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소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월홍을 꽉 끌어안았는데, 그 정도로 의외의 기운이었던 것이다.
“과연 혼자 몸으로 마적단과 싸우겠다는 말을 할 정도는 되는군요. 기운으로 봤을 때 제 아래가 아닌 듯한데요.”
조금은 의외라 생각했는지 모안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는 단야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왼손에 들린 대궁을 보는 듯싶었다.
“흐음… 그건 나도 모르겠는걸.”
혁리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입을 열자 양소은과 모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많은 경우를 상상하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행사로 그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 나와 혁리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아직까지 저 단야라는 사람의 무공은 모르겠구나. 하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
“우리가 본 것은 저 정도가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
“…….”
양소은과 모안은 살짝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 신형을 돌렸다. 그들의 눈은 다시 단야의 뒷모습을 향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젠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 마침 이층에서 그 실력을 알려줄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술 가져오라고 한 지 좀 되는 것 같은데? 뭐 하는 거야?”
이층 한구석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상의는 아예 벗어버린 채 이층 난간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오라버니, 글쎄 저 자식이 오라버니가 준 향낭을 뺏어갔어. 그 향낭!”
초국이라 불리는 여인은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쪼를 이층으로 올라가 나불대기 시작했다. 흡사 요조숙녀라도 된 듯 그녀는 앞섶을 여미며 교태를 부렸던 것이다.
“뭐? 향낭? 어떤 거?”
한데 사내는 뭘 주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는 듯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은 다시금 그의 팔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이틀 전에 오라버니가 준 거요! 참 좋은 향이 나온다며 차고 있으라던 거요! 그걸 저 무식한 놈이 가져갔다니까요!”
“아, 그거?”
그제야 기억나는 듯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떼었다. 그리고는 흘끔 단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어이, 죽고 싶지 않으면 얼른 내놓지?”
“…….”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는 그저 귀찮다는 듯 단야를 향해 입을 열었지만 단야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후, 증말 짜증나게. 야, 이 개자식아! 내 말 안 들려?”
잠시의 기다림 이후에 들려온 것은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그러자 그 소리에 이끌렸는지 이층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간만에 좀 놀까 했더니 뭐가 이리 시끄러워!”
“빌어먹을! 누구야, 사람 짜증나게 하는 놈이?”
이층 문 여기저기가 벌컥벌컥 열리더니 반라의 사내들이 나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리친 자의 일행이었다.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인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정말 수백여 명은 죽이고도 남을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이층 난간 위에 손을 얹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이!
“얼씨구?”
방금 전까지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던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단야의 활에 한 대의 화살이 걸린 것을 보았던 것이다.
“나 참, 나한테 쏘시려고? 이야, 빌어먹을! 오늘 아주 짜증 제대로네?”
“큭큭, 도삼(刀三). 네 상판대기가 그렇지, 뭐. 아주 개나 소나 다 기어오르는 상판이야. 큭큭큭.”
“저리 안 꺼져, 이 개자식아! 아, 짜증 진짜!”
시링.
도삼이라 불린 사내는 옆 사람이 들고 온 박도를 뺏어 들고는 계단 위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단야를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 이 새끼, 지금 시위 안 놓으면 죽을 줄 알아.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연장질이야! 내가 그리 만만한 사람인 줄 알아!”
두 사람 사이는 약 사 장. 꽤나 큰 유곽이기에 가능한 거리였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라면 화살 하나 정도 피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땅이나 파면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무공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특히 자신처럼 사선을 밥 먹듯이 넘나드는 사람은 더욱더 말이다.
화살을 쏜다고 다 맞는 것은 아니다. 날아오는 방향을 감으로 잡은 채 움직이면 그만이었고, 그럼 백이면 백 다 피할 수 있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피할 수 없다고 쳐도 살짝 몸을 돌리면 그뿐이었다. 어깨나 팔이 꿰뚫린다고 해도 죽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 상태로 가 쳐 죽이면 된다. 실제로 여태껏 그렇게 싸워왔으니 확실한 방법이란 증명도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말을 귓등으로 알아듣나. 얼마…….”
피이이이잉! 카칵!
“…….”
도삼은 멍한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주 작은 소리, 귓속을 살짝 울리는 이명(耳鳴)이 들려왔었다. 그뿐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특히 언제나 적을 향해 두어야 할 시선이 이상하게 틀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풍경이다 싶었더니 그건 바로 붉은 홍등에 물든 천장이었다. 물론 그 천장은 그의 의지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어 느껴지는 감각. 미간 가운데 아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추측컨대 뭔가가 그의 미간에 박혔고, 그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젖혀졌을 터다.
“제… 기랄! 안 보… 여…….”
피하기는커녕 보이지도 않는 화살. 태어나서 이런 화살은 처음 맞아봤다. 아니, 그게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이런 화살을 맞았다면 이미 이 자리에 없을 테니.
급작스럽게 그는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얼굴을 덮는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이승에서 느끼는 마지막 감각이었다.
쿠우우웅!
“꺄아아아악!”
도삼의 몸은 통나무처럼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추국이라는 여인의 다급한 비명성만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온 사방에 알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단야와 말머리꾼 간의 싸움, 그 시작을 알리는 효시와도 같았다.
역시나 부드러웠다. 활을 쏘는 단야의 동작엔 군더더기란 없었다. 마음을 먹었으면 목표를 조준하고 바로 시위를 당겨 쏘는 것, 딱 그것이었다.
물론 자신과 혁리, 월홍을 구해주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때 봤던 단야의 모습은 소리없는 지옥의 사자였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은 양반이다. 활을 쏘는 것이 훤히 보이는 데다 시위를 당기는 소리까지 나니 말이다.
문득 그의 눈에 단야의 오른손이 보였다. 허리춤으로 빠르게 움직이더니 한꺼번에 세 개의 화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마도 저 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인 듯했다. 이층의 난간 위에는 지금 인상을 벅벅 쓴 채 무기를 들고 달려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야 당연히 단야 때문이다.
어떻게 싸울는지 모르지만 단야는 주저함없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세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시위에 건 게 아니고 하나는 걸고 두 개는 약지와 중지로 늘어뜨려 잘 잡은 상태였다.
피이잉, 터어어엉!
“크아아악!”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통 이렇게 가까운 경우 화살은 그리 큰 위력을 내지 못한다.
화살은 멀리서 날아오는 가속까지 같이 밀고 들어왔을 때가 두려운 법이다.
한데 단야의 화살은 조금 달랐다. 화살에 맞자마자 마치 튕기듯 사내의 몸은 뒤로 날아갔고, 정확히 가슴을 맞춘 화살은 사내의 몸을 천장에 고정시켰다.
피이잉, 터어엉!
두 번째 화살은 첫 번째 화살이 박히기도 전에 허공에 날았다.
막 이층에서 뛰어내리던 사내의 미간에 정확히 박히더니 그의 몸을 이층 난간에 매달아 버렸다.
세 번째 화살을 막 시위에 먹이는 순간 마유조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온 감각을 끌어올렸다.
피이잉, 터어엉!
“칵!”
또다시 귓가에 섬뜩한 소리가 들리자 마유조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서서히 눈을 뜨자 또 한 번 끔찍한 광경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목이 뚫린 사내가 계단에 박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광경이나 단야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위로 올라가려는 듯했다.
아래층에 있던 사람 모두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건 바라보기도 힘든 잔혹함 때문이었다.
하나 마유조가 보내는 시선은 비단 그 잔혹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눈동자를 깊숙이 침잠시키며 한 가지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건 단야가 날린 세 발의 화살 중 마지막 화살 때문이었다.
두 눈을 감고 느꼈던 마지막 화살. 마유조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화살이 허공에 날아가는 느낌조차 없었던 것이다.
후두두두두둑!
천장과 이층 난간, 그리고 계단 위에서는 피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푸줏간의 그것처럼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끼이이, 끼익!
단야는 한 발 한 발 계단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가 올라설 때마다 적은 차분하게 그 숫자를 늘려갔다.
이층 방 안에 처박혀 있던 자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진한 피 내음을 맡는 순간 반사적으로 병기를 들고 뛰어나왔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터였다. 그들을 상황을 한번 훑어보곤 바로 단야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뒤로 가서 치라는 둥 소리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만큼 실전을 많이 겪었다는 반증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단야의 활을 본 순간 바로 거리를 좁혔다.
활이라는 것은 근거리가 아니라 원거리 무기. 설마 이 활을 칼싸움처럼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궁수들은 언제나 일정거리를 벌리려는 습성이 있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사람들. 그래서 단야의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든 것이다. 제대로 사거리를 준다면 방패도 뚫어버리니 말이다.
그러니 단야가 할 일은 뒤로 피하든지, 아니면 옆으로 빠르게 피하며 화살을 날려야 했다. 그렇게 한두 사람씩 차례로 줄여야 하나 단야의 움직임은 상식을 벗어났다.
터어엉!
정반대로 오른발에 힘을 준 채 앞으로 벼락처럼 달려 올라간 것이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일 장여의 공간이 확 줄어들었다.
신법 역시 보통 이상임을 나타낸 것이다.
당연히 위에서 덮치던 사내들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수중의 병기를 날렸다. 순간적으로 단야의 앞에 박도 세 자루가 허공에 번뜩였다.
스슷.
순간 단야의 신형이 한쪽으로 반 족장 정도 이동하자 날아오던 박도 세 자루가 하나의 연장선 안에 놓여졌다.
철저히 일대일의 승부를 하려는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일 앞에 있던 사내는 인정사정없이 박도를 내리그었다. 거리는 약 반 장. 이 정도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피이이잇.
“…….”
하나 그 생각은 이내 바뀌어야 했다. 박도는 하릴없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단야가 어깨를 틀며 살짝 피했던 것이다.
사내는 이를 악물며 손을 뒤틀었다. 그리고는 단야의 허리를 베려 했지만 이미 그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냥 빠져나간 것이 아니었다. 단야가 빠져나간 순간 그의 목에선 피분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파아아앗!
그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단야의 신형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자루의 박도가 같이 내려왔지만 단야는 몸을 움직이며 예의 같은 방법을 쓰며 두 사람 사이를 훑었다.
파아앗!
비명 소리조차 없었다. 목을 잘린 두 사람은 무너지듯 쓰러졌고, 단야의 눈앞에 새로운 사람이 보였다.
꽤나 큰 덩치에다 벌거벗은 몸 여기저기 기이한 그림을 새겨 넣은 자였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구환도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제일 마지막 계단 위. 마치 유부 앞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인상을 확 쓴 채 구환도를 치켜들었다.
더 이상은 못 간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단야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허리를 빠르게 틀며 오른손을 휘두르자 구환도가 옆으로 튕겨졌다.
따아아앙!
튕겨난 구환도를 다시 잡아당기기도 전에 단야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오른쪽 옆구리를 스치듯이 나아갔다.
터엉!
오른발을 결국 제일 위 계단에 올려놓은 채 그는 이층으로 올라섰다. 올라오자마자 놓여진 오른발을 축으로 빠르게 허리를 회전했다.
쉬이이잇, 빠각!
단야의 왼발이 사내의 오른쪽 뺨을 후려쳤다. 물론 앞이 아니라 뒤에서 길게 쳐낸 일격에 거구였던 사내의 몸이 허공 가득 떠올랐다.
그리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층에서 계단을 통하지 않고 바로 일층으로 처박혔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퍼어어억!
거구의 사내가 일층 바닥에 엎어지는 순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미 사내의 몸엔 왼쪽 허벅지부터 나선형으로 몸을 돌아 오른쪽 목 어림까지 자상이 크게 나 있었던 것이다.
“그륵…….”
피거품을 물며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자상만이 상처가 아니었다. 뒷발에 걷어차인 사내의 턱이 이미 부서졌던 것이다.
단야는 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전방을 주시했는데, 그곳엔 일단의 사람들이 그를 부채꼴로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방금 나가떨어진 자처럼 벌거숭이 몸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그들은 단야의 행사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함부로 덤비지 않은 채 두 눈만 빛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눈이 향하는 곳은 단야의 오른손. 그의 오른손엔 기형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일자로 된 도신이 아니라 일자로 나오다가 툭 꺾인 모양으로 된 도신이었다.
도신의 앞쪽 면은 여타의 도와는 달리 상당히 크고 두꺼웠다. 길이는 약 이 척이 조금 넘어 보였는데 단검치고는 길고 장검치고는 짧은 도였다.
하나 그 도 한 자루로 네 명을 처치한 것이니 절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한 호흡도 채 크게 쉬기도 전에 네 명을 죽인다는 것은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뜻한다.
상황은 갑작스럽게 대치 상황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한데 순간 저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오자 단야의 눈이 좁혀졌다.
“우리도 독하지만 네놈도 상당하군. 뭐 하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