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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에 빠지다
작가 : 미소짓기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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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들키지마
작성일 : 17-07-18     조회 : 355     추천 : 0     분량 : 5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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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랑의 처소, 문성각 앞.

 

 놈이는 해랑이 기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좀처럼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체 높은 도련님들이 은밀히 자신의 처소로 기녀를 불러들이는 일은 흔했지만 여인을 돌 보듯 하던 해랑이 기녀를 불렀다는 것은...

 

 ‘뭐, 해랑이도 사내니까. 그나저나 제법이야. 그 순둥이가 기녀까지 부르고.’

 

 살금살금 소리 없이 문 앞으로 다가간 놈이는 숨까지 참으면서 문에 바짝 귀를 댔다.

 

 ‘잘하고(?) 있나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검지에 살짝 침을 묻혀 창호지를 뚫으려는 놈이.

 

 “아파요...!”

 

 “조금만 참으시오.”

 

 “아프다니까요? 제발 살살...악!”

 

 놈이는 창호지로 가져갔던 손가락을 얼른 거두며 눈빛이 밝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팔을 겨드랑이에 낀 자세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번쩍.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해랑.’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놈이.

 

 *

 

 “도련님, 저보고 뭐라 하실 입장이 아니신 듯 하옵니다. 제발 좀 살살...”

 

 “노...노력하고 있소. 가만히 좀 있어 보시오.”

 

 해랑은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로 춘화의 길고 탐스런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엉킨 머리도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서툴긴 하지만 다정한 손놀림.

 

 ‘서방님, 그래도 여전히 하십니다...’

 

 춘화는 눈을 감고 계곡가 너럭바위 위를 떠올렸다.

 

 어린 해랑이 열심히 춘화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확실히 그림을 그리던 손재주가 있어서 그런지 곧잘 머리도 잘 땋아냈던 해랑.

 

 ‘그땐 머리를 다 땋고 나선 항상 그걸 꽂아주셨지.’

 

 바위 옆 복숭아나무에 피어난 꽃을 꺾어 춘화의 귀 옆에 꽂아주곤 배시시 미소 짓던 해랑. 지금 서방님은 그때보다 더 늠름하고 사내다워지셨지만 다정한 것은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모든 걸...잊으셨어. 우리의 모든 순간들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양손을 모은 채 앞만 보던 춘화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리었다.

 

 ‘허나... 상관없어.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야.’

 

 춘화는 목이 메여 눈물이 나올 것 같다가도 믿을 수 없는 이 행복에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서방님이 이렇게 진짜로 머리를 빗겨주실지 몰랐는데.

 

 ‘그런데 여길 어떻게 빠져 나가...윽!’

 

 “아얏! 아파요! 안 되겠습니다. 이제 그만 두...”

 

 “아니오! 잠시만 있어보시오. 이게 사내들 머리결과 좀 달라서...내 좀 더 열심히 해보리다.”

 

 결의에 찬 해랑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해랑은 한 번 집중하면 끝을 보는 성격 탓에 포기란 없었다. 머리빗기에 완전 푹 빠진 해랑. 아까보단 나아진 손놀림이긴 하나 자꾸 머리가 뜯겨나갔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방안에 또다시 울려퍼졌다.

 

 “이제 다 되어가오. 그런데 머리를 묶은 다음은 어떻게 하는 것이오?”

 

 “머리 땋는 방법, 잊어 버리셨습니까? 전에는 잘 땋으셨는데...아.”

 

 춘화는 입에다 손을 가져다 대며 뒷말을 삼켰다. 서책에서 막 나온 부작용일까. 자꾸 헛말이 새어나왔다.

 

 “전에? 나는 여인의 머리를 한 번도 땋은 적이 없소.”

 

 "전에 잘 땋으셨...을 거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도련님의 정인 분께나...“

 

 그래, 서책 속에 있는 동안 서방님께 정인이 생기셨을 지도 모르겠다. 워낙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내겐 정인 같은 건 없소.”

 

 해랑은 춘화...아니 춘화를 닮은 이 여인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계속 놀라고 있었다. 우선 여인과 오랜 시간 함께 하고, 가까이 앉아 심지어 머리까지 빗겨 주다니.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해랑의 몸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것이었다. 열꽃도, 통증을 수반한 가려움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이상한 것은...

 

 ‘원래 여인들은 이렇게 꽃향기가 나는가...? 그것도 머리카락에서?’

 

 머리카락에 빗에 닿을 때마다 달콤하고 아찔한 향기가 폴폴 방안에 퍼졌다. 문제는 이 향기가 낯선 듯 친숙하다는 것...

 

 어디서 맡아봤더라. 꿈속이었나... 확실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 전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이 향기.

 

 “이제 다 되었소.”

 

 머리를 땋지는 못했지만 해랑은 춘화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는 데 성공했다.

 

 “어디,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춘화는 화장대의 거울을 바짝 끌고 와선 이리저리 제 머리를 비춰보았다. 몇 번 극심한 고통이 있긴 했지만 깔끔하게 잘 빗겨진 머리.

 

 그리고 춘화 뒤에서 초조하게 그녀의 평가를 기다리는 해랑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마치 훈장님께 숙제 검사를 받는 어린 아이 같은.

 

 “잘하셨습니다. 도련님.”

 

 뒤로 고개를 돌려 해랑에게 눈웃음으로 살짝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춘화.

 

 해랑은 춘화의 미소를 보며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더니 가슴 전체로 쿵쾅거림이 퍼져갔다. 손을 가슴에 대고 문지르는 해랑. 왜 이러는 거지?

 

 ‘뭐지 이 기분은...’

 

 춘화는 여전히 거울에 머리를 매만져보며 이리 저리 비춰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춘화.

 

 “나비 떨잠... 그것만 있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나비떨잠이라고?

 

 순간 해랑의 눈썹 한 쪽이 위로 휙 올라갔다. 머릿속에 퍼뜩 지나가는 분홍색 나비 떨잠... 해랑이 초상화 속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 해랑은 다시 춘화야사를 집어 들었다.

 

 “아니 됩니다!”

 

 춘화가 서책에 손을 뻗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해랑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춘화에게서 등을 돌리며 초상화가 있던 장을 확 펼쳤다.

 

 “어찌하여...”

 

 초상화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빈 종이는 아니었다. 춘화... 그녀 자체는 사라졌지만 종이 하단에 마치 땅에 떨어진 듯 그려져 있는 분홍 나비 떨잠. 워낙 작은 여인네들의 머리 장식구라 놓칠 뻔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해랑이 그린 것이 맞았다.

 

 “어찌 떨잠이 떨어져 있는 거지? 내가 분명 그녀의 머리 위에 그렸는데... 그런데 이건?!”

 

 떨잠 바로 옆에 그려져 있는 검(劍).

 

 해랑의 기억으로는 원래 그려진 검이 아니었다. 원래 초상화가 있던 자리에는 오직 춘화뿐이었다. 그런데 이 검은...!

 

 ‘박고서사!’

 

 박고서사에 들이닥쳤던 자객단이 들고 있었던 검. 지금 해랑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검과 같은 것이었다.

 

 ‘무늬가...똑같아. 세 개의 원.’

 

 칼날 끝 특이한 문양. 해랑은 그림 속 검과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비교해 보았다.

 

 작은 두 개의 원이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오른쪽 작은 원을 집어 삼키듯 겹쳐 있는 큰 원. 다른 두 원과 달리 큰 원은 피로 물든 듯 새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큰 원에 잡힌 작은 원 역시 피로 점점 물드는 듯 테두리에 붉은 기가 살짝 번져 있었다.

 

 ‘세 개의 원... 아마도 그때 그 자객단의 표식인 것 같은데... 어찌 이것이?’

 

 입술을 일자로 앙 다운 해랑은 머릿속으로 확실한 증거들을 따져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말도 안 되는 가정들뿐이었다.

 

 ‘지금 저 여인이 내 앞에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이때 춘화가 해랑의 손에서 서책을 휙 낚아채더니 품안에 꼭 안고는 몸을 돌렸다.

 

 “...뭐 하는 짓이오?”

 

 춘화는 뒤로 몸을 돌리고는 해랑의 시선을 회피했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처음 보는 서책이라고 한다?

 

 해랑은 긴 손가락을 들어 춘화의 어깨 위를 톡톡 두드렸다. 더 이상 몸에 열꽃이 피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는 해랑.

 

 “분명 모르는 책이라 하지 않았소?”

 

 “모릅니다! 하지만... 도련님은 아십니까?”

 

 춘화는 여전히 해랑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

 

 “그것 보십시오. 도련님도 이 책에 대해 모르십니다. 그러니 이 책이 도련님의 책도 아니라는 소리겠지요.”

 

 가슴에 대고 책을 더 꽉 감싸 안는 춘화. 해랑은 그녀의 강경한 뒷모습에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입니다!“

 

 춘화의 묘한 논리에 순간 해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그 책을 숨기는 모습에 의구심은 더욱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또한 이렇게 해서는 저 의심스러운 여인에게서 한 마디도 듣지 못할 것 같은 예감도 함께.

 

 '강하게 밀어붙일 것만은 아니겠군. 우선은 저 여인에게 이야기를 들으려면.'

 

 “좋소. 그럼 주운 사람이 임자라고 합시다. 그 책은 이제 낭자 것이요... 더 이상 달라고 하지 않겠소.”

 

 의외로 순순하게 나오는 해랑의 태도에 놀란 춘화가 다시 앞으로 몸을 휙 돌렸다.

 

 “진정이십니까? 혹시 그래놓고 다시 책을 빼앗으시려는 건...?”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 책은 낭자의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만 말해 주십시오.”

 

 “네? 또 책에 대해 물으시는 겁니까? 전 분명 아무 것도 모른다 하였습니다.”

 

 춘화는 다시 몸을 뒤로 돌리며 해랑의 눈빛을 홱 피했다. 그러자 바짝 그녀의 뒤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속삭이는 해랑.

 

 “아무것도 몰라도 이것만은 알겠지요... 당신의 이름은 말입니다.”

 

 춘화의 귓가에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춘화가 다시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자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는 해랑.

 

 “낭자... 당신은 정녕 누구입니까?”

 

 더 이상 피하는 것도 그를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춘화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꽉 움켜주고 있는 그의 거친 손.

 

 “이..이것 놓으십시오! 아픕니다!”

 

 춘화는 가슴 위로 양팔을 엇걸은 채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춘화를 뒤에서 확 잡아당기는 해랑.

 

 이제는 아예 그녀를 뒤에서 힘을 주어 꽉 껴안고 있었다. 완전히 그의 품안에 쏙 들어간 춘화는 심장이 아예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게 뭐하는 짓...읍.”

 

 춘화의 입을 막아버린 해랑.

 이게 무슨?

 춘화는 너무 놀라 목 아랫부위까지 잔뜩 수그린 턱을 들고 그를 돌아보았다.

 

 “쉿!”

 

 해랑은 한 손으로는 춘화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 춘화도, 서책도 아니었다. 해랑은 날렵한 턱을 높이 치켜든 채로 처소 밖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해랑... 안에 있느냐.”

 

 해랑은 순간 근육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목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춘화는 그의 맥이 요동치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해랑의 품에 안긴 채 꼼짝도 못하는 춘화.

 

 *

 

 “해랑... 안에 있느냐.”

 

 해랑의 처소 밖에 들리는 근엄한 목소리의 주인공. 해랑의 아버지, 연판서였다. 기별도 없이 아들의 처소에 들른 연판서는 주변을 휘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또 박고서사로 간 것인가? 내 분명 학업에만 증진하라 그토록 일렀거늘...’

 

 연판서는 요즘 해랑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가문의 이름을 빛내야 할 연판서 가문의 장자 연해랑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제 곧 사람들이 해랑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할 것인데...!’

 

 연판서의 눈에 해랑은 그저 유약하기만 한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고 가능하다면 계속 그렇게 안락한 온실 속에서만 해랑이 살길 바랐다. 물고 뜯기는 더러운 이 세상에서 해랑이 다칠 것은 뻔 한 일... 연판서는 어떻게든 그런 일이 없도록 막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해랑은 온실을 벗어나 밖으로만 돌기만 하니.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인기척을 느낀 것은 해랑만이 아니었다. 처소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던 놈이가 부리나케 달려와 연판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너는 어찌 밖에서 들어오느냐?”

 

 “그것이... 잠시 도련님의 심부름을 다녀왔습니다.”

 

 “그럼 해랑은 안에 있겠구나? 그런데 왜 대답이 없느냐?”

 

 “지금껏 책을 읽으시다 화원에 잠깐 산보를 다녀오신다 하였습니다.”

 

 놈이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안에 있는 해랑이 듣고 어서 몸을 피해야 할 텐데...

 

 “그래? 그럼 금방 오겠구나. 내 들어가서 기다리겠다.”

 

 “그..그것이.”

 

 “왜 당황하느냐? 혹... 박고서사라도 간 것 아니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분명 화원에 잠시..."

 

 "네 놈이 거짓을 고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놈이가 말릴 틈도 없이 성큼성큼 방문 앞으로 다가가는 연판서.

 

 "바로 옆에 있는 화원이니 금세 돌아올 터."

 

 망설임없이 문고리를 확 잡아 당기는 연판서 옆에서 놈이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내 들어가서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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