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포권을 만들며 차분히 입을 열었고, 이후 불길 건너편의 반응을 기다렸다. 반응은 바로 나왔다.
“나는 월홍이에요. 나이는 열일곱 살. 이래 보여도 남자예요.”
스스로 월홍이라 칭한 아이다. 그는 지금껏 단야라는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아서 불을 쬐는 중이었다.
“열일곱?”
아무리 봐도 일곱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를 보며 혁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이라면 이상할 정도로 발육이 되지 않은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건만 월홍이란 아이는 전혀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엔 옆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여기 이 아저씬 단야. 보면 아시겠지만 단야 아저씨는 사냥꾼이에요. 우리 마을의 보군(保君)이기도 하구요.”
“…보군?”
단야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혁리는 보군이라는 말에 눈을 빛냈는데, 과연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였다.
보군이라는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제도였다. 마을 스스로가 호구책을 찾는 것과 비슷한데, 이곳 요녕성의 치안은 사실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적단이 날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만리장성 이북의 요녕성은 솔직히 중앙의 힘이 그리 크게 미치지 않는 곳이다.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군사력이 그만큼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보군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보군은 쉽게 말해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 무공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특히 각 마을의 사냥꾼들이 이런 역할을 많이 하고 있었다.
사냥꾼들은 하기 싫어도 어쨌든 무기를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명의 법에는 사실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농기구를 제외한 진짜 무기들은 관에서 엄격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무림문파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최소한의 무장이 용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마을의 수호자로 활동을 해왔고, 때로는 중원에서 죄를 짓고 온 무인들이 보군으로 활동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요녕성의 특성상 그냥 묵인하는 실정이었다.
관의 힘도 그리 크지 않은데 이들마저도 없다면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 요녕성에 있는 수많은 보군 중에서도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자는 없었다.
이 활솜씨라면 보군이 아니라 군이나 문파에 들어가도 될 정도였다.
“보군의 실력이 그 정도라니… 이 마 모는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문을 알 수 있겠소이까?”
마유조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설산에 몸을 담은 그였기에 여타의 문파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그런 그조차도 단야의 무공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단야를 보며 마유조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사문을 알려주기 싫다는 표현인 듯한데, 실제로 단야가 이리 나오더라도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사문이라는 것은 알려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반드시 알고자 한다면 오히려 실례가 될 수도 있다.
“그냥 활을 들고 쏘는 것일 뿐 무공 같은 것은 없소.”
“…아, 그렇소이까. 실례했소.”’
다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마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이 정도라도 족했다.
진짜 모르든 아니면 알면서 안 가르쳐 준 것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답을 해주었다는 것이고, 그 어투 또한 적의가 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냥꾼이고 어느 정도 무공을 알고 있다기에 아주 거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조금 전 마적단을 상대할 때를 기억해 보면 그 판단이 옳았다.
하나 기본적인 성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한번쯤 사귀어볼 만한 친구인 것이다.
“사정이 있으신 것이라니 더는 묻지 않겠소만, 하나 월홍아, 너에겐 좀 물어봐야 할 것 같구나.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려줄 수 없겠느냐?”
혁리는 빙긋 웃으며 월홍에게 말했다.
월홍은 지금 단야의 호피 안으로 쏙 들어가 얼굴만 내놓고 있었는데 혁리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씨익 웃는다.
스스로를 남자라고 밝힌 월홍이지만 정말 그 말은 곧이듣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무리 봐도 참 예쁜 여아의 얼굴이니 말이다.
“알려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그냥 다 죽었어요. 월홍이 아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
혁리의 눈이 굳어졌다. 아이의 반응. 무언가 이상했다.
단야를 만나기 전까지 그 불안해 보였던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저렇게 침착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더 신경 쓰였다. 마치 남의 말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빼놓고요. 묘묘와 향 노야… 월홍을 보고 웃던 두 사람…….”
월홍은 말하다 말고 짙은 미소를 띠었다.
지켜보던 혁리와 마유조는 점점 얼굴을 굳혔는데, 혹 아이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급변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이 험한 꼴을 봤으니 정신적인 면이 많이 부족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월홍을 안고 있는 단야의 표정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향 노인과 묘묘? 그들이 살아 있다고?”
낮긴 하지만 정말 부드러운 단야의 목소리였다. 월홍은 폭신한 호피가 좋은지 뺨을 비비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응. 말 탄 사람들, 많이 무서운 사람들이야.”
말로는 무섭다고 하지만 혁리는 오히려 월홍이 더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혁리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넌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그 무서운 자들이 넌 일부러 살려준 것이냐?”
그럴 리가 없었다. 월홍의 주변엔 시신이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마적패들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마적단은 죽었다. 그래서 같은 마적패들이 이곳에 온 것이다. 연락이 오지 않으니 살펴보러 왔을 확률이 높았다.
어째서 저들이 그리 소수가 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했다. 알아보는 것뿐이니 그리 많은 숫자가 필요없을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아… 나… 나는…….”
월홍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기억하려 하고 있었다. 작고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큰 눈을 껌벅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월홍은 바로 양 눈을 꽉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몰라. 월홍… 기억 안 나.”
“응?”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말을 안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황당한 상황이었다.
물론 월홍을 안고 있는 단야는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월홍… 졸려……. 잘래.”
“…….”
그것으로 끝이었다. 월홍은 정말 단야의 품에 안긴 채 그냥 눈을 감았다. 진짜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아이오이까?”
마유조의 목소리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도무지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아이의 전형적인 증세였다. 마음을 다친 아이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아니오. 그냥 이러다 깨어나면 다시 기억을 하곤 하오.”
단야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저 아이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나도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아이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더군. 그리고 봐서 알겠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한 듯하나 거짓은 없는 것 같아. 아마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진짜일 것이네.”
“음…….”
혁리까지도 이렇게 이야기하자 마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한번 살펴보면 될 터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진맥을 해봐도 되겠소? 의원은 아니지만 한번 아이를 보고 싶소이다.”
말과 함께 그는 모닥불 건너로 왔고, 단야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월홍의 작은 손을 꺼내었다. 얼마든지 진맥하라는 뜻이다.
“그럼.”
마유조는 당장에 월홍의 손을 잡았고, 바로 진맥을 했다. 물론 그가 의술에 정통하였기에 월홍을 진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월홍을 진맥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월홍을 살리기 위해 맥문에 내력을 불어넣었을 때 뭔가 살짝 이상한 감을 느꼈었다. 그 이물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아이의 정신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은 그 기운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
“…….”
한데 이상했다. 마유조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며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아이에게서 이상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아주 보통 아이와 똑같았던 것이다.
“막기도 하고 때론 당기기도 하는 기운을 찾기 위함이오?”
“…알고 계셨소?”
묵직하게 들려오는 단야의 목소리에 마유조는 되물었다. 확실히 내력으로 아이의 몸을 데울 때 그런 것을 느끼긴 했었다.
단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끔 이 아이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이오. 그러나 나타나는 순간은 극히 짧고 또 언제 나타난다는 것조차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있는 실정이오.”
“으음…….”
사정이 이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이에 관한 일은 잠시 접어두어야 할 듯하니 마유조는 신형을 돌렸다.
“하면 단 형은 이제 어찌하려 하오? 그 실종되었다는 두 사람을 찾아갈 것인지……?”
가만히 있던 혁리가 단야에게 물었다. 단야는 잠시 눈을 돌려 월홍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생각이오.”
짧지만 확고한 의사 표현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의무라 여길 수도 있었다. 의무라는 건 아무래도 단야가 이 마을의 보군이니 말이다.
일견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나 사실 그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마을이 전멸할 때 이미 보군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피로 이어진 혈연관계도 아니고 동문 관계로 이루어진 문파도 아니었다.
그들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저 실력이면 조용히 다른 마을의 보군을 해주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따진다만 눈앞에 있는 이 단야라는 사람은 일반적인 보군과는 좀 다른 경우였다.
“하나 어느 마적단인 줄 알고 찾겠다는 것인지? 나와 유조 저 친구가 얼떨결에 싸우긴 했어도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소. 한데…….”
“마을에 이게 떨어져 있었소.”
피이이이잉!
단야의 엄지손가락이 튕겨지자 허공에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소리로 들어보아 작은 금속성의 물체인데 소리 하나만큼은 아주 독특한 물건이었다.
턱.
혁리는 엉겁결에 날아오는 물체를 받아 들었다.
역시나 짐작대로 금속이었고, 크기는 일반 암기보다도 작았다. 그는 얼른 손바닥을 펴 날아온 물체를 보았는데, 그건 작은 동전이었다.
회오리치는 용 문양이 한쪽에 양각되어 있었고, 눈 부위와 여의주 부분에 기이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이한 소리는 이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동전은 돈의 역할을 하진 않는다. 하나 이 동전 하나면 요녕성에선 무서운 것이 없었다.
바로 마적패들인 풍마단(風馬團)을 상징하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풍전(風錢)이라니……. 설마 풍마단 놈들이었단 말인가.”
다른 마적단이 일을 벌인 후에 풍전을 던져 넣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희박한 확률이다.
만일 그런 짓을 했다간 풍마단에게 죽을 때까지 쫓겨 다닐 터였다. 잠시 화를 모면하자고 꾀부리다 그 꾀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진짜 풍마단이 이곳에 행차를 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나 그리 보기에도 의문점은 남는다. 그가 아는 풍마단이 이리 작은 고을을 넘보았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원래 풍마단은 도적패가 아니라 상인 무리였다. 원나라 시절 서역과 중원을 잇는 거상이 바로 풍마단이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화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풍마단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목을 호위하는 무사들 역시 일급 이상으로 충원하는 것이 전통처럼 굳어졌다.
한데 원이 망하고 명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소위 줄을 잘못 섰고, 그것으로 인해 상인 집단은 철저하게 분해되었다.
그리고 변질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풍마단이었다.
돈과 무력이 같이 있는 집단. 그러니 풍마단을 그저 마냥 포악한 마적단으로 치부하기에는 솔직히 무리였다.
이들은 이미 관군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무리였던 것이다.
“풍마단인 것을 알면서도 지금 간다는 것이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
혁리의 목소리에 단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이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절대 불가능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
“게다가 풍마단의 본거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늘 어디로 간단 말이오? 혹 단 형은 알고 있는 것이오이까?”
혁리는 계속 물어보았다. 물론 시원한 대답을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무모하다는 것만 알려주기 위함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예상과 달랐다. 단야의 입술이 열린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서벽(西碧)으로 가면 길이 생길 것이오.”
“서벽?”
뜻밖의 대답에 혁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벽은 이곳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아니, 이 요녕성을 통틀어 성도를 빼고 나면 그나마 봐줄 만한 곳이 서벽이었다.
산해관과 성도를 연결하는 직선거리에 놓인 것이 바로 서벽이다.
즉, 쉴 만한 곳이 단 한 군데밖에 없으니 번성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그곳에 방수라도 있는 것이오? 어째서 서벽에 가면 알게 된다는 것이오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