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 더워 죽겠는데 이게 웬 노가다냐.”
기웅은 몸에 들러붙은 땀 젖은 티셔츠를 훌렁 뒤집어 벗었다. 사흘째 땡볕 아래서 헤맸지만 한 팀도 포커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란히 땀에 절어 들어온 수호는 기웅의 등에 붙은 무전 라인을 떼며 대꾸했다.
“간만에 사람 많으니까 힘들긴 힘들다. 눈 빠지겠더라.”
기웅은 마이크를 뜯어내며 짜증을 부렸다.
“얼굴에 그냥 포커스라고 써서 다니면 좀 좋아?”
수호가 헛웃음을 흘리며 셔츠를 벗었다.
“말이 되는 소릴 좀 하세요.”
수호를 돌려세우고 등의 테이프를 뜯어내던 기웅이 고개를 앞으로 바짝 빼며 수호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좀 괜찮냐?”
수호는 가슴에 붙은 거즈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마이크를 뜯어내며 대꾸했다.
“괜찮지 그럼.”
“땀 좀 봐라.”
수호의 목덜미에 흥건한 땀을 손바닥으로 슥 닦아 올린 기웅은 인이어로 연결되는 전선을 확 잡아 뜯었다.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테이프가 순식간에 두둑 뜯겨나갔다.
“아! 씨, 아퍼!”
수호가 뒷덜미를 감아쥐며 눈을 부라렸다. 기웅은 수호의 어깨에 입을 쪽 맞추고는 킬킬거리며 샤워실로 도망쳤다.
“오늘 집으로 가도 돼?”
통화 중인 수호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영업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하는 이우와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을 궁리를 하던 끝에 씻고 자는 시간이라도 같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이우가 다른 오해를 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러웠다. 무섭다고 하던 이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우에게 어떤 무서운 짓을 할 수 있으려나 상상하다 보니 수호 자신도 저 자신이 좀 무서워졌다.
한참 속을 끓이며 망설이다가 말을 꺼낸 참이었다. 같이 있고 싶은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아, 오늘요?-
이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새벽에 도산공원을 살펴볼 계획도 있는데다가 월경 사흘째였다.
아무리 조심해도 신경이 쓰일 것 같아 망설여졌다.
메시지도 급했다. diagonal과 dawn이 서로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새벽시간을 배제할 수 없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도산공원을 다 훑은 상황이니 이제 새벽 4시를 확인할 차례였다.
지난번처럼 정해진 날짜가 되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문제라면 7월 9일만 생각하면 되겠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죄송한데 다음에 오시면 안 돼요?”
수호의 대꾸가 늦어졌다.
“죄송해요 형.”
-그래 그럼, 다음에 가지 뭐.-
“실은 제가….”
이우는 엉겁결에 튀어나간 말을 다물었다. 메시지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면 결국 다 알게 될 텐데. 알게 되면.
-이우야.-
조용하던 수호의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니가 왜 죄송해. 형이 바빠서 미안하지.-
잠시 말을 멈춘 수호의 목청이 커졌다.
-대신! 낼모레 저녁은 같이 먹기. 알았지?-
이우는 콧등이 찡해지는 자신이 우스웠다. 수호가 앞에 있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코끝을 비볐다.
-삼 팀 포커스 추정. 일행 셋. 을지병원 사거리 앞-
기웅의 무전이었다. 해가 떨어진 이후 따로 움직이고 있던 수호는 걸음을 멈췄다. 도산사거리를 막 건너 학동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압구정역 방면 도보 이동 중. 위치 맵 확인 요.-
“김 대립니다. 따라붙겠습니다.”
건너왔던 횡단보도를 되돌아 건너며 무전을 넣은 수호는 뛰기 시작했다.
수호는 뜀걸음을 이으며 전면으로 보이는 대로를 노려보았다.
“삼 팀 김 대립니다. 영화관 지나서 돌아 나갑니다. 마주 보겠습니다.”
-쫄랑아, 극장 이백 미터 전방. 빨간 모자, 일행 포함 총 넷.-
김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 퍼센트 확인되면 바로 작업해. 민간인들 신경 쓰고.-
“네, 알겠습니다. 강 대리님 오십 미터 전방부터 앞질러 줘.”
수호는 영화관 건물을 지나쳐 대로변 인도로 좌회전했다. 길을 메운 사람들의 얼굴 위로 시선을 옮겼다.
기웅의 얼굴이 보이자 뒤쪽으로 초점을 넘겼다. 빨간 모자를 찾는 수호의 시선이 허공을 급하게 더듬었다.
“빨간 모자 맞습니까.”
수호의 속삭이는 무전에 기웅은 걸음을 늦추며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바닥을 훑으며 시선을 뒤로 올렸다. 잠시 굳었던 시선으로 주변을 급하게 훑었다.
수호는 기웅에게 다가갔다. 약이 바짝 오른 기웅의 옆을 천천히 스치며 말을 건넸다.
“압구정 싫다 진짜. 골목 너무 많아.”
“포커싱 실패, 주변 탐색 예정”
마이크에 대고 낮게 말한 기웅이 걸음을 옮겼다. 수호는 간격을 두고 뒤따르며 행인들이 넘쳐나는 밤거리 위로 시선을 굴렸다.
새벽 시간이었음에도 공원에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다. 술에 취해 앉아있거나 술을 마시며 앉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으로만 다니며 주변을 살폈다. 깊은 새벽에도 사람이 있는 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긴 하겠나 싶었다. 밀폐된 공간은 도산기념관뿐인데 그곳에서 일이 생길 예정일까.
구석에 세워진 컨테이너를 발견한 이우는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작은 컨테이너는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주변을 힐끗 살피고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쓰다 남은 시멘트 포대와 페인트 통, 청소 도구, 염화칼슘 포대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이우는 방향을 돌려 다시 공원 안을 걸었다.
으슥한 구석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입을 맞추며 서로의 몸을 더듬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시선을 치우며 걸음 방향을 바꿨다.
느린 걸음을 이으며 수호를 떠올렸다. 한숨이 웃음과 함께 흘렀다.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 어떤 색의 감정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친구 이상의 관계를 수호가 원하게 된다면, 남자 만나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만에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면, 어떤 말로 거절해야 할까.
남자랑 그럴 생각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면 될까. 거절하면 멀어질까. 수호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면, 거절하지 말아야 할까.
실없는 웃음이 킥 터졌다. 이우는 뜨거워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왜 수호와는 적정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걸까. 남장인 자신을 보고 좋다는 남자를 처음 봐서 그러는 건지, 수호라서 좋은 건지.
이우는 뜨거운 뺨을 비비적대며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을 걸었다. 동이 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하늘이 훤해졌다. 시계를 보았다. 오전 5시 42분.
이우는 공원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에 택시가 있으려나 싶었다. 올 때처럼 콜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며 공원을 벗어났다.
남자 하나가 공원 입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우와 남자는 서로 힐끗 쳐다보며 지나쳤다.
몇 걸음 더 걷던 남자가 문득 걸음을 세웠다. 이우를 다시 돌아보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이우는 엉겁결에 걸음을 멈췄다.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얼떨떨하게 보다가 문득 숨을 죽였다.
쌍꺼풀 수술 흉터가 심하게 남은 눈매. 강남순환고속도로 공사장 앞에서 마주쳤던 남자였다.
이우는 굳어버렸다. 도로공사현장에서 시간을 멈추고 도망쳤던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던 얼굴이라 기억하고 알아봤을까.
초조해진 이우는 두려움을 숨기며 먼저 걸음을 뗐다. 사라지는 순간을 두 번이나 보여주는 건 곤란했다.
뒤통수의 온 신경이 남자에게 쏠려있었다.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슬쩍 뒤를 돌아본 순간 눈이 질끈 감겼고 세상이 멈춰졌다.
남자는 가던 방향을 바꿔 이우를 따라오고 있었다. 멈춰진 눈동자가 이우의 뒤통수를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이우는 대로변으로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새벽의 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무작정 내리막 방향으로 뛰며 공원으로부터 멀어졌다. 길 반대편에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는 택시를 발견하고 텅 빈 도로를 뛰어서 가로질렀다.
택시 안으로 들어앉아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따라올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뒷유리 밖을 초조하게 돌아보며 시간이 다시 흐르기를 기다렸다.
“하윽, 깜짝이야!”
택시기사가 기겁하며 고함을 쳤다.
“아저씨, 빨리 출발이요. 빨리.”
턱이 빠진 듯 택시기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출발이요, 빨리요.”
이우의 다급한 채근에 차를 출발시킨 택시기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언제 탔는지 모르겠네. 나 졸았나 봐?”
“그러셨어요?”
“어디로 모실까?”
“남태령역 근처요.”
“남태령.”
택시기사는 핸들을 돌리며 룸미러를 연신 힐끗거렸다.
이우는 떨리는 속을 누르며 마주친 남자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인상적인 쌍꺼풀 모양, 작은 이목구비. 분명히 도로공사 현장 앞에서 마주쳤던 남자였다.
수호는 가슴이 묵직한 기분에 눈을 떴다. 가슴의 거즈붕대를 덮고 있는 손. 익숙한 냄새.
기웅이 언제 와서 자고 있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뒤척이며 돌아눕는 기웅을 힐끗 쳐다보고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기웅이 부스스하게 실눈을 뜨며 수호를 돌아보았다.
“몇 시냐.”
수호는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여섯 시 넘었어.”
방의 전등을 켜자 기웅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얼굴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자자, 좀.”
“그러게 왜 맨 날 내 방으로 와. 형 방 가서 더 자든가.”
수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챙기며 옷장을 열었다.
침대 위로 털썩 쓰러지고 나서야 이우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남자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던 수호의 서늘한 눈매가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며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6시 20분.
연락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일까. 집으로 오겠다는 말을 어렵게 꺼낸 걸 알면서도 거절했는데.
핸드폰 액정을 비벼대며 잠시 망설이던 이우는 메시지를 보냈다.
― 형아~ 혹시 일어났어요?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수호는 샤워부스 밖으로 튀어나갔다. 메시지를 들여다본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형아. 어딘가 애교스럽게 느껴지는 호칭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 당연히 일어났지. 왜 늦잠 안 자고?
― 현이우 : 그냥 깼어요.
― 그랬어? 눈 뜨자마자 웬일로 메시지?
― 현이우 : 그냥요.
수호는 짧은 대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냥. 자신의 기분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 현이우 : 그냥 보고 싶어서요.^^
더해진 메시지에 수호는 입을 벙실 벌렸다. 실없이 웃으며 메시지를 적었다.
― 나도 보고 싶다.
― 현이우 : 오늘 야근이죠?
― 응.
― 현이우 : 그럼 내일은 와서 자고 갈 수 있어요?
수호는 이어진 메시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쓸데없이 두근거리는 속으로 답을 적었다.
― 가도 돼? 내일은 시간 괜찮아?
― 현이우 : 네, 저녁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집에서 뭐 시켜 먹을까요?
“그놈의 핸드폰 좀 그만 쳐다봐.”
수호는 숙였던 고개를 세웠다. 좌회전 신호를 받은 기웅이 핸들을 꺾으며 구시렁거렸다.
“연애 좀 한다고 티를 내요, 티를.”
“연애는 무슨. 나 게이 아니거든?”
수호는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이우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또 읽고 있던 참이었다.
“허이구, 그게 연애 아니면 뭐가 연애냐? 하루 종일 문자에 전화에 틈만 나면 만나러 나다니고 입술 쭉쭉 빨아대고.”
“에이 증말, 내가 언제 또 쭉쭉 빨았어? 형이 봤어?”
“왜, 남자애 데리고 연애하는 건 밝히기가 좀 그러냐?”
“그러는 형은! 나 연애하는 거 그렇게 잘 아는 분이 왜 자꾸 남의 남자 방에 와서 자는데?”
“남의 남자?”
기웅이 혀를 찼다.
“참 내, 내가 너랑 같이 잔 게 하루 이틀이냐? 삼 년을 그러고 살았는데 왜 갑자기 남의 남자? 내 남자지.”
“내가 왜 형 남자냐!”
버럭 내질러진 고함에 기웅은 기가 막혀 눈을 부라렸다.
“이게 근데 왜 자꾸 짜증이야?”
수호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기며 대꾸했다.
“형이 먼저 짜증냈거든?”
기웅은 전방신호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같이 잔다고 내가 저한테 뭔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뭔 짓 좋아하네, 아으 드럽게 남자들끼리….”
말끝을 흐린 수호는 깊은 한숨을 흘렸다. 답답해지는 속을 누르며 핸드폰 액정 속 이우의 글자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