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는 핸드폰 메시지창을 열었다. 오전 열한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을 확인하고 액정을 터치했다.
― 형 오늘부터 바빠지겠다. 오늘 병원 갈 거지? 완치는 어려워도 호전은 된대. 형이 진짜 확실한 사람한테 소개받은 병원이니까 꼭 가. 다녀오면 연락하고.
“거처 필요 없어서 그건 편하겠네.”
영업 자료를 훑어보던 기웅의 말이었다. 오전에 뻐꾸기가 날아든 이후로 사무실은 독서실처럼 고요했다. 다들 자료 정리를 빌미로 조금이라도 더 길게 내근을 즐기려는 분위기였다.
“지난번도 사실 필요 없었지 뭐.”
수호의 대꾸에 기웅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다. 선암교 근방인 줄 누가 알았겠냐. 저번 돼지새끼가 안양이네 군포네 헛소리 찍찍 해대는 바람에 다 낚였지 뭐.”
“그러게.”
메시지 알림음에 수호는 서둘러 핸드폰을 집었다.
― 현이우 : 병원 많이 다녀봤는데 똑같았어요. 그래도 또 가볼게요. 고마워요 형.
― 고맙긴. 형 영업 들어가면 전화 못 받을 때도 많으니까, 이따 심심하면 문자해.
“간만에 숙소에서 살겠구나. 우리 쫄랑이랑 동침도 하고.”
기웅의 말에 수호는 인상을 구겼다. 숙소 붙박이 노릇은 곤란한데.
“숙소에 꼭 있으라는 법 있나. 영업 기간에야 숙소에 있든 거처 구해서 있든 내 맘이지.”
수호가 중얼거리자 기웅이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기웅의 눈치를 힐끗 살핀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지 않아? 나가기 전에 뭐 좀 먹자.”
앞서 나가는 수호를 빤히 째려보던 기웅이 따라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저거, 갈수록 이상해지네.”
-일 팀 논현사거리 정차. 신사역 방면 도보 이동합니다.-
한 팀장의 무전이 들렸다. 기웅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뻐꾸기가 죄다 이런 데로만 떴으면 좋겠다.”
기웅과 수호는 가로수길 도로변의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턱을 괴고 행인들을 훑고 있던 수호가 코웃음을 쳤다.
“말이 돼 그게?”
“다음 포커스는 홍대로 떠라. 쫄랑이랑 클럽이나 가게.”
“클럽 질색이거든.”
수호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거리로 시선을 흘렸다. 행인들을 쳐다보던 기웅이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눈동자를 뺐다.
“쟤 괜찮다.”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화보 촬영 중인지 모자부터 신발까지 쪽 빼입은 훤칠한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딱 기생오라비구먼.”
“괜찮은데 왜. 얼굴도 깨끗하고. 스물넷? 다섯?”
목까지 빼고 내다보는 기웅을 수호가 빤히 쳐다보았다.
“형 진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냐?”
“뭐?”
“이쁜 여자들도 많이 지나가는데 왜 남자한테만 그러냐?”
“나도 누구처럼 길고양이 하나 주워볼라 그런다, 왜.”
수호는 기웅을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고양이 아니라니까.”
이우는 책 위에 올리고 있던 시선을 돌려 서재 창밖을 내다보았다. 볕이 쨍한 정원의 잔디가 어느새 진한 초록색이 되어있었다.
좋아할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지난밤 수호의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자신에 대해 다 알려주지 못해도, 수호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곱씹을수록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알려주기 싫은 것이 아니라 알려주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수호가 그러는 것처럼.
바빠졌다니, 또 범죄자들을 잡으러 다니는 걸까. 형사인 줄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총격의 현장을 직접 보고 나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그날 자신이 현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우는 아찔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었다.
― 병원 다녀왔어요. 잘 먹고 잘 쉬면 된다니까 걱정 안 해도 되요.
― 김수호 : 그게 뭐야. 치료 계속 안 해준대?
득달같이 돌아온 답신이었다.
― 미국에서 했던 치료 과정 설명했더니 여기서도 같은 방법 밖에 없다고요. 건강에는 아무 문제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형도 항상 조심해요. 또 다치지 말고.
메시지를 발송한 이우는 대화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 김수호 : 걱정 마. 형 같은 사람은 맨몸으로 총알도 튕길 수 있을걸?
이우의 웃음이 터졌다. 맨몸으로 총알을 튕길 거라니,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부득부득 영업사원이라면서 총 얘기는 왜 하는지.
― 알죠. 그래도 조심해요. 총알이 튕겨도 아프긴 아프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메시지 알림이 들어왔다. 득달같이 열어본 이우의 표정이 가만히 굳었다.
─ 안창호 diagonaldawn 7-9 base2 Adams
*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한 수호는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연구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이 샘플 뭐야?-
다짜고짜 뱉어진 물음에 수호의 대답이 늦어졌다.
-이거 뭔데 맡겼냐?-
“뭔데요?”
-뭔지 내가 아냐? 그냥 샴푸랑 로션을 맡기진 않았을 테고.-
“샴푸랑 로션이긴 한데, 뭐 다른 거 없어요?”
-그니까 다른 거 뭐?-
“뭐, 환각 성분이나 마약 같은…. 아니면 수면제나 각성제 성분?”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니죠? 그런 건 없죠?”
-너 요새 약하냐? 심심해? 바쁜 사람한테 왜 장난질이냐?-
내질러진 짜증에 수호는 슬며시 웃었다. 결과는 이미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없으면 다행이네요.”
-다행? 샘플 열네 개 헤집은 사람한테 지금 다행이란 말이 나오냐?-
“죄송합니다. 다음에 밥 살게요.”
-너랑은 밥 안 먹어 인마. 또 뭘 처먹으려고. 끊어!-
안창호. 도산. 도산공원일까.
이우는 검색으로 부족해 학교 도서관을 뒤졌다. 안창호에 대한 자료를 전부 훑으며 메시지의 의미를 생각했다. 관련 장소는 아무리 찾아봐도 도산공원 외에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도산과 관련된 다른 장소는 상하이, LA 정도뿐이었고 한국이 아닌 장소를 자신에게 보내진 않았을 것이었다.
[안창호 diagonaldawn 7-9 base2 Adams]
diagonaldawn. 띄어쓰기가 잘못된 두 단어일까.
diagonal 대각선, 맞은편. dawn. 새벽, 동트기 전, 시작. 새벽의 맞은편. 시각을 의미하는 걸까. 이번에도 시간이 정해진 일일까.
7-9는 지난번처럼 날짜일까. base2는 뭘까. 기초. 기반. 기반 둘, 두 번째 기초. 지하 2층일까.
Adams, 미국 대통령 존 애덤스. 혹은 구약성서 최초의 인간. 이게 장소와 무슨 관련일까.
안창호와 애덤스. 인물 관련 단어가 두 개. 시각으로 추측되는 diagonaldawn. 날짜로 추측되는 7-9. 지하실 혹은 기초.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해보던 이우는 턱을 괴어 받쳤다.
추리를 좋아하고 수수께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재능은 별로 없나 보다 싶어 의기소침해졌다.
한국에서 삼 년째 지내고 있지만 집과 학교만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의 지리와 장소들에 대한 저변 지식이 너무 없다 보니 검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지리를 아프리카에 있는 영인보다도 몰라서 한국에 영인이 올 때마다 약속 장소도 정해주지 못하니.
문득 이우의 눈길이 핸드폰으로 갔다.
그나마 최근 들어 여러 장소를 다녀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에, 다양한 카페에, 한국에 들어온 삼 년 만에 처음으로 가본 영화관, 서점, 미술관, 아담하고 한적한 공원들.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우는 웃음을 물고 열람실 자리를 정리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한 기웅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멀어지며 전화를 받는 기웅을 수호가 빤히 쳐다보았다. 통화할 때마다 프라이버시 타령을 하는 기웅이었다.
수호는 흥, 콧방귀를 뀌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누군 뭐, 전화할 데 없는 줄 아나.”
구시렁대며 통화를 연결했다.
-형!-
환한 목소리에 수호의 입이 벙실 벌어졌다.
“학교야? 아, 밖이네?”
-네, 바람 쐬러 나왔어요.-
“바람 쐬러?”
-네, 도서관 답답해서요.-
“어딘데?”
-도산공원이요.-
수호는 걸음을 세웠다. 기웅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멀리 나왔네? 형이랑 가깝다.”
-아 그래요? 형은 어딘데요?-
“난 신사역 근처.”
-아… 외근이에요?-
“영업직이야 맨날 외근이지 뭐.”
-바쁘구나.-
수호는 전방을 쳐다보았다. 통화를 마친 기웅이 헤드폰을 끼고 건들건들 걷고 있었다.
“형이 잠깐 갈까?”
-와, 그래도 돼요?-
“되지 그럼. 영업의 백미가 또 땡땡이 아니겠어?"
수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십 분만 기다려.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수호는 빠른 걸음으로 기웅을 따라잡았다. 나란히 걸으며 눈치를 슬쩍 살폈다.
“여기 아무래도 별거 없다. 그지?”
기웅이 헤드폰을 목으로 내려 걸었다. 수호가 싱겁게 웃으며 말을 얹었다.
“형은 이쪽 더 볼래? 난 논현동 볼게.”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 기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수호는 허겁지겁 돌아섰다. 붕붕 뜨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선글라스 위로 시선을 빼고 수호를 빤히 보던 기웅이 소리쳤다.
“너 또 이어 꺼 놓으면 죽는다!”
수호를 발견한 이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스커피를 양손에 든 수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웬 바람?”
이우는 커피를 받아 입을 적시고 대답했다.
“그냥요, 답답해서요. 형은 괜찮아요? 시간 됐어요?”
“그럼, 괜찮으니까 왔지.”
“아 맞다, 이 근처는 차 어디에 세워요? 혹시 알아요?”
“차?”
수호는 공원 안을 괜히 둘러보며 물었다.
“차 가져왔어?”
“아니요, 택시 타고 왔는데.”
“잘했다, 이 동네 주차 드러워.”
“아…, 그럼 근처 주차장은 있어요? 세울만한?”
“요 옆에 하나 있….”
수호는 말을 흐리며 이우를 고쳐보았다.
“또 오게 여기? 이 멀리를?”
“아…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 모르니까. 근데 형은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찾았어요? 이 넓은 공원에서?”
수호는 목에 힘을 주고 대꾸했다.
“넓긴, 이까짓 공원 열 배 넓어도 찾지. 형이 또 사람 찾는 건 좀 하거든?”
이우는 웃음을 참으며 음료 빨대를 물었다. 길게 한 모금 머금어 꿀꺽 넘기고 목소리를 키웠다.
“아, 시원하다.”
수호는 기분이 들떴다. 이런 재미로 기웅이 허구한 날 땡땡이를 쳤는지.
한창 일할 시간에 슬쩍 도망 나와 이우도 만나고 커피도 마시니 뻐꾸기가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싶은 얼굴을 억지로 굳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산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이우가 물었다.
“동트는 시각이면 대충 네 시쯤 될까요?”
“동트는 시각?”
“네.”
“글쎄, 계절마다 다르지. 한,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네다섯 시.”
이우는 수호의 대답을 따라 말했다. 새벽 네다섯 시의 대각선이면 오후 네다섯 시일까.
“동트는 건 갑자기 왜?”
“그냥요.”
이우는 싱겁게 웃어 보였다.
수호는 이우의 표정을 살피다 말고 지나치는 남자와 개를 힐끗 돌아보았다. 사람만 지나가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훑고 있는 수호였다.
“새벽의 맞은편. 시 구절 같지 않아요?”
“너 설마 또 퀴즈 받았어?”
이우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수호는 인상부터 험하게 구겼다.
눈치를 살피던 이우는 슬며시 웃었다. 확실히 수호는 메시지에 대해 모른다. 괜한 추리를 하고 있던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네. 또 받았어요.”
“뭐?”
수호가 눈을 쭉 쨌다.
“아 진짜. 야! 그 교수 이름 좀 대 봐!”
“아…. 이름은 왜요.”
“왜긴, 쫓아가서 아주 박살을 내야지. 아니 왜 휴학한 애를 붙들고 야단이래?”
“뭐… 아, 학점 주려고?”
“참 내, 무슨 학점을 얼마나 대단히 주겠다고 들들 볶아?”
“뭐, 잘 주시려고 그러겠죠. 저 예뻐해서.”
엉성한 대답에 수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교수 새끼가 설마 이우를? 학점 주겠다고 꼬셔서?
수호는 불안한 눈초리로 이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 교수, 남자야 여자야.”
엉뚱한 질문에 이우는 수호를 고쳐보았다. 바로 웃음이 터졌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의 표정이 기묘했다.
“남자요.”
“에이 씨, 야! 남자 새끼가 왜 너한테…, 그니까, 왜 남자 교수가”
“남자가 왜 남자 예뻐하냐고요?”
말허리를 끊은 이우는 웃음을 꾹 물고 수호를 흘겨보았다.
“형은 나 왜 예뻐하는데요?”
“응?”
수호는 말문이 막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우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여 소곤거렸다.
“걱정 마요 형. 나는 형만 좋아하는데 뭐.”
이우는 민망해서 킥킥 웃으며 걸음을 서둘러 수호를 앞질렀다.
수호는 걸음을 천천히 멈췄다. 초록 공원 안에서 쨍하게 빛나는 흰 셔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없는 웃음이 흐르는 제 표정이 얼마나 이상한지는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