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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에 빠지다
작가 : 미소짓기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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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화첩 속 그녀
작성일 : 17-06-07     조회 : 413     추천 : 1     분량 : 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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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고서사(朴古書肆)’

 

 조선에서 발간되는 모든 책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오는 귀한 책들까지 구비되어 있는 이곳에 해랑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책벌레 해랑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특히 묵화에 관심이 많은 해랑은 새로 들어온 묵화 화첩을 뽑아들고는 그림에 푹 빠져 들었다.

 

 “도련님은 그 시커먼 수묵화가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묵화 중 으뜸은 바로 이 난화(蘭畵)이지. 고귀하게 뻗어나간 잎...그나저나 넌 아까 여인네들 앞에서 한밤중에 내가 널 불러내서...뭐?”

 

 “사실이지 않습니까? 한밤중...축시...늘 은밀히 저를 불러내서. 흑.”

 

 "불러내서? 흑? 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은밀히... 물을 떠다 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목 마르시다구~ 그럼 보던 거 마저 보십시오."

 

 서가 뒤편으로 도망치는 놈이. 해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다시 서책에 빠져들었다.

 그는 사실 글공부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조선 제일의 가문, 연판서의 장자인 그가 환쟁이가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화첩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실망하시겠지......’

 

 해랑은 한참 화첩을 보다 책을 덮고 말았다.

 어두운 그늘이 서린 해랑의 눈동자가 먹빛 바다처럼 흐려졌다.

 그러자 어느새 나타난 놈이가 해랑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 도련님 기분도 영 안 좋으신 거 같은데. 기분 전환 겸...나쁜 짓이나 좀 할까요?”

 

 “나쁜 짓?”

 

 “이보시오, 박서방. 전에 내가 부탁한 것은?”

 

 “흐흐... 저기 뒤쪽 문으로 들어가 보시게~”

 

 박서방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하자 놈이도 한쪽 눈을 깜박이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어두컴컴한 서가 뒤쪽으로 해랑을 끌고 가는 놈이.

 

 “어딜 가는 게냐?”

 

 “한양 최고의 난봉꾼인 놈이를 한 번 믿어보시지요.”

 

 *

 

 서가 뒤쪽 은밀하게 꾸며진 또 다른 밀실.

 해랑은 그곳의 엄청난 양의 서책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화첩은...! 왜에서 구하기 힘들다 들었는데.”

 

 “도련님아, 이런 재미없는 거 보지 말고, 재미있는 거 해야죠?”

 

 이때 놈이가 다짜고짜 서책을 빼앗더니 해랑을 오동나무 서가로 밀어 붙였다. 밀어붙이는 박력에 해랑의 탄탄한 등과 서가가 부딪치면서 휘청.

 

 놈이는 또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해랑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놈이의 거친 숨결이 해랑의 뺨 위에 거칠게 부서졌다. 게다가 그윽한 눈으로 해랑을 바라보기까지.

 

 “이렇게 단 둘이 갇힌 공간에 있는 건... 오랜만이네요 도~오~련님♡ ”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해랑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는 놈이. 당황스러울만한 상황인데도 해랑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연인에게 심드렁한 남정네의 표정 같달까.

 

 “그래 그 동안 너무 안 했구나...오랜만에 우리 한 판 하자.”

 

 “어머! 이 음흉한 사내 같으니라고! 아니 되어요~”

 

 신이 나서 저잣거리 여인네들 흉내를 내는 놈이와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해랑.

 

 저 놈이 또 시작이군.

 나를 놀려먹는 재미가 없으면 세상 사는 의미가 없다고 했지.

 

 “왜? 오랜만에 치도곤을 한 판... 아니 두 판, 세 판이 어떠냐? 곤장을 맞아야 네가 정신을 차...”

 

 “아하...하하, 웃자고 한 농을 죽자고 달려드십니까? 화 푸시고... 이거 받으십시오, 아주 귀한 겁니다.”

 

 놈이는 해랑의 등 뒤 서가에서 책 한 권을 쑥 뽑아 해랑의 손에 쥐여 줬다.

 

 『춘화야사』

 

 춘화야사?

 해랑은 웬 봄꽃 화첩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빛이 바랜 표지에는 어떠한 문양도 그림도 없이 흘려 적은 듯한 제목만 있을 뿐이었다.

 

 “놈이 네가 웬 일로 꽃 그림에 관심을 다 가지느...헉!”

 

 “꽃 그림? 얼추 비슷합니다! 진정한 남정네로 만들어줄 최고의 묘약!”

 

 무심코 ‘춘화야사’ 화첩을 펼쳐본 해랑은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남.녀.상.열.지.사.

 해랑도 부모님이 정해주신 정인을 만나 첫날밤에 할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했던 그것!

 그림속의 남녀는 서로를 탐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다.

 입과 입이 마주하고 몸과 몸이 마주하며...

 게다가 남정네의 한 손이 지금 여인의 가..가슴에? 그리고 한 손은...

 

 해랑은 꿈속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계곡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왔고...

 그녀의 ‘그곳’에 내 손이 닿았었지.

 왠지 이 책을 보니 해랑은 그녀의 얼굴이 더욱 더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이쿠, 이러다 서책에 불나겠습니다. 아주 눈에서 횃불이 활활~”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디서 이런 이상한 책을!”

 

 놈이의 놀림에 해랑은 화첩을 내던지려하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꿈속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도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뗄 수가 없었는데.

 지금도 고개도 눈도 심지어 마음까지 춘화야사에 사로잡혀버렸다.

 

 조선 최고의 차도남이자 순진남, 해랑.

 춘화에...빠지다.

 

 ***

 

 모든 창을 두꺼운 천으로 가린 어두컴컴한 밀실 안.

 작은 창살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들어와 겨우 책을 읽을 수 있는 이 열악한 공간에서도 춘화야사를 탐독, 열독 중인 해랑.

 

 “...오.”

 

 계속되는 해랑의 완벽한 언행불일치.

 해랑은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고 바닥에 앉아 춘화야사를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레 넘기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해랑의 눈은 다양한 형태로 변해갔다.

 

 “이런 신세계가......”

 

 남녀상열지사.

 물론 해랑이 그동안 여자에 관심이 없다거나 특이한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랑 역시 여인에 대해 궁금해마지 않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단지 해랑은 군자 된 도리로 여색만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유곽의 기녀들을 찾고 진정한 사내가 되었다며 으스댔지만 해랑의 생각은 달랐다.

 

 진정한 사내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함부로 여인을 취하지 않는다.

 욕망보다는 사랑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 아마 부모님이 정해주신 정인을 만나면 모든 것을 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도 본능과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옆에서 놈이가 워낙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모습에 오히려 반대로 해랑은 이런 남녀상열지사를 더욱 더 외면했는지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인들을 멀리 할 수 밖에 없는 진짜 이유.

 

 '놈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니, 절대로 말해선 안 돼.'

 

 만약 놈이가 해랑이 여인들을 멀리하는 진짜 이유...

 여인의 곁에 가까이만 가도 자신이 왜 화들짝 놀라는 지 이유를 알게 되면... 놈이는 아마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해랑은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다 춘화야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이때 펼쳐진 춘화야사에 한 여인의 초상화가 해랑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그림과 달리 남녀가 엉켜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여인이 몸이 다 비치는 적삼만 입은 것도 아니었다.

 얼굴을 제외하곤 그림의 대부분은 다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어...설마.’

 

 그녀다!

 몇 년 동안 반복해서 꾸었던 꿈 속 계곡가의 그녀가 이번엔 춘화야사에 나타났다. 해랑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초상화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작고 뽀얀 얼굴에 큰 눈망울. 도톰하고 예쁜 입술.

 꿈속에서 맡았던 그 달달한 향이 화첩에서도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초상화는 거의 다 지워져 있는 데다 그림 중앙에 흉터처럼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해랑은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단지 그림일 뿐인데도.

 

 “어쩌다...이렇게 된 것이요.”

 

 해랑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워진 그림 속 붉은 흉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러다 그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랑은 밀실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붓과 벼루, 먹을 찾아온 해랑은 붓 끝에 먹을 정성스레 묻혔다.

 

 “비록 비천한 솜씨나...... 그대를 위해 한 번 해 보겠소.”

 

 숨을 가다듬은 해랑은 무릎을 꿇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붓은 마치 신명나게 춤을 추는 춤꾼 같이 거침없이,

 때론 우아한 승무를 추는 여승같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붓의 춤은 꿈속에서 보았던 치자색 저고리와 분홍빛 치마, 예쁜 꽃신까지 그려내고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꿈속에 보았던 그녀가 이제 완벽하게 그림 속에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지 그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다시 붓을 놀리는 해랑.

 

 그러자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를 더욱 빛나게 해 줄 나비 모양의 장신구,

 분홍색 나비 떨잠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금방이라도 나비가 그녀의 머리를 떠나 화첩에서 나올 것 같았다.

 이제야 해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곱구려... 그 떨잠은 내 선물이오.”

 

 나비 장신구를 한 번 쓰다듬자 마치 초상화 속 그녀가 미소 짓는 듯 느껴졌다.

 그림 속 그녀가 살아 있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하는 해랑.

 

 “꿈속에서 해 달라고 했던 것이... 혹시 옷을 그려달라는 것이었소?

 참! 그때는 정말로 미안했소이다. 만지려고 만진 게 아니었고...”

 

 해랑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대화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고 있자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난 연해랑이라고 하오. 그대 이름은...?”

 

 초상화에는 그림만 있을 뿐 어떠한 글귀도, 제목조차 없는 초상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오...”

 

 해랑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이름을 내가 지어줘도 되겠소?”

 

 왠지 그림 속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하였다.

 

 “그대의 이름은... 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꽃 중의 꽃, 춘화.”

 

 춘화, 꿈속의 그녀는 그렇게 해랑에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

 

 *

 

 해랑이 그림을 끝낸 그 시각 밀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놈이가 불쑥 들어왔다.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놈이의 등장에 해랑은 허둥지둥 춘화야사를 덮어 뒤로 숨겼다.

 나쁜 짓하다 걸린 아이 같은 해랑의 모습에 놈이는 또다시 사악한 미소.

 

 “아이고~ 너무 즐기면 뼈 삭는데?”

 

 “무슨...!”

 

 “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

 

 “어서 가기나 하자.”

 

 해랑은 허둥지둥 문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놈이를 밀치고 밀실 밖을 나갔다.

 놈이가 떨어져 있는 춘화야사를 줍고는 일부러 큰 소리로 소리쳤다.

 

 "춘. 화. 야. 사. 안 들고 갑니까?

 우리 도련님 교재인데.”

 

 “교...교재는 무슨! 필요 없다!”

 

 저벅저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해랑.

 놈이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춘화야사를 뒤로 던져버렸다.

 

 해랑과 놈이가 떠난 텅 빈 밀실.

 이때 안쪽에 떨어진 춘화야사가 저절로 살짝 흔들리더니 안쪽에서 정체를 알 수 있는 신비로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빛과 함께 서책에서 흘러나오는 여인의 목소리.

 

 ‘고맙습니다... 서방님.’

 

 곧 상서로운 빛이 사라지고 다시 평범한 화첩으로 돌아간 춘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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