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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에 빠지다
작가 : 미소짓기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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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울지 마십시오
작성일 : 17-07-26     조회 : 370     추천 : 0     분량 : 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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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에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해랑 도련님.”

 

 춘화는 등을 꼿꼿하게 세운 상태로 해랑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동굴에서 나온 이후, 정확히는 그 범이 사라진 이후로 춘화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달라진 춘화의 모습에 해랑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반나절 전, 내 처소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만 해도 필사적으로 뭔가를 숨기는 모습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이 기억났으니 밝히겠다는 춘화의 태도가 해랑은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만.

 

 “좋습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낭자.”

 

 “해랑, 너 미쳤어? 저 기녀가 지금 수작 부리고 있는 거 모르겠어? 분명 돈이나 비단 같은 걸 뜯어내려는 거겠지!”

 

 춘화는 길길이 날뛰는 놈이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깊은 잠이 빠져든 행랑 할멈을 바라보는 춘화.

 

 “첫 번째 부탁은 몇 번이나 절 구해주신 할멈께...감사의 인사를 대신 전해주십시오. 주무시고 계셔서 고맙다는 말도 직접 못 드렸다고.”

 

 “야, 기녀! 널 구해준 건 나야. 저 할망구가 아니고! 나한테 감사의 인사를...”

 

 춘화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놈이를 노려보았다.

 

 “마지막 부탁은... 저 시끄러운, 산적 같은 놈을 밖으로 좀 내 보내주십시오.”

 

 “뭐? 산적? 이 요망이가 보자보자 하니까!”

 

 “...나가거라. 놈아.”

 

 “ 해랑? 너 지금 나보고 나가...?”

 

 “어서 나가래도.”

 

 “우이씨! 이제 네가 저 요망한 것한테 잡아먹혀도 난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

 

 완전히 삐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놈이는 방문이 떨어져라 세게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해랑과 춘화 그리고 행랑 할멈만 남은 방 안.

 

 해랑과 춘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

 

 숨기려는 자와 알려고 하는 자에서

 이제는 알리려고 하는 자와 의심을 하는 자로 바뀌었다.

 

 이 미묘한 기류는 이제 팽팽한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이때 행랑할멈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깨진 긴장감.

 

 해랑은 당황하면서 일어나려는 행랑할멈의 손을 잡는다.

 

 “더 누워 계십시오. 갑자기 이렇게 일어나시면 아까처럼 어지럼증이...”

 

 “도련님, 쇤네 할 일이 생각이 나서 더 이상은 못 누워 있겠습니다. 절대로 숨 막혀서가 아니라 두 분 하실 말씀 하시라고. 그럼.”

 

 “할...할멈!”

 

 말이 끝나자마자 방안을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행랑할멈.

 

 이제 정말로 해랑과 춘화 두 사람만 남았다.

 

 해랑은 춘화와 단 둘이 있으니 아까 낮에 궤짝에서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다시 화르륵 붉어졌다.

 

 남녀칠세부동석...

 

 이렇게 여인과 단둘이 방안에 있어본 것은 춘화가 처음이었다.

 

 ‘정녕 이 여인의 이름은 무엇인지?’

 

 해랑은 여인을 춘화라고 불렀지만 여인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춘화야사에 그렸던 여인과 흡사하다 못해 아예 똑같은 그녀.

 

 정말 책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그 호랑이... 세 개의 원 문양.

 

  해랑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어색함에 왠지 입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계속 어색한 침묵만 이어졌다.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춘화.

 

 “제 이름은...”

 

 짧게 끊어지면서 경련하는 듯 떨리는 춘화의 목소리.

 

 해랑은 그런 그녀가 왠지 모르게 가엾게 느껴졌다.

 

 “소녀는... 없습니다. 이름 따위.”

 

 “...?”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남존여비... 여인을 물건인 마냥 소유하는 조선에서 여인은 비천할 뿐, 이름 따위는 없습니다.”

 

 그것은 춘화의 말이 맞았다. 이 나라에서 여인들은 공식적인 이름은 없었다. 이름이 있다해도 그저 태명이거나 오래 살라며 흔하고 천한 이름만을 붙였다.

 

 사대부의 여식 역시 누구누구 집안의 여식, 결혼하고 나서는 김씨, 이씨, 박씨 부인으로 불리기 일쑤였다.

 

 “그렇긴 하지만 태명이나 원래 불리는 이름 같은 것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지체 높은 집안의 아씨들에게나 해당하지요. 소녀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제대로 된 이름 따위 없습니다.”

 

 “식솔들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과 살았던 곳도, 그들이 불러준 이름도.”

 

 “제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도....이제는 없습니다. 저는 이제 혈혈단신 혼자입니다. 예전에는 아니었을지도 몰라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래야 하구요.”

 

 “그래야 한다니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춘화야사입니다.”

 

 “춘화야사... 낭자는 모르는 책이라 하지 않았소.”

 

 “네...그랬지요. 하지만 이제 기억이 났기에 도련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춘화야사는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될 서책입니다. 당장 서책을 들고 떠나야합니다. 아니면 도련님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위험해질 것입니다.”

 

 해랑은 춘화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뿌옇게 흐려지는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낭자...춘화야사가 왜 위험하다는 것이고. 그것을 당장 옮겨야한다면 어디로 옮기란 말씀...”

 

 “궁.... 궁입니다. 그곳에 춘화야사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지금 궁...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녀가 도련님께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지금은 이것뿐입니다. 한시라도 바삐 궁으로 서책을 옮겨야...”

 

 어느새 춘화는 그렁그렁한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해랑을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해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허공에 대고 멍한 시선을 보내는 춘화. 뭔가 불길한 일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서책을 옮겨야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제발 소녀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파르르 떨리는 것은 춘화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꺼풀도, 손가락 끝도 모두 덜덜덜 떨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파르르 떨고 있는 춘화.

 

 “제발...제발...”

 

 해랑은 주저하지 않고 긴 팔을 뻗어 춘화의 머리 뒤로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가져 오는 해랑. 그의 넓고 탄탄한 가슴팍에 춘화의 조그마한 얼굴이 폭하고 안겼다.

 

 “도...도련님?”

 

 “알겠습니다. 낭자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과할 정도로 춘화의 어깨를 꽉 잡아 놔 주지 않는 해랑. 그런 과감한 그의 행동에 춘화 역시 놀란 눈을 하고 해랑을 올려다보았다.

 

 “울지 마십시오. 그대가 울면 제 마음이...”

 

 해랑은 춘화를 꽉 껴안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있는 그대로 소리 내는 해랑.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

 

 짙은 어둠이 깔린 행랑할멈의 처소 밖.

 

 처소 뒤 행랑채를 지나치는 두 그림자가 달빛에 어른거리더니 이내 행랑채 뒤 마구간으로 들어간다. 말들은 낯선 이가 들어온 줄 알고 경계를 하다 이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해랑이 자신의 말 적토에게 다가가 갈기를 다정스레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적토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해랑.

 

 "적토야…오늘밤엔 궁에 가자꾸나. 오랜만에."

 

 그 옆에 서 있던 놈이는 해랑을 멍한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해랑,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지? 궁이라니…그래...내가 필시 환청을...”

 

 “바르게 들었다. 궁에 가겠다고 했다. 놈아.”

 

 “하? 미치고 팔짝 뛰겠네! 궁이 무슨 옆 동네 마실 나가듯 가는 곳이야? 해랑...너 설마.”

 

 “?”

 

 “아까 저 요상한 기녀랑 단 둘이 있을 때 당한(?) 거지? 무슨 몹쓸 짓을 당했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너는 항상 그런(?) 생각뿐이더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미안하지만 당하지 않았다. 다만...”

 

 “다만?”

 

 적토의 갈기를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빗어주던 해랑은 이제는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손짓을 멈추더니 바로 날렵한 몸짓으로 적토의 등 위에 올라타는 해랑.

 

 “다만 지금은 낭자의 말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 그래서 말을 타고 궁까지 가시겠다? 요망한 기녀가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기녀의 말을 믿는 거야?”

 

 “기녀가 아니래도.”

 

 “좋아, 기녀가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너 저 여인의 정체에 대해 알아? 모르잖아! 모르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고 그 서책 하나 갖다놓자고 궁으로 가자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정체는 모르지만... 나는 낭자를 믿는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이유가 뭔데?!”

 

 -히이이잉

 

 놈이의 질문에 해랑 대신 대답하는 적토. 해랑은 적토의 등을 한 번 더 쓸어주고는 고삐를 단단히 잡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고삐를 한 번 휘두르는 해랑.

 

 “이유는...”

 

 해랑이 당긴 고삐에 적토는 놈이의 앞으로 딸각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그저 낭자의 말대로 해야 한다고 몸과 마음이 그렇게 외치는구나.”

 

 "몸과 마음이 외쳐? 그게 무슨 소리야?"

 

 "놈이 네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여인을 대할 땐 몸과 마음이 끌리는 대로 그냥 훅 가는거라고."

 

 “그건 밤에 여인과 침소에 들었을…아이씨! 너 내가 알던 해랑 맞아? 순진해서 여인을 멀리하던…사람들이 말하던 차가운 도성 남자, 차도남 해랑 맞냐고!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난 이젠 니가…무섭다.”

 

 "내가 습득력 하나는 탁월하지 않느냐."

 

 이때 마구간으로 들어오는 또 다른 그림자에 말들이 일제히 긴장, 울어대기 시작했다. 긴장하기는 놈이와 해랑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내 곧 해랑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오셨습니까? 이리로 오십시오.”

 

 다정한 해랑의 목소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는 왜소한 체격의 낯선 사내였다.

 

 사내라고 하기엔 자태가 섬세하고 고울뿐더러 얼굴마저 말간 것이....헉.

 

 “설마...요망이?”

 

 남장을 한 춘화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로 해랑의 앞에 서 있었다.

 

 해랑은 남장을 한 춘화가 해사한 화동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적토 위에 올라탄 채 그녀는 다정하게 손을 내미는 해랑.

 

 “같이 갑시다, 낭자.”

 

 춘화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해랑의 모습에 심장이 격하게 뛰어왔다. 해랑의 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해랑이 내민 손을 꼭 잡은 춘화는 그와 함께 적토 위에 올라타 해랑의 앞에 앉았다. 그러자 적토는 뒷발길질을 몇 번 하더니 힘차게 출발했다.

 

 놈이는 황당하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뒤늦게야 적토의 꽁무니를 쫓아가며 그들을 불렀다.

 

 “해랑! 어딜 가는 거야!”

 

 “어디겠느냐? 너도 어서 따라오너라.”

 

 새하얀 달빛 가루가 청아한 바람을 타고 해랑과 춘화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얀 꽃비가 내리 듯 아름답지만 슬픈 뒷모습의 두 사람.

 

 딸그락 딸그락.

 

 밤공기를 힘차게 가르는 적토를 타고 끝도 모를 어둠 속으로 그렇게 사라져 가는 춘화와 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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