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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에 빠지다
작가 : 미소짓기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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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천무
작성일 : 17-07-26     조회 : 354     추천 : 0     분량 : 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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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닥타닥.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숲길을 거침없이 내닫는 발자국 소리.

 간간히 달빛이 새어오는 틈새로 작은 그림자가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졌다.

 

 작지만 날렵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춘화.

 

 ‘물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어. 이제 곧 계곡이...’

 

 서방님이 계시는 곳과는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계곡이지만 춘화는 여기로 오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것.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 여긴 서방님과 예전에도 한 번 와 봤던 곳이야.’

 

 그때가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서방님과 이곳을 찾았을 때도 깊은 한밤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서방님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면 지금은 춘화 혼자였다. 하지만 마치 어제 왔던 곳처럼 춘화의 몸은 이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방님께 드릴 물도 물이지만... 한 가지 확인해 볼게 있어. 분명 계곡 근처에.’

 

 춘화의 발걸음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거진 풀숲을 몇 번이나 돌아나가자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는 그 곳.

 

 “변했어...?”

 

 사람의 흔적이라고 찾아볼 길 없는 깊은 산중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장경각.

 

 서방님과 함께 왔던 곳이 분명했다.

 

 원래 장경각은 경서나 불경 등의 서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찰 내 건물. 하지만 근처에는 사찰은커녕 작은 암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탔던 건물이었는데... 멀쩡해. 그런데...불타? 그걸 내가 어떻게...?”

 

 춘화의 기억은 조각조각, 예고도 없이 그렇게 불쑥 떠올랐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장경각에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멀쩡한 건물을 보고 춘화는 ‘불탔던 적이 있다’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불탄 후 새로 다시 지은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춘화는 거리낌 없이 장경각 문 옆 배흘림기둥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 희미한 달을 빛 삼아 기둥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춘화.

 

 “역시 있어!”

 

 춘화의 손끝이 멈춘 곳은 기둥과 벽면이 이어지는 경계선.

 

 그곳에 칼로 긁어 만든 듯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애시영항적(愛是永恒的)”

 

 글귀를 만지는 순간 폭우가 쏟아지듯 기억의 조각들이 우수수 그녀에게 떨어졌다.

 

 해랑 도련님...

 아니 서방님의 환영이 아릿하게 춘화의 눈 앞에 나타났다.

 

 ‘낭자... 이 글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때 난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지.

 

 서방님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글귀를 만지작거리시면 말씀하셨지.

 

 ‘애시영항적(愛是永恒的). 사랑은 항상 함께 하는 것...영원토록.’

 

 아마도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곳에 와서 새긴 글귀인가 봅니다.

 

 얼마나 서로가 애틋했으며 이런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와서 글귀를 새겼을까요...

 

 ‘네... 아마도 사랑하는 연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하늘이 금지한 사랑일 지라도.’

 

 그때 서방님의 눈빛은 금세 까만 밤바다의 먹빛으로 흐려지셨지.

 마치 그 연인들을 아시는 말투...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슬퍼보였던 서방님의 눈빛 때문에.

 

 ‘춘화 낭자... 우리는 애틋한 사랑 같은 거 하지 맙시다. 절대로 떨어지지도 말고 절대로 헤어지지도 말고 그저 평범하게 사랑합시다.’

 

 절대 떨어지지도 말고

 

 절대 헤어지지도 말고

 

 그저 평범하게...

 

 왜 그때 서방님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을까.

 

 서방님의 환영은 그대로 사라졌지만 춘화의 가슴에 저릿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춘화의 큰 눈망울 가득 고이는 눈물들...

 

 “바보같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바보 같이.”

 

 춘화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소리 내지 못하고 삼키는 울음 때문에 춘화의 온몸은 사시나무 떨 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에 춘화는 이내 고개를 획 돌렸다.

 

 “맞아... 여기에 한 번만 온 게 아니었어. 불타기 전 뿐만 아니라 불탄 후에도...”

 

 - 끼이익

 

 이때 갑자기 열리는 장경각의 문.

 

 열린 문 안쪽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스물스물 춘화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낚아채 듯 춘화를 안으로 휙 끌고 들어갔다.

 

 “읍...!”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장경각 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춘화.

 

 *

 

 “이 기녀... 왜 이렇게 안 와?! 사람 불안하게스리...”

 

 놈이는 어두운 숲 저편만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계곡에 물을 뜨러 간지가 한참이나 되었지만 아직 감감 무소식인 춘화.

 

 “해랑이 깨어나면... 난리를 칠 텐데.”

 

 “무슨 난리 말이냐?”

 

 “해..해랑! 언제 일어났어?”

 

 “내가 왜 정신을 잃었느냐... 아니 그보다 낭자는?”

 

 “그게 말이야...”

 

 해랑은 일어나자마자 춘화를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억지로 일어나려는 해랑, 결국 휘청하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해랑!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역시 그 기녀가 이상한 약을 쓴 것이 틀림없어! 이 요망한 것 같으니라고... 해랑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줄행랑을 쳐? 그것도 찾지 못하게 아예 숲속으로?”

 

 “뭐? 지금 숲속이라 했느냐. 그럼 낭자가 혼자...?”

 

 “뻔하잖아? 너한테 말도 안 되는 수작을 걸다가 진짜 궁에 가게 생겼으니 내뺀 게 틀림없어! 아직도 모르겠어?”

 

 “...그럴 리가 없다.”

 

 “해랑, 정신 좀 차려. 네가 아무리 여인네들을 몰라도 그렇지, 이건 뻔한 기녀의 수작...”

 

 “그만 하거라! 놈아.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해랑?”

 

 “... 어느 쪽으로 갔느냐?”

 

 서슬 퍼런 해랑의 말에 놈이는 기가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기가 질렸다기보다는 기가 차도 너무 찰 뿐. 하지만 놈이도 해랑의 심정을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여인에게 빠진 사내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법이니.’

 

 놈이도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해랑을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말리면 말릴수록, 하지 말라고 하면 말수록 더욱 빠져드는 것이 마음이니까.

 

 놈이는 한숨을 내쉬며 춘화가 사라진 숲 방향을 가리켰다.

 

 “이 근처에 계곡이 있다며 저쪽으로 갔...해랑! 같이 가!”

 

 해랑은 놈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두운 숲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놈이가 뒤에서 해랑의 이름을 부르며 뒤쫓아 왔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운 숲속을 왜 그대 혼자!’

 

 해랑의 머릿속에는 오직 춘화의 걱정 뿐.

 

 ‘제발... 이 기분 나쁜 예감이 틀리기를.’

 

 해랑은 더욱 더 속도를 내며 나뭇가지들과 가시 넝쿨이 엉켜 있는 곳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내 그의 얼굴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흘렀다. 뒤에서 놈이가 해랑을 따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헉헉...저거 맨날 책만 읽던 샌님 해랑 맞아? 뭐 저리도 빨라?”

 

 놈이는 결국 숨이 턱까지 오는 것을 참으며 해랑을 다시 뒤쫓았고 겨우 그의 손을 잡아채는데 성공했다.

 

 “해랑!”

 

 “놔라! 어서 낭자에게...!”

 

 해랑의 얼굴에 가득한 생채기에 기함하는 놈이.

 

 “야! 얼굴이 그게 뭐야? 나뭇가지를 이런거 그냥 안 보고 막 달린거야?”

 

 “... 상관없다.”

 

 “난 상관있어! 이 고운 얼굴에 어딜 상처를...!”

 

 놈이가 완력으로 해랑을 가게 놔두질 않았다. 계속 가려는 해랑을 거세게 붙잡는 놈이.

 

 “잠깐만 있어봐!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

 

 - 악...!

 

 숲속 가득 울려 퍼지는 여인의 비명소리에 순간 동작을 멈춘 해랑과 놈이.

 

 먼저 입을 뗀 것은 놈이였다.

 

 “설마 그 기녀...?!”

 

 해랑은 놈이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숲 안쪽으로 내달렸다.

 

 *

 

 “목청은 여전히... 좋으십니다. 춘화 낭자.”

 

 장경각 안으로 끌려온 춘화는 바닥에 주저앉아 뒤로 계속만 물러났다. 그녀의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에.

 

 책장 너머 어둠속에 몸을 숨긴 채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던 한 남자가 구름에 가렸던 달이 창살너머 빛을 내리우자 드디어 그 정체를 드러냈다.

 

 “누..누구냐, 너는?!”

 

 “역시.. 기억을 못하시나 봅니다. 서책에서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신게군요.”

 

 “그것을 어찌..!”

 

 “그럼 다시 비천한 저를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소인 천무입니다.”

 

 “...천무?”

 

 춘화는 자신을 천무라 일컫는 사내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검은 도복에 검은 두건.

 게다가 두건으로 눈을 제외하고 반이나 얼굴을 가린 사내.

 하지만 춘화는 사내의 두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천무는 두건을 벗어 옆으로 휙 던져 버리고는 춘화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눈보다 더 하얗게 빛났다.

 

 하얗게 빛나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두건을 풀자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하게 빛나는 긴 은발.

 

 그리고 그 은발 아래 번뜩이는 파란 눈을 가진 사내.

 

 만약 선녀...아니 선남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라 생각되는 외모였다. 도무지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서늘한 미남자.

 

 ‘파란 눈? 달빛에 잘못 본 것인가?’

 

 천무는 춘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파란 눈으로 반달 모양을 만들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 속으로 제 눈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파란 눈? 달빛에 잘못 본 것인가?...라구요.”

 

 “!”

 

 “아...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저 제 수많은 능력 중 한 가지일 뿐입니다. 뭐, 기억은 못하시겠지만.”

 

 “허튼 수작하지 마!”

 

 “역시...기백도 여전하십니다. 낭자.”

 

 천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춘화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춘화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대로 책장에 등이 탁 닿은 춘화.

 

 “다..다가 오지 마!”

 

 “제가 좋아했던 그 표정을 지으시는군요. 죽음을 앞두고 겁에 잔뜩 질린 작은 토끼 같은.”

 

 “다가오지 말라 하였다!”

 

 “글쎄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시니 제가 다가가지 않을 수 없...윽!”

 

 바로 등 뒤에 있던 책들을 천무의 얼굴로 던지는 춘화.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그녀가 던진 책 하나가 천무의 눈에 명중했다. 손으로 눈을 감싸고 쓰러지는 천무.

 

 “으윽...”

 

 천무의 신음소리를 뒤로 한 채 춘화는 재빨리 문 쪽으로 기어갔다.

 

 그때 문 바로 앞에서 들리는 해랑의 목소리.

 

 “춘화 낭자!!!”

 

 “...서방님!”

 

 조금 멀긴 했지만 분명 서방님의 목소리였다. 춘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춘화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있는 힘을 다해 굳게 닫힌 걸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커다란 나무 걸새.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춘화.

 

 천무는 아직도 한쪽 눈을 감싼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도망가야 해. 저 놈이 어떤 짓을 할지도...’

 

 “...낭자!”

 

 이때 다시 들려오는 해랑의 목소리에 춘화는 마지막 힘을 내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겨우 일어서지는 다리. 춘화는 문에 매달리듯 걸쇠를 있는 힘을 다해 들어올렸다. 그러자 활짝 열리는 문.

 

 “춘화!”

 

 열려진 문 밖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푸른빛.

 

 그 빛에 춘화는 눈이 멀 듯 하얗게 시야가 가려졌다.

 

 잠시 후 빛이 거둬지자 춘화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 분명 서방님의 따뜻한 손이었다.

 

 또 자신을 찾아내준 서방님...

 또 자신을 구해준 서방님...

 

 춘화는 이렇게 서방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 해도 모든 두려움과 공포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듯 했다.

 

 이제 절대 이 두 손을 놓치지 않으리다.

 모든 것을 서방님께 고하고 같이 역경을 헤져 나가리다.

 비록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될 지라도.

 

 애시영항적(愛是永恒的).

 

 사랑은 항상 함께 하는 것...

 

 영원토록.

 

 이제 서방님의 손을 잡고 이곳을 빠져나가면 꼭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는 춘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다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춘화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지만 갑자기 쏟아진 푸른빛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그런데 빛?

 

 ‘잠깐...분명 아까는 밤이었는데?’

 

 “서방님...?”

 

 “계속 눈치 못 채시길 바랐는데. 아쉽습니다.”

 

 춘화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던 손을 빼는 해랑은 갑자기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푸른빛이 사라지며 그녀 앞에 나타난 한 남자.

 

 “너..너는!”

 

 “네~천무입니다. 춘화...아니 춘화 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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