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기 또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한 말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며 상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것이었다.
그의 무공은 원래 부법이 아니라 곤법이다. 천살곤(千殺棍)이라는 요살궁(妖殺宮)의 무공. 그것을 부법으로 바꾼 것이 그의 무공이었다.
요살궁은 살수 집단이었다. 돈을 위해선 무엇이든 다 하는 곳.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는 안력에 관한 훈련을 많이 받았다.
안력이라는 것은 참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안력은 상대의 모든 것을 훑어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그 안력이 좋기에 아직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가 보는 단야는 완벽한 무인이었다. 큰 키에 긴 팔다리, 거기에 대궁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거리를 벌리면 자신의 필패였다.
게다가 이렇게 근접전에서도 강했다. 저 작은 도로 자신의 거부를 막는다는 것 자체가 증거였다. 근접전에서도 밀리는 듯했다.
“대형이란 자는 어디에 있나?”
“…….”
또렷한 목소리.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내력에서도 그는 단야의 상대가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단야에게 말할 때 평온을 가장한 목소리를 냈었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평온을 가장할 수 있는 목소리가 절대로 아니었다. 이건 진짜 실력이었던 것이다.
“제길, 어쩐지 형님이 무섭게… 나오더라니……. 이럴 줄 아신 건가.”
전혀 의미 모를 소리가 들리자 단야의 눈이 좁아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손을 쓸 태세였다.
“말하면 살려주겠나?”
하기는 비릿하게 웃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 농 한번 걸었지만 단야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확실히 재미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데 그 순간, 하기의 눈이 번쩍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제… 그만들 두실 수 없겠나요?”
손요의 목소리였다. 맑은 그녀의 목소리에선 짙은 슬픔이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기는 짜증이 치밀었다.
정인군자 같은 이런 말엔 진짜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것이 그의 속마음이었다. 살수행을 하면서 지겹게 지껄이는 것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너… 같으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하기는 입을 열었다. 이른바 모든 힘을 그는 도끼에 집중했다.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요량이었다.
“그만둘 수 있겠나?”
키링, 휘리링!
커다란 소리와 함께 힘으로 밀어붙이려던 하기는 도리어 도끼자루를 잡고 있는 양손 중에 아래를 잡고 있던 왼손을 놓았다.
영악한 한 수였다. 단야의 미는 힘에 의해 도끼는 도날 바로 아래를 중심으로 빙글 돌았고, 하기는 재빨리 오른발을 힘껏 차올렸다.
도끼는 발아래로 힘차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의 오른발은 내려오는 도끼의 등을 후려쳤고, 그러자 엄청난 가속이 되어 허공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파아아앙!
아무리 발로 찬 것이라지만 여기엔 그의 필생 공력이 전부 담겨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하기엔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던 것이다.
쐐애애액!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장면이 펼쳐졌다. 단야의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장면이 보였다.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하기는 슬쩍 눈을 돌렸다.
그곳엔 손요가 양손을 부들부들 떨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녀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한 표정에 하기는 다시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기는 이죽거리며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채 반도 뻗기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흠칫 신형을 멈추었다.
감각이 이상했다. 사람을 반으로 갈랐다면 뭔가 걸리는 듯한 감각이 있어야 했다. 워낙이 중병기에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뼈라도 가르는 느낌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한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법. 시선까지 속이는 단야의 신법을 기억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는 오른손을 들어 허리춤에서 지면과 수평으로 휘둘렀다.
쐐애애액!
누군가 있으면 맞을 것이라는 생각. 거기엔 대단한 내공도, 정교한 초식도 필요없었다. 그저 빠름만 필요하면 되는 것인데, 그때였다.
퍼어억!
“크악!”
하기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의 오른쪽 가슴에 기다란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네 치나 박힐 정도로 충분한 힘이 실린 화살이었다.
퍼어억!
“웁!”
또 한 발이 허벅지에 와서 박히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찡그리며 눈을 치떴다. 어느새 단야는 저 멀리 오 장 너머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정말 치 떨리게 빠른 신형이었다. 문득 그의 눈에 단야의 오른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쉬이이이잇!
그리곤 미간을 향해 바로 화살이 날아오자 하기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생이 끝나는가 싶으니 왠지 허무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졌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개자식! 지옥에서 보자!”
과아아아아!
온 힘을 다해 내력을 실은 후 오른손을 머리 위로 쳐들어 올렸다. 오 장이라면 자신의 도끼도 화살이 될 수 있었다.
동귀어진의 수법. 물론 안 될 확률이 더 높다. 저 귀신같은 신법으로 허무하게 피할 터였다.
그러나 최소한 기분만은 좋았다. 발악이라도 하니 말이다. 한데,
탓!
“…….”
마치 어디 바위틈에라도 끼인 듯 도끼가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무언가 자신의 오른손을 방해하고 있었다.
눈을 돌려 손목을 보자 내관혈(內關穴) 부근에 뭔가 조그만 것이 얹혀 있었다. 꽤나 따스한 것이 눈을 좁혀 보니 사람의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은 아주 쭈글쭈글한 것이 단야의 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팔십은 넘어야 이러한 주름이 나타나게 될 터다.
나이만 먹은 힘없는 손이 아니었다. 그 손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지는 순간 하기의 오른손이 쫙 펴졌다.
땅그랑.
힘없이 그의 도끼가 땅에 떨어지자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는 가운데 이번엔 그 손이 빠르게 위로 올라왔다.
극문(極門), 수삼리(水三里)에 이어 척택혈(尺澤穴)에 이르자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볼썽사납게 처박혀 버렸다.
쿠우웅!
“커억!”
그냥 거꾸로 박힌 것뿐인데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노인의 손에서 나온 진력에 당한 것이었고, 그제야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볼 수 있었다.
오 척 단구의 노인이었다. 빙글거리며 마치 장난감이라도 찾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자, 너도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어떠냐? 오홋.”
자신의 일격을 피한 후 어느새 오 장여 떨어진 곳에서 대궁을 들고 있는 단야. 그의 눈도 놀람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 노인처럼 쭈글쭈글한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노인의 손엔 화살 한 대가 들려 있었다. 전체가 묵빛으로 빛나는 시커먼 화살은 온통 철로 만들어져 있음을 단번에 짐작하게 했다. 놀랍게도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은 것이다.
피하기도 힘든 화살을 손으로 잡은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기는 두 노인의 모습을 다시금 자세히 살폈다.
검도 없는 사람들인데 이상하게도 검에 차는 수실을 허리에 매달고 있었다. 각기 붉고 푸른 수실이 허리춤에서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검을 쓰면서도 검이 필요 없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 요녕성에서 두 사람이 한 몸 취급받는 이들은 단 한 경우뿐이었다.
“설홍청사(雪紅靑絲)… 설산의 반양 장로!”
현 요녕성 최고의 고수들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두 사람. 그들의 등장에 하기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쿵 소리가 나게 떨어졌지만 아픔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정말 운수 더러운 날이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하기였다. 이제 벗어날 길은 전혀 없었다.
***
“기혈이 억류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워낙에 심후한 내공을 가지셨으니 별 탈은 없겠군요.”
“…….”
마지막 침을 거두며 손여가 말하자 마유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무리한 내력의 운용으로 다쳤던 가슴이 이젠 완전히 진정되어 있었다. 감쪽같이 나아 버린 것이다.
아니, 사실 놀란 것은 마유조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다친 사람들, 그들 모두는 다 놀란 눈을 만들었다.
그만큼 손여라는 여인의 의술은 여태껏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이었다.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이젠 정말 늦은 밤이 되었다.
달구지 세 대는 모두 움직일 수 있도록 상단의 호위무사들이 고쳤고, 죽은 사람 또한 모두 땅에 묻었지만 시간이 늦어 모두 모여 노숙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손여라는 여인이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하여 지금까지 약 두 시진 동안 그리하게 한 것인데 놀랍게도 모두가 다 차도가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사람들을 돌보았고, 거기에 차도가 있다는 것은 보통 의술이라 볼 수가 없었다.
“이만한 약재를 가지고 가는 것도 그렇고 신기와 같은 의술을 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소저는 그냥 범인이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혹 사문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유조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이 손여에게 향했다. 지금 이곳엔 단야를 제외하고 모두 다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마유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빛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태껏 조용히 있던 홍설검 항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재도 약재지만 그 양이 보통이 넘더군. 이건 설사 황제라도 얻기 힘들 정도야. 그렇다면 원래부터 약재 쪽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말이 되겠지. 그렇지 않나?”
항임의 목소리에 손여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우물거리기만 했는데, 이어 청설검 우오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호에 그런 문파가 있다고 들었지. 돈과 명예 그 모든 것이 다 필요없는 곳, 오직 인연만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 있다고 말이야.”
“…설마 연의궁(連醫宮)?”
혁리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와 함께 눈에서는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연의궁이란 세 글자는 사실 들어는 봤어도 진짜 그곳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아니, 혁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럴 터였다. 워낙에 신비로운 곳이기도 하지만 의가를 추구하는 문파인지라 문도 수조차 별로 없었다.
물론 많은 의원이 있을 테지만 본궁 출신은 몇 명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원수가 적으니 활동량도 적어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결례를 지었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셨는데도 인사가 늦었군요. 연의궁의 손여라 합니다.”
“과연, 과연. 오홀홀, 연의궁 사람이니 대단한 의술을 가졌겠지. 게다가 이 좋은 향내는 정향(正香)인가?”
“그렇습니다, 어르신. 정향을 아시는 것을 보니 궁주님과 연연이 있는 분이군요.”
무슨 향이 나는지 모르지만 정향이란 말에 연의궁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 서서 깊은 읍을 올렸다. 항임과 우오상은 손짓으로 예를 올리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일없다. 그놈의 예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 그리고 너희들을 구한 것은 우리가 아니란다. 그 단야란 친구가 한 일이 아니더냐?”
어깨를 으쓱이며 항임이 입을 열자 손여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저 웃었을 뿐인데도 주위가 다 밝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참, 같은 사람인데 왜 이리 다른 거냐. 누구는 웃으면 세상이 다 반가운데 누구는 웃으면 등골에 식은땀이 나니…….”
“진짜 웃어봐, 식은땀 나나 안 나나?”
모안은 씨익 웃었다. 물론 그를 쏘아보는 양소은에게 말이다. 양소은은 고개를 돌리며 손여에게 말했다.
“뭐, 이렇게 된 것,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것도 좋겠군요. 저는 설산의 양소은이라 해요. 저쪽은 내가 좋아하는 우리 사형 마유조, 그 옆엔 이 지방 제일의 포쾌 혁리, 그리고 이 두 분은 잘 아시듯 반양 장로님이십니다.”
“고년 참, 역시 빨라. 항임일세.”
“오홀홀, 우오상이라 하지.”
양소은은 빠르게 내뱉고는 씨익 웃었고, 손여는 포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이 친구들은 모두 제 시비입니다. 다만 저분은 이 마차를 호위해 주신 진효라는 분이시지요. 많은 돈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기꺼이 운송을 맡아주셨습니다.”
“가경표국(己慶漂局)의 진효(進效)라 합니다. 역병의 약재를 가지고 가는 것이니 당연합니다, 아가씨. 아마 국주님께서도 제 생각에 찬성하실 겁니다.”
각진 네모 턱에 다부진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좀 전에도 보았듯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내. 무공은 별로지만 그 기개만큼은 상당한 사내였다.
“기경표국이면 하가보(河佳保) 그 친구가 국주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혁 포쾌님. 가끔 포쾌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해서 그런지 남 같지 않군요.”
“허어.”
혁리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경포국은 이곳 요녕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꽤나 큰 곳이다.
단순히 표국이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국주인 하가보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하나 그렇기에 조금 이해가 안 가는 점도 있었다.
“가경표국이라 해서 묻겠네만, 깃발이야 오히려 마적단의 표적이 되니 안 올린 것이 이해가 가네. 하나 이 말도 안 되는 인원은 대체 무엇인가? 이 정도의 물목이라면 더 많은 사람이 지켜야 할 터인데?”
그건 혁리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게 적은 병력, 아니, 물목이 문제가 아니다.
연의궁 사람을 호위하는 것이 저 물목보다 더 큰일이었다.
물목이야 어떻게든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만일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책임은 돈으로 해결할 상황이 안 될 터였다.
표국 전체의 목숨을 내어놓아도 될까 말까 한 상황으로 번질 것이 뻔할 정도로 큰일이 생길 수 있었다.
“…….”
비교적 간단한 물음이지만 왠지 진효는 아무런 말을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는데, 그러자 혁리가 다시 말했다.
“흐음, 내가 아무래도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것인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혁리가 말하자 진효의 표정이 변했다. 무언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건 제가 말씀드려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