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가 죽이 든그릇과 물 한컵을 올려둔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깨워야 될까요…?”
설화가 죽이 든 그릇을 서현이 잠든 침대옆, 쌓여있는 책 몇권과 서현의 휴대폰이 올려져 있는 작은 서랍장위에 올려 놓았다. 설화가 서현을 깨울까 말까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설화의 머리에 핀 꽃의 꽃잎이 서현의 머리위에 떨어졌다.
“으아…....조심조심해서…”
설화가 살며시 서현의 머리위에 떨어진 꽃잎을 치워냈다. 그후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 침대 위에 살포시 앉아 서현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잘때는 아기 같다는 말이 이럴때 쓰이는 말이구나...하고 설화는 생각하며 서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다보니, 문득 며칠전 학교에서 나희연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며칠전 학교 동아리 활동 시간, 서현과 부장과 박현서, 그리고 한지윤이 선생님의 심부름 때문에 나가 설화와 나희연만이 남아 조용했던 교실에서, 나희연이 설화의 곁으로 다가오며 설화를 불렀다.
“설화야 설화야”
“...응? 왜 그래?”
“진전은 있어?”
“무슨 진전…?”
“음… 이서현선배랑 사귄지 이제 백일도 넘게 됬잖아. 무슨 특별한 일 없었어?”
“특별한 일이야… 뭐 나는 그냥 매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으에... 방금 그 말 되게 이서현선배 닮았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
평소같으면 볼을 붉혔을 설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희연에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잘 모르겠어. 선배랑 하는 대화도 지극히 평범하고, 데이트같은것도 시험때문에 가본지도 오래 됐고, 가끔은 선배가 지금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싫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도 들어.”
“......그래? 그건 아마 익숙해져서 그런걸꺼야, 이서현선배라면 동아리 활동시간마다 너 보면서 헤실헤실거린다고~”
“익숙해진거라고…?”
“응 원래 사람은 익숙해지면, 그만큼 둔해지고 잘 신경을 안 쓰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를 향해 크게 한발짝 내딛을 계기가 생겨야 될것같아. 대부분 상대가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망설임이 생기는거니까.”
설화의 회상이 끝나고, 설화는 작게 중얼 거렸다.
“계기라…”
“...으으…”
설화의 숨소리보다도 작은 설화가 중얼거린 목소리를 듣고 서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바깥은 꽤나 어두워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에 퍼졌다.
“일어나셨어요?”
“계속 여기 있었던거야?”
“아니요 방금 들어왔어요.”
물론 설화는 30분정도 이 방에서 계속 앉아있었지만 ‘방금’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설화는 그렇게 말했다.
“아 이거 죽 끓여왔어요.”
설화가 ‘방금’ 침대 옆 작은 서랍장위에 올려놓았던 죽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먹여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내가 먹을게.”
“보통 드라마나 책같은거 보면 병간호 해줄때는 죽을 먹여주잖아요.”
라고 말하고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서현의 입쪽으로 갔다댔다.
“자, 드세요.”
“어 아... 알겠어… 아아…”
서현이 숟가락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식었네”
“식은건가요.. 데워 올까요?”
“아냐, 괜찮아. 맛있어. 너도 한입 먹어볼래? 너가 한거니까.”
“어… 한입만 먹어볼게요.”
설화와 서현은 만난지 몇달이 지나도 아직 대화도. 관계도 어색했지만,
“숟가락 줘봐.”
“네?”
“아니 그러니까… 너가 아까 나 죽 먹여줬잖아, 그러니까 나도…”
“아아… 그러면… 아아”
설화가 숟가락과 죽그릇을 서현에게 건네고 마스크를 벗은 후, 마치 아기새처럼 입을 작게 벌렸다. 서현이 다 식은 죽을 한숟가락 퍼서 설화에 입속에 넣어주었다.
“...음… 많이 식었네요. 맛도 없고.”
라고 고개를 숙인 채 설화는 말했다. 서현은 괜찮다는 듯이 웃고서는 죽그릇을 옆애 서랍장에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돌아가도 돼, 늦었으니까 바래다 줄게.”
“......”
서현의 말을 들은 설화가 대답없이 고개를 들고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현을 쳐다봤다.
“왜 그래?”
“...아니에요 바로 옆이니까 그냥 뛰어서 갈게요. 내일 학교에서 봐요”
“어… 그래. 내일보고 잘가.”
“안녕히계세요.”
설화는 도망가듯이 서현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설화의 표정에 하고싶었던 말을 꺼내지 못한 후회와, 복잡하게 엉켜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묻어나왔다.
설화가 복잡한 감정들을 이끌고 자려고 했을때, 서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 잘 들어갔어?]
설화는 답장을 보냈다.
[네 잘 들어갔어요]
[다행이다 그럼 잘자]
[네 내일 봐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서현과 만난지도 벌써 네달정도가 지났는데, 설화와 서현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다. 처음 만났을때와 지금을 저울질한다면 아마 저울은 평평하거나 오히려 처음만났을때 쪽으로 기울것이다.
두근거림은 있지만 사랑이 없다고 해야될까, 사랑이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설화와 서현에게는 관계의 벽을 뛰어넘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설화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그동안 서현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맨 꼭대기부터 맨 아래까지 보며 고민하다가 잠에 들었다. 설화가 잠들고 찾아온 내일, 또다른 꽃이 설화의 머리 위에서 피어났다.
모두가 잘 시간, 나희연이 조금 아련한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툭툭 두드리며 몇달전 박현서에게 고백에 대한 대답 대신 받은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지는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는지 약간 해져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소설을 읽을때도 애매한 결말을 좋아해, 시끄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보단, 비올듯말듯 흐리기만한 하늘이 좋고, 진심을 드러내도 마음을 드러낼수 없다면 차라리 애매한 관계가 되는게 좋아.
끝이 났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결말보단 조금이라도 희망이 남은 애매한 결말이 좋아.
그래서 나는 너랑 사귈수 없어. 그리고 경험을 위해서라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좋을거야. 나는 우리가 다시 사귄다고해도 예전을 반복할 뿐이라고 생각해.』
“괜히 그렇게 둘러댄 걸까...오히려 진심을 전하는것보다 이렇게 하는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았는데, 생각이 짧았던걸까...”
나희연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벽에 기대 박현서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희미한 실루엣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으로 박현서와 눈 마주친 것도 벌써 몇달전이겠지.
나희연은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리려고 머리를 싸매다, 곧 잠에 들었다.
이 날은 모두가 각자의 고민에 빠진 날이었다.
그들을 비웃듯이 가는 초승달이 산을 넘어 뜨고 산너머로 사라진후 온 거리를 햇살이 비추자, 바깥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