뽀득.
조금 먼 곳에서 눈을 밟는 소리지만 갑자기 깔린 정적에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어오고 있었다.
차추만가는 눈을 좁혀 근 이십여 장이 넘는 곳에서 나타난 사내를 보았다.
어린아이와 같이 오고 있는 듯한데 키가 놀라울 정도로 컸다. 그리고 그 큰 키만큼이나 거대한 대궁을 들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서로 간의 간격이 십여 장이 될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십여 장이 되자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놈이 단야라는 놈이더냐?”
먼저 입을 연 것은 차추만가였다. 그의 목소리에 단야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큭… 과연 우리 애들이 당할 만하군. 귀신같은 솜씨야.”
시킨 것도 아닌데 방패가 있는 수하들은 저절로 방패를 들어 몸을 감쌌다. 단 한 수지만 보는 순간 고수임을 감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