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럭 소리를 치면서 혁리는 아이의 턱에 손을 대어 위로 치켜들었다.
마치 무릎 꿇은 채 벌이라도 받듯 앉아 있던 아이의 얼굴이 그제야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
혁리와 마유조 둘 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얼굴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로 기이한 얼굴. 예쁘기도 하면서 남성답기도 한 특이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확인하면 확연히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이 아이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다.
“어떤가? 살 수 있겠는가?”
혁리는 장심에 손을 대고 있는 마유조에게 물었지만 마유조는 그저 입을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유조가 말이 없자 혁리는 답답한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아 일으키려 했다.
“안 되네. 하체가 완전히 얼어붙었어. 무리하게 떼려 하다간 불구가 될 것이야.”
“이런…….”
과연 아이의 발은 이미 차가운 대지와 찰싹 붙어 있었다.
마유조의 말처럼 그냥 떼려고 했다가는 큰일이 날 상황이기에 혁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데 그때였다.
“아… 안 올… 게… 요…….”
“뭐라고?”
파랗게 질린 아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가 나오자 혁리는 귀를 바싹 가져다 대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다시… 는 마을… 에 오지… 않…….”
“…….”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이 마을에 오지 않겠는다는 말인 듯싶었다.
하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턱이 없었다.
“할 수 없군. 수색은 중지하고 일단 불을 피우겠네, 유조.”
“그래, 그리하게나. 내력으로 아이의 몸을 데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혁리는 재빨리 달려나갔고, 마유조는 아이의 몸에 다시금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강한 내력을 넣어 강제로라도 피가 돌게 만들 요량이었다.
내력을 넣었을 때 아이의 몸에선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그마한 마유조의 내력도 아이에겐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 단… 단… 야…….”
“조용히 하거라. 자칫하다간 너와 나 둘 다 위험하단다.”
파랗게 변한 입술을 떨며 아이는 계속 말을 했다. 여전히 의미 모를 이야기이기에 마유조는 더 이상 아이의 목소리에 대한 의식을 버렸다.
“미안… 해… 단야… 그냥 온… 것인… 데…….”
그것이 소년이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소년은 깊고 깊은 의식 저편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타탁, 탁.
하나도 아니고 네 개의 모닥불을 피운 상황이라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는 정말 굉장했다. 당연히 온기를 넘어 열기까지 느껴졌다.
그만큼 혁리가 필사적으로 불을 피운 것이다. 이곳의 일에 관해 이야기해 줄 아이.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운데 큰 불을 중심으로 세 개의 모닥불을 삼각형으로 놓은 후 아이의 몸을 녹인 것이다.
시신들이 있는 곳이지만 움직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아이,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는걸. 무공도 없어 보이는데 그간 어떻게 버텼을까?”
이젠 두툼한 옷을 입은 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잠든 아이를 보며 마유조는 궁금한 목소리를 내었다. 물론 그건 혁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가 깨어나면 물어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물론 거기엔 방금 자네가 말한 것도 있다네. 나 역시 좀처럼 믿기지가 않아. 눈 속이 오히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인데…….”
소년의 옷은 홑겹이었다. 외투도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죽은 것이 약 오 일 전. 그렇다면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얼굴도 왠지 사연이 있을 법한 아이야. 그러니 반드시 살려… 응?”
혁리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를 기이한 느낌이 그의 육감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릿하지만 분명 이것은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뭔가 땅을 울리는 듯한 낮은 울렁거림은 분명 기억 속에 있었다.
“이봐, 유조. 그 아이, 이젠 움직일 수 있지?”
“그래. 이젠 가능하네. 완전히 발도 녹았으니. 한데 왜 그러…….”
마유조는 대답하다 말고 오른 무릎을 일으키며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자세를 잡았다. 그 역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제 느낌이 아니었다. 뚜렷하게 귀와 발을 통해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그건 분명히 땅을 차는 듯한 소리였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 마을을 습격했던 마적단이 다시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였다.
“일단 움직여야……. 이런… 어느새…….”
마유조는 몸을 일으키다 난색을 보였다. 그의 뒤쪽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포위한 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의 판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어느새 육안으로도 보일 오 장여의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을 둘러쌌다.
“애들이 안 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역시 방수가 있었군.”
“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뜬금없는 소리에 혁리는 미간을 확 구겼다. 짧은 대화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하들이 안 왔다고 하는 것은 이들을 죽인 자들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주위에 눈이 쌓여 살짝 도드라진 시신들은 그자들의 시신인 듯했다.
아무래도 저자의 머릿속에서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지만 그 오해를 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하는 것으로 봐서 좋은 놈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으니.
“감히 대명천지 아래 어떤 놈들이 이따위 짓을 하는가 했더니 네놈들이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이름이나 한번 알자꾸나!”
혁리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주위를 살폈다.
어두컴컴한 상황이라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일단 숫자는 파악이 되었다. 적어도 약 삼십여 명 정도 되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자신들의 숫자가 둘, 게다가 지켜야 할 어린아이 한 명이 있고 상대는 말을 탄 상태라 영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적어도 사방이 뻥 뚫린 이 개활지에선 말이다.
“큭, 이제 보니 관청에서 나온 놈이었군. 이야, 이거 놀라운데? 이 나라에서 일하는 관원이 있다니……. 쿡쿡, 애는 쓴다만 달랑 둘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사내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까딱였고, 그것이 신호였다.
이십여 명의 마적단이 그대로 두 사람에게 덮쳐들자 혁리는 허리춤의 포승줄을 풀며 소리쳤다.
“유조! 오른쪽 산으로! 바로 갈 테니 아이를 부탁하네!”
“알았네! 어서 오시게!”
마유조는 혁리의 생각을 단번에 꿰뚫어 봤는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미는 듯하더니 그대로 하얀 점이 되어 쏘아졌다.
쫘아아아앗!
“이런, 제길! 무림인이었구나! 모두 달려!”
한순간 마유조의 신형이 십여 장 너머로 보이자 말머리가 모두 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말의 배를 차려 하는 순간이었다.
파파팡!
기이한 소리와 함께 허공 가득 붉은 잔영이 퍼지고 있었다. 혁리가 포승줄로 세 개의 모닥불을 허공으로 띄운 것이다.
그는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와 함께 오른손이 빠르게 휘저어지자 혁리의 오른손에 달린 금포가 회오리를 쳤다.
“어딜!”
파파파파팡! 이히히히힝!
허공에 날린 모닥불을 무차별적으로 난타하자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 불씨가 휘날렸다.
그러자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며 엉뚱한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혁리는 양발을 빠르게 놀리며 바로 신형을 날려 산 쪽으로 향한 채 길게 소리쳤다.
“그리 쉽게 갈 수는 없을 것이야! 좀 더 놀아보자고!”
파아앙!
십여 장 밖에서 다시 돌아선 채 혁리는 오른손의 포승줄을 허공에 튕겨냈다. 그러자 낭랑한 파공음이 중인들의 귓가를 때려왔다.
“건방진 놈!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뭣들 하나! 어서 잡지 못해!”
“예, 삼조장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이내 한 무리의 인마가 혁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데 혁리는 싸울 듯하더니 이내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최대한 산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역할은 막다 죽는 것이 아니라 도주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 조금의 시간만 마유조에게 주면 그만인 것이다.
“마적단 앞에서 도망이라? 웃기는 놈들이구나. 쫓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말은 이동을 시작했다. 마유조가 사라진 산을 향해 그렇게 한 떼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 떼의 인마가 인근의 산으로 향한 지 반 시진.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 눈뿐이었고, 세상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한데 그 하얀 눈 속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육 척을 넘어 칠 척에 육박하는 엄청난 키를 지닌 사내로 호피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아니, 호피로 만든 망토가 아니라 호피 자체를 통째로 둘러쓴 것이었다. 그러니 움직일 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호피를 쓴 사내는 한참 동안 서서 주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한순간 사내의 허리가 숙여지며 오른손이 땅으로 향했다. 그 손에 닿은 것은 이미 식어버린 모닥불의 흔적이었다.
스슷.
그 안에 손을 집어 넣은 채 사내는 무언가를 가늠하더니 이내 허리를 펴고는 눈을 돌렸다.
그의 눈이 향하는 방향은 바로 마을 뒤에 있는 산이었다.
어지러이 흐트러진 발자국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내는 왼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꺼내며 작게 말했다.
“월홍…….”
차분한 음색이 흐르는 순간 사내의 몸은 이미 바람이 되어 산으로 향했다. 달리는 그의 왼손엔 검은색의 강궁이 들려 있었다. 길이만 거의 육 척이 넘는 거대한 강궁이.
***
쉬이이잇.
내리는 눈 대신 섬뜩한 갈고리가 달린 줄이 허공을 수놓자 혁리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긴 호흡과 함께 신형을 뒤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웃기는구나, 그래도 나름 이 줄과 한평생을 살기로 한 사람에게 줄로 장난질이라니. 썩 꺼져라!”
파파파팡!
그저 손목만 조금 흔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작은 손동작이 일어나자 허공엔 황금색 기운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십여 개의 포승줄은 모두 다시 되튕겨 나갔다. 이들은 지금 두 사람에게 사냥이라도 하듯 고리를 만들어 던지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없는 아이를 가운데 둔 채 혁리와 마유조는 양쪽을 지키는 형국이었다.
숫자는 저들이 많기는 해도 무공 수준이 차이가 좀 있어 아직까지는 버틸 만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형도 겨울이긴 해도 곳곳에 나무가 있는 숲이라 저들도 말을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 유리하긴 했으나 그것이 이들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냥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답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의 차이가 현격하더라도 이렇게 멀리서 원거리 무기로 힘을 뺀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흐음… 설마하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유명한 금포 혁리인 줄 몰랐군. 진작 저 금 포승줄을 보고 알았어야 하는데. 큭큭.”
문득 혁리의 눈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까부터 유일하게 입을 열던 사내. 바로 그였다.
“게다가 뒤에 계신 분은 요즘 설산에서 잘나가신다는 홍사검 마유조가 아닌가. 이것참, 내가 오늘 눈 호강 하나는 아주 제대로 하는군.”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는 드러난 눈만 웃었다. 머리까지 검은 천으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솔직히 중원의 복색은 아니었다.
이건 색목인들의 복색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녕성에서 색목인을 보는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파리샤 국에서 오는 물목도 물목이지만 파란 눈의 사람들도 많이 오기에 당연히 눈에 익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들의 복색은 바람을 막기에 아주 좋아서 사실 거의 모든 마적들이 이런 꼴이긴 했다.
허리에 걸려 있는 한 쌍의 륜을 보며 혁리는 입을 열었다.
“알면 길이라도 비켜주지? 보다시피 우린 홀몸이 아니라서 말이야.”
“아아,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나도 그 애 녀석에게 볼일이 있으니.”
“응?”
사내의 말에 혁리는 미간을 좁혔다. 사내는 어느 틈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룬을 양손에 나눠 든 채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얌전히 죽는 게 나을 것이야. 신경 쓰이게 만들지 말고.”
키링!
백설 위에서 그의 륜이 울자 여기저기서 병기를 든 자들이 나타났다. 이제 지칠 만큼 지쳤다는 것을 알았는지 끝장을 내려 하는 것이다.
“자, 그럼…….”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왼손에 있는 륜 하나를 빠르게 던지며 소리쳤다.
“그만 죽으라고!”
기이이이잉―!
괴이한 소리와 함께 륜이 날아오자 혁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한 수로 볼 때 상대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 그냥 쉽게 처치할 상황이 아니었다.
가까이 오면 올수록 륜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건 도무지 일개 마적단이 가질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길!”
피리리링, 콰악!
혁리는 재빨리 포승줄을 잡아당기며 양손에 감았다. 아무래도 룬을 채찍 같은 것으로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혁리가 가진 금포는 그냥 포승줄이 아니었다.
얇기는 해도 가운데 철심이 들어가 있었기에 손에 칭칭 감기만 해도 수갑을 끼운 것 같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