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가 겉옷을 걸치고 우산을 집어든 후 집을 나섰다. 설화가 뒤집어 쓴 후드티의 모자 사이로 노란 ‘프리지아’라는 이름의 꽃이 삐져 나와있었다. 그 꽃은 설화의 머리위에 피어있었다.
“투둑투둑,’ 설화의 우산 위로 빗물이 떨어지면서 그런 소리가 났다. ‘첨벙첨벙,’ 설화가 고인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니 그런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 어떤 소리도 설화에게 신경 쓰여지지 않았다. 설화는 그저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는 비오는 거리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몇분 뒤, 설화가 우산을 접고 털어낸 후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둘러보던 설화는 과자 몇개를 바구니에 담고 음료수를 고르고있었다. 그때 설화의 시선속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 아니… ‘자신을 며칠전부터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설화가 옆을 한 번 둘러본 후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몇일전부터 계속 신경 쓰였기는 했지만,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설화를 쳐다보고 있던 그 누군가’가 ‘움찔’하고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설화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그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저를 쳐다보는 건 문제 없지만, 얼굴도 본적없는 누군가가 쳐다보는 건 조금 불쾌하네요.”
“미...미….미안해요…”
‘그 누군가’가 안절부절 못 하면서 말을 더듬다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설화는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하더니 음료수를 두개를 집어든 후 계산대로 향했다.
해가 산자락에 닿을 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설화는 집이 아닌 공원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며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있던 ‘아까 편의점에서의 그 누군가’가 설화의 눈의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진짜 있었네요.”
설화가 음료수 하나를 봉투에서 꺼내서 ‘그 누군가’에게 건넸다.
“그… 어… 이… 이걸 왜 나한테…? 그보다.. 왜 여기에?”
당황한듯이 말을 더듬는 ‘이 누군가’가 음료수를 받아들고 물어보았다.
“...음료수는 그냥 남았길래 준것뿐이고, 여기에 온 이유는 그냥 지나가다가 당신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보다 아까 했던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한것 같은데, 누구신데 저를 계속 쳐다보는거죠?”
설화의 귓가에 핀 프리지아라는 노란색의 꽃이 살랑였다.
“그러니까…. 그….”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잠시 그쳤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설화는 한숨을 내쉰 후 우산을 펴 ‘누군가’에게 씌워 주었다.
“최대한 빨리 말해주세요. 비도 내리니까요.”
“......알겠어”
“네...”
“어.. 그래...말할게... 나는… 나는… 너를 좋아해!”
“예…?”
‘투둑투둑’ 설화의 우산 위로 빗물이 떨어지면서 그런 소리가 났다. ‘두근두근’ ‘누군가’의 가슴이 뛰면서 그런 소리가 났다. 방금전만해도 침착하고 차분했던 설화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제.. 제가 물어본건 그런게 아니라….”
“몇일전부터 너를 쳐다보았던 이유가….”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다. 우산이 작아서 설화도 ‘누군가’도 계속 비를 맞고 있었만,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본채 그저 비를 맞고있었다.
“너를 좋아해서 그랬어”
“아니... 저희 본 적도 없지 않나요? 얘기한적도 없는것 같은데..요?”
설화가 ‘대화한 기억도, 만난 기억도 없는 누군가’를 보며 물었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부끄럽긴한데... 첫눈에 반했어. 학교에서 하교하는 길에 네가 길거리에 핀 꽃을 보고있는 모습을 봤었는데 정말로 예뻐서.”
“그렇다고 해도……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모르는 건 앞으로 알아가면 된다고 나는 생각해.”
“저…. 그렇게 성격 좋지 않은데요?”
“그… 그래도 괜찮아.”
“그런가요…?”
‘설화와 대화를 하고있는 누군가’가 용기가 부족해졌는지 말을 다시 더듬으며 뺨을 붉히고 있었다. 둘 사이에 다시 한번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너와 사귀고 싶어.”
설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설화를 좋아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와 선생님 주변사람들, 심지어 부모 마저도 설화가 병에 걸린것 때문에 설화를 귀찮아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설화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유치원을 다닐때도 초등학교를 다닐때도 중학교를 다닐때도 따돌림당하거나 괴롭힘 당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스스로 벽을 치고 스스로를 감옥속에 가두어둔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설화를 좋아해준 사람은 없었다. 모두 설화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을 뿐이었다.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전염병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설화를 멀리했다.
그랬던 그녀에게 지금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좋아하고 있다고,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은 고백이었지만 설화에게는 충분히 전해졌다. 말로는 표현 못하고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설화였지만 설화는 그에게 아주 큰 고마움을 느꼈다.
“잠깐… 휴대폰 좀… 줘보세요.”
“응.. 휴대폰? 여기 있어.”
설화가 서현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서현에 휴대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여기 제 전화번호에요. 지금은 늦었으니까 집에 돌아가서 연락 드릴게요.”
“어...응, 이 전화번호로 문자 보내 놓을게.”
비가 그치자 ‘누군가’는 인사를 하고 뛰어갔다. ‘누군가’가 떠나자 설화는 얼굴을 붉히며 주저앉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설화의 눈밑에서 여러 물방울이 뚝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것이 눈물이였는지 빗물이었는지는 설화조차 알지 못했다.
비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공원을 비추었다. 설화도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설화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면서도 두근거리고 붕뜬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 설화의 귓가에 핀 노란 프리지아가 달빛을 받아 정말로 예뻤다.
집에 도착한 설화는 바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뭐라고 보내야 될까요...…?”
여러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설화는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군가’가 한 고백은 거절하기 힘들만큼 솔직했고, 설화도 그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겨서 문자에 쓸말은 사귀자는 말밖에 없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근거리는 감정때문에 쉽게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을때, ‘누군가’로부터 문자가 왔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자기소개를 못했네. 나는 2학년 이서현이야]
설화는 일어나서 답장을 보냈다.
[제 이름은 조설화고 1학년이에요.]
설화는 마치 아무것도 없고, 빛조차 없는 공간에 ‘서현’과 단 둘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분정도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의 고백은 받아줄게요]
답장을 보낸후 설화는 다시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1분뒤 다시 알림이 떴다
[진짜 진짜로 고마워...]
[너무 들뜨지는 말아주세요. 부끄러우니까요...]
[그래 그러면 내일 학교에서 보자 잘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
설화는 선배라는 말을 썼다가 지웠다가 하느라 5분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다. 설화는 아직도 두근거림의 여운이 남아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아 빗속에서 보았던 서현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고는 이것저것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예전처럼 슬프고 외롭지는 않다고 설화는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릴때쯤 설화가 잠에서 깨어났다.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설화는 휴대폰을 키고 서현과의 문자를 확인하며 어제의 일을 확인한다. “서현…… 선배…..?”
설화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설화의 얼굴은 붉었고, 그 붉은 얼굴만큼 붉은 장미가 귓가에 피어있었다. 설화는 물을 튼채로 계속 거울을 보았다. 계속 거울을 보면서 계속 생각을 했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연애를 할수있을지’ ‘이게 다 꿈인것은 아닐지’ ‘혹시 선배가 농담으로 고백을 한 것은 아닐지’ ‘이렇게 행복해져도 괜찮은걸지’ 온갖 걱정과 망상이 설화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불행밖에 없던 인생에 갑자기 뜬금없게 행복이라는 빛이 보이니 그게 거짓처럼 보일수 밖에없는 것이다.
그렇게 침울해진 설화는 등교길을 걸었다. 날씨가 화창했지만, 꽃들도 활짝 피어있었지만 그저 바보같이 축쳐져있었다. ‘터벅터벅’ 설화가 걸으며 그런 소리가났다. ‘타박타박’ 누군가의 발소리가 설화의 뒤에서 들렸다. 인기척을 느낀 설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화들짝 놀라 전봇대 뒤로 어설프게 숨은 서현이 있었다.
“뭐 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게… 아까부터 말 걸어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아 그보다 아까부터 보니까 뭔가 우울해 보이던데 괜찮은거야?”
설화는 뭔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아까까지만해도 우울한 기분이였는데 갑자기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설화는 표정을 가리려고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서현이 설화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본다.
“웃는 얼굴 예……”
“......”
서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설화와 서현 두사람 모두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순간에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어서… 가요. 지각하겠어요.”
“그...그래”
길거리에 핀 들꽃이 그 둘을 보고 웃는듯이 바람에 살랑였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되게 빠르게 지나갔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던 도중 서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잠깐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괜찮을까?]
[네 괜찮아요]
[꽤 전부터 궁금했던건데 머리에 꽃 꽂고 있는거는 장식같은거야?]
[말이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이건 다음에 답해 드릴게요]
잠깐의 정적…...을 깨고 설화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보다 아까 하려고 했던말 뭐였나요?]
[어떤 말?]
[그 저한테 웃는 얼굴…...이라고 했던 거요]
[아 그거… 웃는 얼굴 예쁘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살짝 부끄러워져서]
[선배는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것같네요]
[부끄러움이라… 그때 너도 고개 숙이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설화는 어느새 도착한 집의 문을 열고 작게 웃음을 짓는다.
[아닌건 아니지만….
그건 선배가 그런 말을 해서…!]
[미안미안^-^]
[...그보다 선배
물어보고싶은게 있는데요]
[응 뭔데??]
[선배는 어째서 저를 좋아하는건가요??]
[흠……. 좋아하는 이유라...]
설화가 방에 도착한후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현의 답장을 기다렸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첫눈에 반했어]
[그게 전부인가요?]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안 오자, 설화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장에서 공책 한권을 꺼내서 편다. 그 공책에는 날짜별로 설화의 귓가에 핀 꽃의 종류가 적혀있었다. 설화는 펜 하나를 집어들어 공책에 큼지막하게 쓴다. {3월 24일 장미 행복함, 하루종일 하늘에 뜬것처럼 불안하다고 해야될까 어쩄든 뭔가 안절부절 못하겠음.} 다 쓰고난 뒤 휴대폰을 보니 어느새 서현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예상외로 긴 글이 와서 설화는 아주 조금 감동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너에 대해서 아는거라고는 요 며칠간 본 너의 모습이나 어제 너에게서 들은 말 정도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너에 대해 알아갈 너의 단점이든, 장점이든, 그런 너의 모든 부분이 전부 좋아질거라고 생각해]
[쓰시느라 고생했어요 조금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고마워요]
[쓰고나니까 부끄럽네… 내일 학교에서 보자]
[네, 내일봐요]
설화는 서현의 문자를 보고 답장을 남긴후,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