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하게만 보이던 교복이 봄을 반기듯 화사하게 보였다.
간단하게 외출복을 차려입은 뒤 설화는 다시 집밖으로 나간다. 설화는 부모님이 일때문에 몇달에 한번 정도밖에 안 오는 이유로, 거의 자취하듯이 혼자서 살고있기에 매일 혼자서 장을 본다. 그때문에 오늘도 장을 보러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설화는 지금 공원 풀숲에 숨어서 서현을 몰래 보고있다. 설화가 보고있는 서현은 여자 두명, 남자 두명과 같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서점으로 갈까?”
서현과 4명의 다른 사람들이 공원을 빠져나간다. 설화는 풀숲을 빠져나와 옷에 묻은 나뭇잎과 흙을 털어낸다. 그리고는 서현이 간 곳을 잠시 주시하더니 고개를 흔들고 마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장을 다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 공원이 다시 설화의 시야속에 들어왔다. 공원에서 서현이 책이 들어있는 듯한 비닐봉투를 들고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
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서현에게 설화가 먼저 인사했다.
“어, 안녕.”
“무슨 일로 나오셨나요?”
“아 동아리 부원들이랑 같이 서점에 갔다왔어.”
“아 그러면 아까 여기서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 동아리 부원분들이신가요?”
“아마 그럴거야.”
어색함에서부터 몰려오는 고요한 정적이 공원 옆 도로라는 장소와 지금이라는 시간을 덮쳐왔다. 때맟춰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보다 설화… 아니 너는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같은거 하는거있어?”
“이름으로 부르셔도 돼요.”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부끄러워서… 노력해볼게”
“동아리 활동은 뭐… 딱히 없어요.”
“그러면 우리 동아리 들어오지 않을래?”
“어떤 동아리인데요?”
“소설창작부라고…”
서현이 동아리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찰나 설화의 눈동자속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흥미라는 감정만이 눈동자를 가득 매꾼것처럼 초롱초롱해졌다. 마치 까칠한 고양이에게 실뭉치를 던져준 것 같았다.
“괜찮은것 같은데 동아리 들어가려면 입부신청서라던가 그런거 써야되는건가요?”
“아니, 그냥 동아리 부장이나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될거야.”
“그런가요?”
“어, 응. 일단 내일이 동아리 모이는 날이니까 내일 학교 끝나고 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줘. 마...마중이라도 할게.”
“네! 아… 그....”
설화가 방금 전까지 들떠있던 자신을 원망 하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설화가 말을 잇지 못하자 서현이 대신 말을 꺼냈다.
“그보다 서.. 설화는 집 이쪽이야?”
“네, 선배도 이쪽인가요?”
“응.”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또 다른 화제를 찾던 서현은 한가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저번에 귓가의 ‘꽃’에 대해서 물어봤던거 혹시 지금 대답해줄수있어? 진짜 궁금해서...”
“...이 꽃들말인가요…?”
설화가 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머리를 다듬은 후, 서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꽃들은 제 머리에서 피어난 거에요. 믿을 수 있으신가요?”
“이해는 못 하겠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은것 같네.”
“어릴때부터 있었던 병같은건데 매일매일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요.”
“......?”
서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원인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병원이란 병원은 전부 가봤는데 아무 도움도 안돼서... 뭐 딱히 아픈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것도 아니라 지금은 그냥 놔두고 있어요.”
“병…이었구나…...”
서현이 뭔가 미안한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보다 지금 피어있는 꽃은 ‘장미’야?”
“네.”
“되게… 예쁘네. 너도 그 꽃도...”
설화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지고있는 노을의 붉은 빛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진심인가요…?”
“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너는 정말로 예뻐.”
서현이 지고있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글거리는 것 같아요. 중2병 선배.”
“좀… 그랬나?”
“그래도 싫지는… 아.”
설화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현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이만 가볼게요.”
“어 잘가~ 내일 보자.”
“네 선배도요.”
집에 돌아오자 지친 설화는 침대에 벚꽃잎이 떨어지듯이 사뿐히 누웠다. 꽤나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던지라 설화는 눕자마자 짐에 들었다. 달빛에 장미꽃이 시들며 부스러지고 또다른 꽃이 새싹을 틔웠다.
새벽 3시, 일찍 잠든 탓인지 설화는 몇번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나왔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SNS에 서현선배로부터 ‘친구요청’이 와 있었다. 설화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내려논후 물을 한모금 마신후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한 5분정도를 뒤척이다가 설화는 다시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거울속에 비친 설화의 머리에는 흰색의 칼랑코에가 피어있었다.
그 후로 설화는 자지않고 책을 읽다가 시간맟춰서 여유롭게 학교에 등교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거북이 처럼 느리게 지나가는 수업시간을 버텨내고 학교가 끝난후 설화는 휴대폰을 만지작이며 자신을 대려가기로 했던 서현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몇분이 흘러도 서현이 오지 않자, 설화는 연락을 해볼까?하고 고민했지만 결국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11분이 흐르고.
다리를 떨고있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이지만 지금은 더 어둡다.
설마 까먹은 것일까? 잊어버린 것일까? 설화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았지만 그 발소리들은 서현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기다리다 지친 설화는 책상에 엎드렸다.
얼마뒤 복도에서 누군가 뛰는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화는 그게 서현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어 문밖을 쳐다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멈추고 서현이 헥헥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설화는 불만스러운듯이 눈을 감고 말했다.
“너무 늦은거 아닌가요?”
그리고는 설화의 책상 앞에 서서 머리카락을 다듬고 말을 꺼냈다.
“미안… 청소가 늦게 끝나서…… 뛰어오긴 했는데……… 많이 기다렸지…?”
“많이 기다린것까진 아니지만, 물이라도 좀 마셔요.”
설화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들었다. 가방속에는 분무기와 가위도 있었다.
“물 가지고 다니는거야?”
서현이 설화의 물병을 받아들고 물었다.
“네 일단은 제 머리에 핀것도 꽃이고 식물이니까 물을 안주면 시들거든요. 병도 걸리고…”
“그렇구나.”
“...그보다 물 안 마실 건가요?”
설화가 물병을 받아들고 마시지않고 있는 서현을 보고 말했다.
“안 마시는게 아니라…”
서현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설화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더니 볼을 붉히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그거 저 입댄거 아니니까… 그러니까 꽃에 물주려고 들고 다니는거니까… 간접키스라던가 그런건....”
횡설수설 말하고 고개를 든 설화에게 서현이 물병을 건내고 말했다.
“그..그런 생각은 하지않았어... 그보다 다들 기다릴테니까 가...자”
“...!...네”
그렇게 동아리활동을 하는 교실까지 두사람은 아무말 없이 얼굴을 붉히며 걸어갔다.
드르륵 서현이 문을 열자 그런 소리가 났다. 그안에는 설화가 전날 공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시선들이 전부 설화에게로 이동했다.
“......어…...안녕하세요, 1학년이고 이름은 조설화라고 해요.”
설화가 짧게 인사하자 서현이 덧붙여 설명했다.
“동아리에 흥미가 있는것같아서 데려왔어, 그리고 내 여...읍...”
설화가 서현의 입을 막으며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부장인 ‘안기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서현이 여자친구인가보네.”
“아니...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라고 서현이 말하자 필사적으로 부정하던 설화가 옆에서 서현을 째려보았다.
“그야 너가 그냥 여자후배를 동아리에 데려올리가 없잖아, 여자랑 대화도 잘 못하니까”
푸흡… 하고 설화가 웃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설화가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말하자 이번에는 서현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확실히 그렇네요.”
“아냐 요즘은 말도 안 더듬고 대화 잘 해 ”
설화가 서현을 비웃자 부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흠흠… 그보다도 일단 자기소개를 먼저 하도록하자.”
부장이 말을 꺼내자 책상에 앉아있던 다른3명의 부원이 한명씩 자기소개를 하였다.
“1학년의 나희연이야 잘부탁해.”
갈색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그림을 그리던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1학년의 박현서라고 해.”
똑같은 갈색머리카락에 조금 짧은 머리카락을 한 그가 그렇게 말했다.
“3학년의 한지윤이고, 음… 잘부탁해”
검고 긴 머리카락에 넓은 이마가 인상적인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3학년의 안기범. 부장이라고 불러주면 되고 우리 동아리 들어온거 축하해 아 그리고 음… 여기 교실에 있는 물건은 그냥 자유롭게 사용해도 돼. 일단 저기 앉아있어”
부장이 손가락으로 3명의 부원이 앉아있는 긴테이블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안계셔서 그냥 자유롭게 활동하면 돼.”
한지윤이 덧붙여서 말했다.
“잘부탁드립니다.”
설화가 그런 말을 하며 테이블에 앉자 희연이 말을 걸었다. 서현은 설화가 앉은 자리 근처에 있던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척하며 설화와 나희연의 대화를 엿들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건 알지만 사랑한다는 거는 어떤 감정이야?”
“네…?”
“연애라는 건 뭐야?”
“질문이 바뀐것 같은데요??!”
“첫번째질문으로 할게.”
“에에…...”
설화가 부끄러워하자 덩달아 부끄러워진 서현은 재빨리 책 한권을 꺼내서 자리로 돌아갔다.
“아아 미안해, 얘가 그런 곤란한 질문 많이 하거든...”
한지윤이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나서 나희연의 갈색 머리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보다 설화...라고부르면 될까… 설화는 소설 같은거 좋아해?”
“소설은 어릴때부터 많이 읽어서, 조금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이서현은 좋아해?”
“네…? 네!?”
나희연이 머리위에 놓여진 한지윤의 손을 치우며 파고들자, 설화가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저 잠깐 물좀… 마시고 올게요.”
설화가 재빨리 교실을 나와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며 복도를 걸었다.
“머리아파…”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도 한적 없고 본적도 없던 사람들이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친근하게 대해준다. 서현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한다. 그런건 과연 ‘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너무 가식적인 것이 아닐까? 설화는 식수대 앞에 가만히 서서 가만히 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서현 선배.”
교실에서 설화가 나간뒤부터 흐르던 정적을 깨고 나희연이 말을 꺼냈다.
“조설화가 있는 곳으로 가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유는 나중에 알려드릴테니까, 어서 가보세요.”
나희연이 서현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문밖으로 밀어버렸다.
서현이 교실을 나가자, 나희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놓아둔 멀리 떨어져있던 두 화분을 붙여놓고 분무기로 물을 주었다. 두 화분에 예쁘게 피어난 두 꽃이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