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 순간, 옆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봉삼이란 녀석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제길, 나이 처먹고 점소이 하면 누가 자동으로 돈 준대? 저리 비켜, 늙다리. 이런 일도 처리 못하는 게 무슨 선배라고.”
“엇!”
내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았는지 봉구라는 녀석이 내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사냥꾼 같은 자 앞에 떡하니 서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사냥꾼 나부랭이 같은데, 짐승 가죽 필요할 일 없으니 썩 꺼져, 이 자식아! 꼴에 여우 가죽에 물감을 먹여 다니다니! 큭큭!”
봉구는 이곳에 오기 전에 건달패였다. 덩치도 있고 힘깨나 쓰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앞에 서 있는 사냥꾼의 키나 덩치가 훨씬 크단 말이다.
아마도 망토처럼 두른 호피가 가짜인 줄 아는 듯싶었는데 저 호피는 진짜였다. 나는 진짜 호피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호피 냄새는 모조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불안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봉삼은 삐딱한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 물건들은 조금 괜찮은데? 이 아이와 여자 처분하러 온 거냐? 오호, 사내 좀 홀리겠는데?”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여인과 아이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자 그 여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너 지금 나와 이 아이를 이야기한 거냐?”
다분히 위협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지만 여인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고, 그 순간 난 결심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로 말이다.
“이런 등신 같은 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확 발가벗겨서 육봉 맛을 좀 봐야 정신을… 꾸억!”
우둑!
그저 여인이 오른손으로 봉구의 양 볼을 잡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턱을 붙잡았는데 저런 소리가 난다면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기분 더러운데 아주 노래를 하는구나, 죽여달라고. 앙!”
퍼어억!
“크악!”
그녀의 오른발이 봉구의 사타구니를 걷어차자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떠 올랐고, 입과 사타구니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 남자 구실 하기는 힘들 터였다.
“야, 단야! 당신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저 꼴이 날 거야! 알았어?”
그녀는 이번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냥꾼에게 소리쳤다.
이미 그녀는 봉구의 목숨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했는데, 그는 지금 저 구석에서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나에게 다가온 사냥꾼의 목소리였다.
“말머리꾼.”
“예?”
생각보다 맑은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그의 말은 비록 낮았지만 똑똑히 들려왔다.
“말머리꾼들은 어디 있나?”
“…….”
최악이었다. 역시 이들은 즐기러 온 자들이 아닌 것이다. 역시 난 사람 볼 줄을 안다.
“말머리꾼?”
마유조는 중얼거렸다. 말머리꾼이라면 말 앞잡이를 말하는 것. 그건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 마구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닐세, 유조. 단 형이 말하는 말머리꾼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가 아닐세. 그건 은어(隱語)야.”
“은어?”
마유조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혁리에게 눈을 돌렸는데, 그건 혁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혁리는 포쾌이니 이쪽에 관해 조금 아는 것인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마적단이라 하면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마을이나 약탈하면서 살아가는 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아. 사실 마적들도 상당히 여기저기 신경 써서 약탈을 하지.”
“마적단이 신경을 쓴다고요?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자 혁리는 씨익 웃었다. 당연한 노릇이다.
마적단을 조사할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대강 정리를 해서 알려주었다.
마적단이 하나뿐이라면 저들은 필요가 없을 터였다.
하나 이곳 요녕성만 해도 마적단은 수십여 개가 넘는다. 그들 모두가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마을을 약탈하는 것이다.
한데 정말 재수없게도 다른 마적단이 턴 곳을 털게 된다면 어떨까? 아니, 진짜 재수없게도 관군이 이동하는 곳에서 마적단이 활동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인데, 말머리꾼은 바로 이러한 일들을 처리한다.
정확히는 마적단이 이동하고 약탈할 마을을 미리 알아서 보고하는 것이다. 즉, 마적단을 위한 정찰을 해주는 놈들인 것이다.
“세상에 그런 놈들도 있나요? 정말 살아 있어서는 안 될 말종들이군요!”
양소은은 양 눈썹을 치켜뜨며 소리쳤고, 은연중에 마유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가는 직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악질로 통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요절을 내야 할 것이다.
마적보다도 이놈들이 더 악랄한 놈들이라는 것은 바로 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그래, 말종들이지. 그리고 그놈들은 일이 성공하면 주로 이런 곳에서 진을 치지. 조용해질 때까지 이곳에서 분탕질이나 치는 거야.”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군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모안이 말하자 혁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군데 보면서 다닌 것은 이들이 있을 만한 곳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분명 며칠 전부터 틀어박힌 놈들이기에 기녀들이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하는 곳일 터였다. 호객 행위를 안 하면서도 문을 연 곳을 찾았던 것이다.
“말했잖아요.”
갑작스레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곳엔 월홍이 양소은의 바지춤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단 아저씨가 하는 행동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
확실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말머리꾼이라뇨?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점소이는 말을 돌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마에 땀이 솟아나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거짓말이다.
나이로 봤을 때 단야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단야는 고개를 살짝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머리꾼, 어디 있나?”
“…….”
간단히 점소이의 말을 무시한 채 단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점소이의 이마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이 점점 더 굵어질 그때였다.
“말머리꾼을 찾으시면 마구간으로 모셔야지 왜 아직 여기 세워두실까? 이봐, 육삼이. 너 이 새끼, 나이 처먹고 아직도 세상 이치를 몰라?”
“아, 진 형님. 그게… 저…….”
어느새 육삼의 뒤편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오자 육삼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놈들이었다.
이런 일에 필히 끼어 있는 동네 주먹패들, 양아치 놈들이 나서준 것인데 평소라면 돈이나 뜯으러 오는 아주 짜증나는 놈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정말 고마움이 절로 밀려 올라왔다.
“어이고, 이것참, 봉구 녀석 좀 보게나. 벌써 멋지게 한탕 해주셨네? 이거 이젠 조용히 끝낼 수가 없겠구만. 야! 가서 애들 불러와!”
“예, 형님!”
제일 앞에서 건들거리는 사내의 말에 몇몇 건달이 쏜살같이 어디론가 움직였다.
아마도 일각 안에 이 근처에 있는 모든 건달이 이곳으로 모일 터였다.
아무리 무공을 하는 사람이지만 숫자가 많으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단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적어도 팔 하나쯤은 놔두고 가야 할 테니 어디 한번 죽어봐, 이 개자식.”
“야, 육삼! 너 술 가지고 오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거기서 노닥거려! 앙!”
어디선가 뾰족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이층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곳엔 한 여인이 있었다. 무얼 하다 왔는지 모르나 앞섶을 반쯤 풀어헤친 채 표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쁘기는 하지만 그리 마음이 가는 유형은 아니었다.
“아유, 진짜 꼭 일일이 이 초국이 해야 되는 거냐? 버러지 같은 것들이 진짜.”
“초국아, 내려오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지금 상황이…….”
“멍청한 자식이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지금 내 오라버니하고 친구들이 위에서 쉬고 계신 거 몰라!”
여인은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와 눈을 흘겼는데 진 형님이라는 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등신 같은 게 좀 조용히 처리하라니까 하는 짓 하고는. 아휴!”
“뭐? 이년이 정말!”
“어쭈, 손댈 거냐? 응? 오라버니 위에 계신데?”
“…아나, 진짜!”
건달은 성질이 나는지 큰 소리를 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인을 건드리진 않았다.
여인은 피식 웃으며 이번엔 단야의 앞으로 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이봐요, 손님. 뭐 꽤 멋지긴 하지만 날이 안 좋아. 요즘 우리 집은 오라버니와 친구들이 같이… 무슨… 꺄아아아악!”
“엇!”
“무슨 짓입니까, 단 형!”
마유조와 모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야가 한순간 여인의 반쯤 풀어진 가슴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같이 왔던 일행, 특히 양소은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다. 물론 같은 일행이 이 정도이니 반대편에서 보는 자들은 더 격한 반응이었다.
“이 개자식이 진짜 죽으려고.”
“야, 그냥 째버려!”
여기저기서 살벌한 소리와 함께 단야에게 덤벼들려는 순간, 그들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품속에 넣었던 손을 코로 가져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진정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었다.
“이 변태 같은 자식! 너 같은 건 저놈들이 아니라 내가 죽여주마! 어디 한 번 제대로… 뭐야!”
얼굴이 붉어진 채 앞으로 나가려던 양소은은 멈칫했다. 월홍이 그녀의 다리춤을 꼬옥 잡고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월홍아, 지금은 마냥 저놈을 두둔할 때가 아니야. 지금은… 응?”
양소은은 월홍을 타이르다가 뭔가 월홍의 눈앞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건 단야의 기다란 손이었다.
꽉 쥐어진 주먹이 풀리자 그 안에 무언가 잡힌 것이 보였다. 월홍은 단야의 주먹 안에 있던 그것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향낭?”
가만히 잡기만 했는데도 순간 기이한 내음이 허공에 퍼지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향낭이었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월홍은 코로 가져갔다.
“무슨 짓이야, 월홍? 그런 걸 왜 코에……?”
월홍의 손에서 향낭을 빼앗으려던 양소은은 순간 당황했다. 월홍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이다.
월홍은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훌쩍거리며 단야에게 입을 열었다.
“흐아아앙! 오씨 아줌마! 흐앙!”
단야는 아무런 말 없이 월홍에게 다가가 그의 작은 어깨를 감싸 쥐었다. 월홍은 단야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는 잠시 흐느꼈다.
“향낭이라고 다 같은 향낭이 아니지.”
돌연한 상황에 사람들 모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단야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번엔 모든 사람이 단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짐승도 각기 고유의 향을 가지고 있다. 사향 주머니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서 개중엔 정말 좋은 내음을 가진 것이 있지.”
툭.
단야는 왼손을 한 번 공기 중에 털었다. 마치 관절을 풀 듯 그렇게 말이다.
“감숙성에서 오신 오씨 아주머니, 그분께 드렸었다. 바람피우는 아저씨를 잡겠다고 말이야. 대신 난 귀한 보리쌀을 얻었다.”
“…….”
혁리는 눈을 굳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젠 알 것 같았다. 단야가 왜 그리 무례한 짓을 하는지 말이다.
그는 증거를 찾은 셈이다. 그 자신이 오씨 아주머니란 사람에게 준 향냥. 그것을 이곳에서 찾았다.
그건 어떤 관계로든 그 마을을 습격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층에 있는 자들이 말머리꾼이란 뜻이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월홍아.”
스으으읏.
단야의 왼손이 움직이자 어느새 그의 손엔 거대한 활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만… 눈을 감아라.”
화아아악!
“…….”
단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두 다 가슴을 관통하는 기이한 울림을 느꼈던 것이다.
무언가 폐부를 콰악 찌르면서 지나간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이었는데, 정작 놀란 것은 홍루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단야와 같이 온 사람들. 그들이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왼 다리에 월홍을 매단 채 내력을 끌어올린 단야의 얼굴은 장포로 얼굴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울 정도로 차가운 악마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은 그 귀면과 함께 단야의 몸에서는 작은 일렁임이 시작되었다.
두 눈을 좁히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일렁임이.
“잠시… 부탁하오.”
월홍의 손이 보였다. 단야의 목소리에 양소은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단야의 신형은 돌려지고 있었다.
***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악다구니를 쓰던 사내들과 계집은 멍한 표정으로 단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단야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형, 이게 단야란 사람의 진짜 실력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