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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저(The Pauser)
작가 : 송지음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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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포저 시즌 Ⅰ} 선바위 비밀거래 ... 4
작성일 : 17-06-07     조회 : 81     추천 : 6     분량 : 9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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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시작이구나.”

 기웅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조금 전 뻐꾸기가 뜬 참이었다.

 “기한도 급하고 진짜 죽어났다 이제.”

 기웅의 푸념에 수호는 달력을 보았다. 마감기한인 5월 말까지는 보름도 채 안 남아있었다. 게다가 포커스가 셋. 꼼짝없이 부랑자 노릇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번 포커스도 제법 굵직한지 김 실장은 계속 윗선으로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뻐꾸기를 띄우던 김 실장의 비장한 표정을 떠올리며 수호는 영업 자료를 클릭했다.

 새 영업 범위를 확인한 수호의 눈이 환하게 커졌다.

 우면 초등학교, 양재천 19구역, 선바위역. 총 세 곳을 중심으로 구역이 정해졌다.

 수호는 슬금슬금 웃음을 흘렸다. 선바위역. 이렇게 되면 이전 거처를 그냥 써도 될 것이고, 굳이 연락을 하지 않아도 출근길에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아는 척을 할 수도 있고 훔쳐보지 않고 당당하게 볼 수 있고 이우의 승강구에 나란히 서서 향기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뱁새눈에게 그랬던 것처럼 형이라고 반겨주며 그 해사한 미소를 보여주진 않을까.

 실없이 해죽거리던 수호는 기웅을 힐끗 쳐다보았다.

 심란해졌다. 기웅에게 세뇌가 된 걸까, 왜 사내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인상을 구기고 기웅을 째려보던 수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우의 연락처를 열어 전화번호 숫자를 빤히 쏘아보았다.

 삭제 버튼에 시선이 세워졌다.

 “왜 또 입이 부었냐, 우리 쫄랑이.”

 귀 옆의 속닥거림에 수호는 핸드폰을 훌떡 엎어두며 눈을 부라렸다.

 “소리 좀 내면서 들러붙어라. 매너 없게 남의 핸드폰을.”

 기웅이 코웃음을 쳤다.

 “남의 핸드폰 좋아하시네. 봐봐야 나랑 통화한 거 밖에 더 있냐? 형 밖에 모르는 쫄랑이가.”

 “좋아하시네.”

 “형이 우리 쫄랑이를 좀 좋아하시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수호는 이내 픽 웃었다. 남자들끼리도 좋아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더구나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서로 좋아하고 친한 게 여러모로 좋다. 볼일 있을 때마다 불쾌한 것보다야.

 수호의 입에 슬며시 웃음이 물렸다. 이우에게 중대한 볼일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환각 향기에 대해 조사해야한다. 그 목적으로 애초에 연락처를 받은 거였다.

 

 

 열차 문이 열렸다. 핸드폰 화면을 눈에 붙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열차 밖을 기웃거리더니 다급하게 일어섰다. 앞에 서 있던 이우는 덩달아 다급하게 길을 터주었다.

 뛰어내린 여자 뒤로 문이 닫혔다. 이우는 닫힌 문 앞으로 섰다.

 검은 유리를 물끄러미 보는 이우의 눈앞엔 메시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 선바위 강남순환 상 6-2 8..12 ]

 숫자가 포함된 메시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숫자풀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6-2는 승강구 번호라고 확신했지만 8..12는 8시 12분이 확실하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오늘 오전 8시 12분에 선바위역을 들러 학교도서관에 도착한 후로 선바위역과 관련한 8과 12를 찾기 위해 자료검색에만 매달렸다. 열차시간표를 들여다보던 끝에 급하게 뛰어나와 선바위역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하루 중 배차가 가장 많이 되어있는 시간이 12시 대였고, 그 한 시간의 배차 횟수가 하필 여덟 번이었다. 다른 시간대는 보통 예닐곱 번 배차되어 있었다.

 12시 대에 들어오는 여덟 번째 열차를 타볼 요량이었다.

 열차에서 내린 이우의 발걸음이 저절로 6-2를 향했다. 낮 시간의 선바위역도 한산하긴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비어있는 6-2 승강구에 선 이우는 시각을 확인했다. 12시 42분. 여덟 번째 열차는 15분 뒤였다.

 막상 승강구 앞에 서고 나니 막막해졌다. 열차를 탄 뒤엔 무엇을 확인해야할지.

 12시의 여덟 번째 열차를 6-2에서 타라는 뜻이 맞는다면, 열차 안 그 부분에 뭔가 위험한 물건이 있거나, 아니면 위험한 일이 발생하거나. 열차 안에서의 위험한 일이라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일까.

 이우는 가까운 대기벤치로 주저앉았다. 생각하다보니 아무래도 잘못 짚었지 싶었다.

 메시지가 도착한 게 두 달 전이었다. 지하철 테러 같은 사건이 벌어질 예정이었다면 이미 벌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장소는 열차가 아니라 선바위역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미 뭔가 벌어지고 끝났을 수도 있을까. 누군가 끔찍한 일을 당하며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엉뚱하게 지하철역만 뒤지고 있던 걸까.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 김수호 : 선바위 근처에 살지?

 이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선바위.

 역이라는 한 글자를 더 입력하는 게 크게 귀찮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선바위역을 굳이 선바위로 적어서 보낸 이유. 그냥 귀찮았던 건지, 아니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일까. 어떤 의도를 숨기고 주변을 배회하는 중인 걸까.

 너무 오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보니 출제자가 도우미라도 보낸 걸까.

 귀를 때리는 열차도착 경고음에 이우는 핸드폰에서 눈을 뗐다. 12시의 일곱 번째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6-2 승강구에 맞춰진 열차문이 열렸다.

 타고 내리는 이 없이 도로 닫히는 문을 물끄러미 보며 이우는 수호를 곰곰이 되짚었다.

 학교 앞까지 쫓아왔던 수호는 카페에서 삼십여 분간 커피를 마시고 헤어질 때까지 이우의 진땀을 뺄 질문만 하고 있었다. 예리한 사람인 건 분명해 보였다.

 자신감도 상당히 강해보였다. 본인은 매우 빠르고 넘어지지 않으며 절대 잡힐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 했다.

 길에서 잡힌 순간에 대해 자세히 캐묻는 걸 보면, 시간을 모르는 건 확실하다. 상상도 못하고 있으니 달리기 빠르냐는 식의 엉뚱한 질문을 계속 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향수는 무슨 소리일까.

 이우는 팔을 들어 몸 쪽 냄새를 맡아보았다. 단추가 끝까지 채워진 셔츠 네크라인을 잡아 올리며 고개를 숙이고 킁킁거렸다.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피식, 웃음이 샜다. 이우는 핸드폰 메시지를 다시 열어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멈춰진 순간에 대해 꼬치꼬치 묻다가도 키스 얘기만 꺼내면 벌게지던 얼굴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정말 메시지와 관련된 사람일까.

 메시지 관련된 사람이라면 도둑키스하고 도망치는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겠지.

 이우는 물고 있던 웃음을 킥 터뜨렸다.

 

 

 기웅은 양재천 19구역에 불법 정차를 했다.

 “걸리면 딱지야.”

 “그럼 어떡하냐? 여기 뭐 돗자리라도 까냐? 잠깐 있어, 물 좀 사 오자.”

 차 밖으로 나가는 기웅을 내다보던 수호는 시트를 뒤로 잔뜩 젖혔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중에 메시지 알림음이 들어왔다. 벌떡 자세를 고쳐 앉았다.

 ― 현이우 : 아주 가깝진 않은데 선바위역에서 지하철 타긴 해요.

 ― 그럼 출근할 때 잘하면 보겠네.

 ― 현이우 : 몇 시에 나오시는데요?

 수호는 슬금슬금 웃음을 물었다. 여덟 시 십 분에 가지. 너 보러.

 ― 8시 10분쯤.

 답신이 늦어졌다.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수호는 액정을 밀어 내렸다. 볼 거 없는 대화를 다시 훑다가 가까워오는 기웅을 힐끗 내다보았다. 급하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 김수호 :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 시간 잘 지켜!

 

 

 *

 승강구 앞으로 서며 수호는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 7분. 이우가 곧 나타날 시각이었다.

 수호는 계단을 돌아보고 싶은 고개를 꽉 붙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반듯한 자세로 서서 괜한 심호흡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혼자 한 약속이 아닌 처음으로 서로 나눈 약속이니 깨질 염려는 없었다.

 이우는 계단을 걸어 내리며 시각을 확인했다. 8시 12분까지는 삼 분여 남아있었다. 6-3에 서 있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걸음을 세웠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을 잠깐 보고 있다가 계단 위로 주저앉아 몸을 숨겼다.

 시간을 세우기 전에 수호를 만나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6-3 앞에 서 있는 수호를 곰곰이 되짚었다. 익숙하게 느껴졌다. 오전의 선바위역에서 시공간을 멈출 때마다 항상 저 자리에 있던 것 같았다.

 언제부터 주변에 있던 걸까. 메시지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감시 같은 게 붙었던 걸까. 메시지를 제대로 풀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러 온 걸까. 그랬다가 반하기라도 한 걸까.

 이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호가 꼭 반한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게 차려입은 여자들 다 두고 왜 자신한테 반하겠나 싶으면서도 백 퍼센트 아니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인 건지. 아니면, 설마 남자가 아닌 걸 눈치채고 이러는 걸까. 그건 절대 아닐 텐데.

 시각을 확인했다. 08:12:28. 늦었다. 이우는 계단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스톱워치를 누르고 서둘러 내려갔다.

 대기라인으로 다가서며 수호를 쳐다보았다. 수호는 이우의 자리를 돌아보던 채였다. 6-2 앞에 서니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옆 승강구에 서서 가끔 시선이 마주치던 사람. 분명히 자주 보았었다.

 이우는 승강구 번호 앞으로 엎드렸다. 바닥에 귀를 바짝 대고 번호가 새겨진 블록을 손전등 뒤축으로 쳐 보았다. 속이 빈 것 같지는 않았다. 엎드린 자세를 옮겨가며 6-2의 주변 바닥재를 모조리 두드려 소리를 들었다.

 6-3의 블록도 두드려 보았다. 소리에 별 차이가 없었다. 괜한 생각이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몸을 일으킨 이우는 무릎을 털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마감재 안에 뭔가가 있을까.

 십 분 안에 마감재를 뜯고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십 분이 아니라 하루를 줘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못할 일을 시키지는 않을 텐데, 오늘도 허탕일까.

 이우는 맥 빠지는 기분으로 스톱워치를 확인했다. 이 분여 남은 시간. 수호를 잠시 보다가 다가갔다.

 또렷한 입술 선의 양 끝이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매서운 눈매가 조금 풀려있다. 손가락을 세워 날카로운 눈꼬리를 잡아 내렸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킥킥거리던 이우는 서늘한 무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누구일까.

 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메시지를 보내는 당사자일 수도 있을까.

 이우는 문득 스톱워치를 보았다. 9분 40초 경과. 허겁지겁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갑자기 느껴진 익숙한 향기에 수호의 눈이 커졌다. 무심함을 가장하여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낯선 얼굴만 드문드문 보였다. 얼떨떨했다. 분명히 그 향기인데.

 계단을 기웃거리던 수호는 곧 이우를 발견했다. 이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수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손을 마주 들어 인사를 보내고는 이우의 지정석으로 슬쩍 옮겨 섰다.

 “일찍 나오셨어요?”

 나란히 선 이우가 먼저 말을 붙였다.

 “응 아니.”

 깔린 목소리로 대답한 수호는 승강구 번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까워진 향기에 집중하며 처음으로 서 본 6-2를 눈에 담았다.

 열차로 오른 수호는 먼저 자리 잡은 이우의 옆으로 앉았다. 앉은 자리의 간격을 확인했다. 너무 붙어 앉았나 싶어 조금 띄어 앉았다. 이우와 다리를 딱 붙이고 있던 뱁새눈이 떠올라 다시 붙어 앉았다.

 무심코 움직인 이우의 허벅지가 다리에 닿자 수호는 괜히 깜짝 놀라 다시 조금 간격을 벌렸다. 계속 엉덩이만 들썩거리고 있는 수호를 이우가 힐끗 쳐다보았다.

 “자리 불편하세요?”

 “응? 어, 아니.”

 수호는 허벅지 간격에 두었던 시선을 서둘러 치웠다.

 이우는 벌건 얼굴을 힐끗거리며 수호의 의도를 짐작해보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처럼 굴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한 눈가림일까. 일종의 미인계?

 이우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런 거라면 여자를 보내야 되는 거 아닌가. 여자에게 관심 가질 리 없는 걸 알고 이러는 걸까. 그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다고.

 이우는 수호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이사는 왜 안 갔어요?”

 이우의 목덜미를 곁눈질하고 있던 수호는 빠르게 시선을 치웠다.

 “아, 그거야 뭐, 마땅한 데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우를 수호가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했다.

 정말 이상한 향기 아닌가. 어떤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에 사람 기분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것도 저처럼 냉철한 사람을.

 저 아둔하고 생각 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유독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환각 향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수호는 미간을 굳혔다. 아니다.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다. 뭔가에 취한 상태가 아니고서야 자신 같은 사람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청테이프 포박을 당할 리가 있겠나, 그것도 이우처럼 하늘하늘한 녀석에게 붙들려서.

 “선바위.”

 불쑥 흐른 말이 수호의 잡생각을 깨웠다. 이우가 작은 목소리를 이었다.

 “선바위랑 관련 있는 게 뭐 있을까요?”

 이건 또 웬 스무고개일까, 수호는 잠시 답을 생각했다.

 “많지. 선바위역, 선바위 길, 고개, 과천 선바위, 울산 선바위, 관악산 선바위, 또…”

 이우는 수호를 고쳐보았다. 메시지를 받은 이후 찾아보았던 내용을 수호는 보지도 않고 읊어대고 있었다.

 “형 원래 그렇게 아는 게 많아요?”

 수호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많이 알긴 한다. 그렇지만 똑똑해 보이는 건 위험하다. 저 또랑또랑한 얼굴로 뭘 캐묻기 시작하면 골치가 좀 아파질 것이다.

 “다들 이 정도는 알지 않나?”

 “그럼 또 퀴즈. 육 빼기 이는?”

 “육 빼기 이?”

 수호는 되물으며 미간에 힘을 넣었다. 명색이 퀴즈인데 4는 아닐 것이고. 아!

 “지하철 승강구 번호?”

 이우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승강구 번호. 정말 메시지 관련자일까.

 “틀렸나?”

 수호가 은근한 웃음을 섞어 말을 더하자 이우는 상체를 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호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소곤거렸다.

 “그런 걸 외우고 다녀요?”

 이우의 움직임에 덩달아 향기의 농도도 달라졌다. 수호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외우긴, 그냥 본 거지. 좀 아까. 형 눈썰미 대박이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말투를 뱉은 수호는 입을 다물었다. 미간에 힘을 주며 향기에 대한 생각을 이었다.

 이우가 뭔가를 뿌리거나 사용하고 있다면, 그 물질을 조금만 채취해서 성분 분석 한 번만 해보면 이 미스터리가 풀릴 텐데.

 어떻게 하면 샘플을 확보할 수 있을까. 수호는 생각 끝에 괜히 피곤한 척 눈을 감았다. 나란히 앉은 향기에 가만히 집중했다.

 이우는 눈을 감은 옆얼굴을 뜯어보았다.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 시간이 정지되었던 순간을 유독 세밀하게 기억하고 캐묻던 예리함. 조금 과한 자신감. 보기 드문 근육질 몸과 빠른 다리.

 되짚을수록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뭔가 있다 이 사람. 메시지 관련자일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할까.

 그래도 되는 거라면 먼저 말을 꺼냈을 텐데. 모르는 척 하는 걸 보면, 위장 접근 중인 걸까. 메시지 해석이 늦어지니 몰래 도와야 할 상황이라도 된 걸까.

 힐끔 눈을 뜬 수호는 시선이 딱 맞자 괜히 움찔 놀랐다. 쏘아보는 듯 빤한 눈초리에 얼떨떨해서 조금 전 상황을 되짚었다.

 “아, 퀴즈 너무 쉽게 풀었어? 내가 눈치가 좀 없었나?”

 이우의 미심쩍은 눈초리는 풀리지 않았다.

 

 

 수호는 퇴근을 미루고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수상한 향기 샘플 확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우의 거처를 뒤지면 뭐가 나오긴 할 텐데.

 그냥 놀러 가겠다고 하면 안 되려나. 그 비밀스러운 향을 들킬까 봐 거절하려나.

 차라리 뒤를 밟아 집을 알아낼까, 집을 비우는 시간만 확인하면 슬쩍 들어가 뒤질 수 있을 텐데….

 수호는 문득 눈을 부릅떴다. 핸드폰 번호 추적,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잠깐 고민에 빠졌다. 불법인데.

 바로 다시 웃음을 흘렸다.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일이니 아주 불법은 아니다.

 수호는 부리나케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위치가 뜨자마자 모니터에 눈을 붙였다. 선바위역.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8시 5분.

 수호는 팔짱을 꼈다.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가 오는 걸까. 휴학생이라면서 학교엔 왜 그렇게 열심히 갈까.

 빨간 점은 계속 멈춰있었다. 모니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멈춰있는 이유가 뭘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또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고.

 포인트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 12분. 최소 7분 이상 멈춰 있다가 움직인다. 누굴 기다렸던 걸까. 지난번 뱁새눈처럼 지하철역에서 만날 사람이 있던 걸까.

 이우의 상황을 짐작해보던 수호는 전화를 걸었다.

 -네 형.-

 어딘가 반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수호는 실없이 웃었다.

 “통화 잠깐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디 가?”

 -집에요.-

 “아 그래?”

 수호는 새는 웃음을 참으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동선만 보고 있으면 거처는 바로 나온다.

 “혼자?”

 

 “그럼요.”

 대답을 잇던 이우는 불현듯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디 가? 이동 여부를 묻는 게 아니라 목적지를 묻는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목적지를 대답했음을 깨달았다. 이동 중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역시 메시지를 알고 있을까, 선바위역에서 나온 시각임을 알까. 8시 12분, 시간이라고 추측한 것이 맞았을까. 정말 메시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 좀 더 물어볼 걸 그랬을까.

 -그래,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어. 들어 가!-

 “아, 형, 형!”

 이우는 다급하게 목청을 키웠다. 일단 이 문제부터 풀자. 아직 늦지 않았다면 물어서라도 풀어야 하는 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 듣고 있어.-

 “형은 뭐 하세요? 바쁘세요?”

 -아……,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잠깐 볼 수 있어요?”

 대답이 없었다. 이우는 마르는 입술을 물었다. 수호의 정체를 모르는척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죄송해요. 그냥 제가 심심해서. 바쁘시죠? 그냥 다음”

 -아냐!-

 말허리를 자른 목소리가 컸다.

 -하나도 안 바빠, 한가해. 어디서 볼까?-

 반기는 목소리에 이우는 넌지시 웃음을 물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그럼 먹었지. 아, 너는?-

 “저도 먹었어요. 그럼 집으로 오실래요? 저 혼자 살아서 조용하고 괜찮은데.”

 수호는 또 말이 없었다. 이우는 걸음을 세웠다. 핸드폰을 쥔 손에 땀이 났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집은 당연히 피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 집은 좀, 그렇죠? 그럼 어디 커피”

 -아니 아니!-

 고함 수준의 대답이었다.

 -그럴 리가 있어? 당연히 좋지.-

 이우는 웃음을 꾹 물었다. 시간을 쓰게 되면 집만 한 곳이 없다.

 -집이 선바위역 근처지?-

 “네, 남태령이요.”

 -그럼 저기, 주소 문자 줄래?-

 “네 바로 보낼게요.”

 -차 안 막혀도 삼사십 분 걸리겠다.-

 “네.”

 이우는 주소를 전송했다. 걸음을 서두르며 무엇을 어떤 식으로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직접적으로 물었다가 관련이 아예 없는 사람이라면 좀 곤란하겠지만, 돌려서라도 물어보면 될까.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면 알아듣고 답을 줄 것이다.

 메시지 발신처까지 확인할 수 있을까.

 만일 그게 극비라도 된다면, 캐물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그 엄청난 근육질 남자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려나.

 이우는 뒤늦게 걱정스러워졌다. 괜히 오라고 했나. 극비사항을 물어보았다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혹시 입막음을 위해 죽이려들거나…….

 이우는 피식, 웃었다. 근거는 없지만 자기를 해칠 사람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이 푸힝 터져 나왔다. 무서워 봐야, 지난번처럼 입술이나 맞추려 든다면 또 모를까.

 몸을 뒤져보면 수호에 대해 뭐가 더 나오려나. 누워있는 상태로 할 수 있으면 동선도 흩트리지 않고 좋을 텐데. 오늘 아예 자고 가라고 붙들어 보면….

 이우는 문득 눈을 멍하게 키웠다. 집에 사람이 온다. 처음으로.

 잠깐 멍하던 이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뛰기 시작했다.

 편의점으로 득달같이 뛰어 들어가 면도기와 면도크림을 사 들고 뛰쳐나왔다. 여성용 소지품은 단 하나도 가진 게 없음을 알면서도 괜히 불안한 기분에 정신없이 집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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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6 7/12 384 3
40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5 7/11 376 3
39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4 7/10 346 3
38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3 7/7 356 3
37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2 7/6 370 3
36 { 더 포저 시즌 Ⅳ } 종전일의 기적 ... 1 7/5 371 3
35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11 (완결) 7/4 373 3
34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10 7/3 361 3
33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9 7/1 366 3
32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8 6/30 363 3
31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7 6/29 357 3
30 { 더 포저 시즌Ⅲ} 그들의 포커스 ... 6 6/28 372 3
29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5 6/26 402 3
28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4 6/25 354 4
27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3 6/24 357 4
26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2 (2) 6/23 418 5
25 { 더 포저 시즌 Ⅲ} 그들의 포커스 ... 1 (2) 6/22 485 5
24 { 더 포저 시즌 Ⅱ} 아담의 비밀 ... 9(완결) (2) 6/21 407 5
23 { 더 포저 시즌 Ⅱ} 아담의 비밀 ... 8 (1) 6/20 37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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