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러는 거야... 별것도 아닌데 자꾸 혼자서...”
설화가 중얼거리며 계속 식수대 앞에 서서 물을 흘려보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는것은 나쁜것일까? 행복해지려면 이런 고통을 참아야 되는것일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설화의 머리속을 뒤덮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본 적이 없던 설화였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뭐하고 있어?”
“......”
설화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서현이 서 있었다. 무언가가 필요하다. 태어날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필요했던, 지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혼자 어두운 심연속에 빠진 자신을 구해 줄 그 무언가가.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커져가던 슬픔이 설화의 모든 행동을 정지시켰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 필요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것만 같은데…
“아무것도…”
언제부턴가 흐르던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속 서현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뭐라도 더 말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목소리가 목을 넘어가지 않는다. 전하고 싶었던 마음들이 어디론가 새어가고 있었다.
“괘… 괜찮아? 왜 그래?”
“무슨일 있었어?”
“괜찮은거야?”
“그렇게 울고만있으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뭐라도… 말해줘”
서현의 말을 듣고난 뒤에서야 설화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일단 눈물부터 닦고 진정해…”
서현이 나희연에게 받았던 손수건으로 설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동안… 크흡… 그동안 너무 외로웠어서... 이 꽃때문에 아무도 절 좋아해준 사람이 없었어서... 부모님도 친구도 그 아무도 저를 신경써준 사람이 없어서......흐읍...”
서현이 그제서야 설화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찢어져 떨어진 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흰색의 예쁜 꽃잎이 바닥에 찢어진채 흩뿌려져 있었다.
“그래서...훌쩍... 다른 사람들이 저한테 말을 거는게, 선배가 저를 좋아한다는게 저는…훌쩍... 무서웠어요...”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는 잘모르겠는데…… 그래... 나는… 아니 나도 너에 대해서 아직은 잘 몰라… 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너의 생일이 언제인지, 너가 어떨때 웃는지, 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직은 너에 대해선 잘 알고있는게 없어. 그래도... 이건 확실하게 알고있어. 다른 사람들은 너를 모를 뿐이야. 너의 머리에 핀 그 꽃들이 얼마나 예쁜지 너가 얼마나 다정한지 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서, 너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거야.”
“......”
“힘들면 언제든지 기대도돼, 그러니까 괴로워 하지 말아줘.”
“흘쩍...훌쩍…”
“지금 집까지 바래다 줄게, 동아리는 지금쯤 끝날테니까.”
“....요…”
설화가 작게 미소지으며 아주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 뭐라고?”
“고맙다고요.”
설화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잠에 들었다.
“아아 주말인가...?”
설화가 잠에서 깬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서현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어.. 어제 보낸거네.”
[갑작스럽게 미안하지만 내일 시간있어?]
[이거 보면 답장줘]
[미안해요 어제 일찍 잠들어서 문자를 못봤어요]
설화가 답장을 보내고 몇십초가 지나고 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 1시쯤에 시간돼?]
[음… 별일없긴한데 왜요?]
답장을 확인 못한건지 답장을 못쓰고 있는지 1분째 답장이 없자 설화는 화장실에 간다. 거울속에 비친 설화의 모습에는 벚꽃이 몇송이 피어있었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밥을 차리니 마침 서현에게서 답장이 왔다.
[지인한테 영화표를 얻어서 그게 마침 두장이여서]
‘데이트 같은 걸까요…?’
설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들뜬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럼 보러가죠]
[응 고마워 그러면 1시까지 공원쪽에서 만나자]
설화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침은 10시 4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설화는 서둘러서 나갈 준비를 한다.
설화가 준비를 끝마치고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르켰다.
“서둘러서 오긴했는데 30분이나 빨리왔네…”
설화는 근처 벤치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본다. 멀리서 서현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안녕, 너도 일찍 나왔네.”
“네 어쩌다보니 준비가 빨리 끝나서.”
“그럼 뭐부터 할까…”
“영화가 몇시부터 시작하죠?”
“1시 20분이니까, 45분정도 남았어.”
“그러면 오늘 볼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요?”
“제목은 길어서 잘 모르겠는데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화가인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의 뒤를 쫓아다니며 항상 도움을 주는 주인공의 애인에 대한 로맨스 영화야.”
“어 그거 설마 제목이 ‘그림처럼 그려진 보이지 않는 풍경’ 인가요?”
“아마 맞을거야.”
“그 영화!... 흠흠… 전에 좋아했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길래 보고싶어했었는데 기대되네요.”
설화가 헛기침을 하며 들뜬 기분을 감추었다.
“나도 엄청 기대돼.”
설화와 서현은 영화가 시작하기전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관까지 걸어갔다.
“시간 많이 남은것 같아서 걸어오자고 한건데 의외로 멀었네... 설화는 안 힘들어?”
“힘들어요...”
“아직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저기 앉아서 쉬자 흠... 팝콘이랑 콜라 먹을래?”
“네.”
“그럼 지금 사올게.”
설화는 팝콘,콜라를 사러가는 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켠다. 서현과 주고받았던 문자들을 올려보며 설화는 머리카락을 다듬는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 실감이 가지 않았다. 저 멀리서 서현이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걸어왔다.
그로부터 약 10분뒤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림처럼 그려진 보이지 않는 풍경’
화가였었던 눈이 보이지 않는 남주인공과 그런 남주인공을 항상 따라다니며 도움을 주는 여주인공이 손을 잡고 햇살이 비치는 집안에서 팔레트위에 올려진 그림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걸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그 후부터는 거의 원작소설과 비슷한 내용이라서 조금 지루해진 설화는 옆자리의 서현을 보았다. 서현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화도 그런 서현을 보고 영화로 다시 눈을 돌렸다.
한참 지나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영화속이었다. 남주인공이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집어던졌다. 여주인공이 말렸지만 남주인공은 화를낸다. 어짜피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거 그려서 뭐하냐면서 화를냈다. 그때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안으며 자기가 좋아했던 선배는 이런 모습이 아니였다고 선배의 모든 모습을 좋아하지만 이런 모습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여주인공은 그림을 주워들었다. 그뒤로는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고백을 하며 위로를 해주고 남주인공이 다시 붓을 드는것으로 영화가 끝났다. 결말부분이 원작이랑 달라서 재미없었다고 설화는 생각했지만 서현의 표정은 꽤나 감동받은듯한 표정이었다.
“영화 재밌었어?”
영화관에서 나가던 중 서현이 설화에게 물었다.
“결말이 원작이랑 달라서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원작은 어떤 결말이었는데?”
“원작에서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제가 좋아했던 선배는 이런모습이 아니었어요’라고 말하고 여주인공이 집에 돌아가고 한참뒤에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사과의 의미로 전화를 하는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자신이 화를낸것때문에 여주인공이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자책감에 빠져 길을 더듬으면서 여주인공을 처음만났던 고등학교의 옥상으로 가느라 그 전화를 못받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찾아 뛰어가는걸로 이야기는 끝나요.”
“옥상으로 가는 이유가 설마... 조금 슬프네”
“그러게요……”
“있잖아요... 선배는요 만약에 제가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
서현이 답이 없자 설화가 다시물었다.
“선배는 영화속 그 여주인공처럼 절 돌봐주실 수 있나요?”
서현의 입에서 “당연하지” “언제까지라도 돌봐줄수있어” “그 여주인공보다 더 잘 돌봐줄수있어” 라는 등의 허세섞인 말이 왜인지 나오지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분명 그런 말보다도 더 허세섞인 말을 했을텐데 서현은 어째서인지 조용했다. 서현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신중하게 대답하라고 서현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뒤 서현이 말을 꺼냈다.
“나는 그 여주인공처럼 하루종일 널 따라다니면서 돌봐줄수는 없을거야. 나의 인생에 지금 너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그 외에도 여러 중요한것들은 있으니까 너만을 신경써주겠다는 말은 장담을 할수가 없어.”
“그렇겠네요…”
“그래도 너를 잠시라도 못보면 너가 보고싶어지고 항상 무슨일이든 너를 먼저 생각하고 매일 아니 매초마다 너...너를 새...생각하는… 아니 생각할수있어”
“...말만 안더듬었으면 정말 멋진 말이었을 텐데 말이죠.”
“이런 말 하는 거 쉬운게 아니라고…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아”
서현이 고개를 푹 숙이자 설화가 작게 웃었다. 서현을 만나고 꿈처럼 느껴졌던 하루하루들이 이제 서서히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내일모레 학교에서 뵈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설화가 집에 들어가자 설화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던 서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거야?”
“크흐흐흡…”
“언제부터 눈치챘어?”
뒤에는 같은 동아리인 박현서와 나희연 그리고 부장과 한지윤이 있었다.
“처음부터인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눈에 띄게 숨어있는데 그보다 왜 따라다닌거야?”
“취재라고 해두지 우리는 소설창작부이니까”
부장이 노트를 꺼내들고 말했다.
“그보다 진작 알았으면 왜 말 안한거야?”
“누가 따라오고 있는거 설화가 알면 불편해 할거아냐…”
서현의 대답을 듣고 모두 박수를 치며 ‘오오’라고 소리냈다. 서현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동아리 부원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설화의 집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집으로 돌아가던 나희연과 박현서가 길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이거… 설마”
나희연이 길거리의 무언가를 가르키며 말했다.
“그래 고양이야.”
“고양이구나.”
박현서가 쭈그려 앉아서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자 고양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나희연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박현서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입에 머금어 왔던 말을 내뱉었다.
“전에 부장선배가 한 얘기 기억나?”
“우리보고 연애좀 해보라고 했던얘기?”
“그래 그얘기.”
벚꽃이 바람에 실려 두사람의 거리에 흩날려졌다..
“그런데 그 얘기가 왜?”
“...”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박현서가 마치 물음표 뒤에 마침표가 있는 것처럼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둘이서 연애 해보지 않을래?”
“......우리 관계는 지금 이대로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박현서가 나희연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다시 멀어지기는 싫으니까’
“좋아해서 사귀자고 하는게 아니야 그냥… 경험을 위해서 한번 사귀어보자는 것 뿐이야”
“...생각해볼게, 월요일에 보자”
“그래 안녕”
두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태양도 산과 아파트단지의 사이로 져들어갔다. 하늘도 푸른 어둠을 드리웠다. 이렇게 모두에게 여러 일이 있었던 오늘도 수많은 지나간 과거처럼 어제가 되었다. 설화의 상처들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소한 일상에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달이 뜨자, 설화가 꽃을 뜯어냈던 자리에 다시 새싹이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