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대교 앞에서 차를 돌려 도산대로로 다시 올라선 이우는 맥이 빠졌다. 도산대로 변의 건물들과 안내판들을 꼼꼼히 훑으며 세 번이나 왕복한 터였다.
받은 단어들과 연관된 것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조수석 위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수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메시지의 정해진 날짜가 칠월 구일이라면 시일이 여유롭지 않은데 아직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수호와의 약속까지 취소하고 나오긴 했지만 괜한 짓을 했나 싶어 후회하고 있었다.
이우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 건물과 골목 사이를 힐끗거렸다. 골목 안쪽의 간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심코 보고 지나친 이우는 잠시 멍했다. 도로변으로 급하게 차를 붙여 세웠다.
[새벽집]
새벽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냥 지나칠지 내려서 확인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골목 안으로 차를 돌렸다.
이우는 새벽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드문드문 지나고 있는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새벽집을 비롯한 주변 식당에서는 저녁 손님을 맞는 냄새와 소리가 분주하게 새어 나왔다.
유리 섀시 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기와 국밥을 파는 평범한 식당이었다. 오래된 집을 개조한 듯 보이는 식당은 허름했지만 손님은 꽤 있었다.
이우는 2층 건물인 식당 외관을 살피며 지하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겉보기엔 지하는 없을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 고민하던 이우의 눈에 진청색 표지판이 들어왔다. 새벽집의 도로명주소가 적힌 안내판이었다.
[도산대로 101길 6]
주변 건물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새벽집의 정 맞은편 건물은 7이었다.
대각선 맞은편 건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소는 9였다.
이우는 멍하게 메시지를 떠올렸다. 도산대로의 새벽집, 맞은편은 7번지, 9번지. diagonal dawn, 새벽의 맞은편. 7-9는 이걸 의미하는 걸까.
갑자기 뒤에서 뻗어진 헝겊에 이우의 코와 입이 틀어 막혔다. 호흡을 통해 매캐한 무언가가 콱 들어오며 숨을 막았다.
이우는 놀랄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
수호는 등을 때리는 물줄기 온도에 집중했다. 한여름으로 치닫고 있는 더위에도 따뜻한 물이 좋은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눈앞에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에 초점을 모았다.
문득 떠오르는 향기를 가만히 되짚었다. 샤워부스 밖으로 눈을 돌려 핸드폰을 올려둔 선반을 쳐다보았다.
어제 이우에게 짜증 섞인 메시지를 보내놓은 뒤 수호는 밤늦도록 핸드폰을 쥐고만 있었다.
집에는 몇 시에 들어갔는지, 늦게라도 자신이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한 것뿐이었지만 연락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한 감정이었다.
속마음과 다른 행동, 원인이 불명확한 투정, 하루라도 보지 못 하면 잃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한 심정.
그런 것들이 수호에겐 이제껏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로만 느껴졌었다. 유치했다.
만나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이 유치해지던 여자들이 귀찮아서 연애도 금방 싫증이 나곤 했었다.
어젯밤의 저 자신을 되짚어보던 수호는 자신은 더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면 연락을 해 보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망설이기만 하는 걸까. 자존심 지키겠다고 유치하게 이러는 걸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다 똑같이 유치해지고 마는 걸까.
“한양 오 차부터 볼까?”
기웅이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
오전에 새로운 뻐꾸기가 떴다. 사흘 전 잡아들였던 포커스의 꼬리를 물고 나온 영업 건이었다.
“응.”
건성으로 대답한 수호는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 두어 시간 전에 보낸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 일어나면 연락해^^
생전 안 쓰는 눈웃음치는 이모티콘까지 붙여가며 메시지를 보냈건만 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보내볼까 싶었다, 너무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다, 오늘 저녁은 야근이라 못 만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이우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연락을 안 하고 버티는가 싶어 약이 올랐다.
이우도 자기를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나 싶어 울적해졌다.
수호는 정신없이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유치한 감정에 진이 다 빠지고 있었다.
“눈으로 전화하냐? 전화는 입이랑 귀로 하는 거 까먹었어?”
기웅의 통박에 수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진짜 싫다.”
짜증 섞인 푸념에 기웅이 수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방의 신호를 잠시 내다보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 싸웠는데.”
수호는 또 한숨을 길게 흘렸다.
“그냥. 별것도 아니야.”
“별것도 아닌데 왜 죽을상만 하고 있어? 옆에 있는 사람까지 스트레스 받게.”
수호는 기웅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맞자 억지로 웃어 보였다.
“형은 참 대단해? 나 맨 날 성질 떨고 있는 거 어떻게 참나 몰라?”
싱거운 말투에 기웅이 코웃음을 쳤다.
“참긴 누가 참아? 나 안 참는다?”
“에이, 형이 나 참아주는 거 다 알지.”
대꾸 없이 도로를 내다보던 기웅이 덤덤하게 말했다.
“넌 아직 멀었다.”
기웅은 신호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화도 안 나. 참을 게 없어.”
수호는 기웅의 목소리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나면 났지, 상대한테 화 안 나. 만지면 부서질까봐 손대는 것도 무서운데 무슨 수로 화를 내?”
수호는 도로 위 허공으로 시선을 흘렸다.
이우에게 더 깊이 다가가고 싶은 기분이 어쩐지 무서웠었지, 이우가 부서질까봐 무서웠을까. 아니면 먼저 다가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걸까.
“한마디로, 사랑받는 사람이 최고 권력자다, 이 말씀이야. 알겠냐?”
다시 커진 목소리에 수호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웬일로 진지한 척한다 했지.
“최고 권력자는 뭐야 또. 하여간 형은 이상한 소리 참 잘해?”
“너 걔 못 이긴다고 이 답답아. 이기지도 못할 싸움 그만하고 빨리 전화나 해 줘. 우리 새끼 고양이 속 타겠다.”
수호는 손에 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 어제 형이 화내서 미안. 섭섭했지? 너 보고 싶어서 그랬어. 메시지 보자마자 연락하기^^
파리떼 소리가 머릿속에 들끓었다. 심한 갈증에 목구멍으로 마른침도 넘어가지 않았다.
깜깜한 시야. 퀴퀴한 냄새. 어디일까.
-제대로 미쳤구만.-
메아리처럼 흩어지는 말소리에 이우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신경을 귀에 집중하자 머릿속을 헤집던 파리떼가 고막으로 기어 내려와 청각을 어지럽혔다.
-진짜라니까 씹새야.-
-그걸 말이라고. 씨발년아 넌 그만 좀 빨어. 그렇지 않아도 미친 새끼가.-
이우는 흐트러진 정신을 집중해 기억을 더듬었다.
지린내가 진동하던 화장실…, 고함, 욕지거리하던 남자….
집중이 자꾸 흐트러졌다. 고막 위를 기어 다니는 파리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파리를 쫓고 싶었다. 팔에 억지로 힘을 넣자 전신의 감각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불에 달군 바늘에 찔리듯 온몸이 뜨겁게 따끔거렸다. 살갗 위로 갑작스럽게 흐르는 고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머릿속의 파리 소리가 굉음으로 바뀌었다. 도로공사현장의 그것만큼 요란한 굉음이 골을 쥐고 흔들었다. 이우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삼 팀입니다. 한양 오 차 맞은편, 청담사거리 방면 차량 이동 중.”
기웅은 무전을 넣으면서 직진 신호를 받았다. 휘어진 곡선도로 위를 천천히 주행하며 인도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주차가 지랄이다 진짜.”
구시렁거린 기웅이 수호를 힐끗 보았다. 수호는 여전히 손에 쥔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냥 전화해!”
버럭 질러진 고함에 수호가 흠칫 목을 움츠렸다.
“형 있어서 못해? 형 내려?”
“아니야 그런 거.”
“해 빨리. 내가 해 줘? 하루 종일 일도 집중 안 하고. 포커스가 쫓아와서 잡아가라고 해도 못 잡겠다 인마.”
눈치를 슬슬 살피던 수호는 핸드폰화면을 열며 웅얼거렸다.
“이 씨, 좋아하면 화도 안 난다더니.”
“내가 널 왜 좋아해 인마! 답답한 새끼를!”
-고객님의 전원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
수호는 얼떨떨해서 핸드폰을 고쳐보았다. 전화를 다시 걸었다.
여전히 같은 메시지를 들은 수호는 이를 꽉 물었다. 여태 버틴 저 자신한테 분이 치밀었다. 그깟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왜? 안 받아?”
수호는 생수병을 집어 바짝 마른 입안에 들이부었다. 기웅의 인상이 덩달아 찌푸려졌다.
“그러게 진작 좀 하지 답답한 새끼. 쫄랑이가 아니고 답답이구만.”
기웅은 짜증스럽게 구시렁거리며 골목으로 차를 돌렸다.
수호는 딱딱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발레파킹을 맡기고 걸음을 떼던 기웅이 수호를 째려보며 다가섰다.
“너 그러고 사람 쳐다보지 마.”
수호는 굳은 얼굴로 기웅을 쳐다보았다.
“무서워서 다 도망가겠어. 니가 포커스 같다 딱 험악한 게. 으이구.”
말끝에 수호의 양볼을 쭉 늘여 꼬집은 기웅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기웅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잠시 서 있던 수호는 맥이 빠진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지 말고 한번만, 응? 아깝게 그냥 보내냐?-
이우의 귀에 다시 목소리가 닿았다.
-됐어 새꺄, 건들면 죽인다잖냐. 한 사장 벌써 오고 있대.-
-어? 에이 씨팔, 부지런도 하네 썅, 기집애인 거 진작 알, 참내, 오줌 싸는 거 아니었으면 깜빡 속았을 거 아냐? 썅년. 사기칠 게 없어서 기집애가, 야, 저년 저거 그거 아니냐? 트렌스젠더? 아, 그게 아니라 그 뭐냐 그, 레즈비언?-
-아 새끼 존나 시끄럽네, 남이야 레즈비언이든 게이든 냅두고 꼴리면 옆방 가 새꺄, 거기 기집애 뒀다 뭐……, 야, 한 사장 다 왔다고 카톡 왔다. 씨발, 저거 건드리면 죽인다고 또 잔소리다. 여기 누구 발정 난 새끼 있는 줄 아나.-
-저년 뭔데 계속 그러냐?-
-내가 아냐? 막대기 한 번 더 박아놓고 나오란다. 그만 떠들고 나갈 준비나 해.-
멍하게 흩어지던 말소리가 끊어졌다. 이우는 멍한 정신을 집중했다.
깜깜하다. 퀴퀴하게 흐르는 희미한 냄새. 느꼈던 공간. 어딜까.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된 일일까.
웅성거리고 왱왱거리는 잡음이 신경을 긁어댔다.
이우는 억지로 정신을 모아 시계를 떠올렸다. 흐르는 초침에 집중했다.
고막을 긁던 잡음이 갑자기 커졌다. 초침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겨를도 없이 정신이 다시 흩어졌다.
골 안에서 끓는 파리떼 소리. 꼬챙이로 쇠를 긁는 소리. 킬킬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
이우는 끔찍한 잡음들을 애써 무시하며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의미 없는 욕지거리, 걸음 소리.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 따끔한 느낌.
조금 전 느꼈던 따끔거림과 달랐다. 실제적인 통각, 뭔가에 찔린 걸까.
이우는 손목 근처에서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팔목 안으로 뭉쳐진 무언가가 서서히 움직였다. 똬리.
똬리가 느리게 풀어진다. 뱀. 팔목을 조여 온다.
팔의 혈관을 헤집고 미끄러지며 기어오른다. 혈관과 근육을 찢어 뚫고 가슴으로 기어들어간다. 심장 앞에 이르러 뭉친다.
이우의 맥박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뱀의 머리, 심장을 뚫었을까.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가려는 듯 펄떡펄떡 널을 뛰었다.
숨이 꽉 틀어 막혔다. 귓가가 뜨겁게 타는 느낌. 온몸이 침에 찔리는 고통. 뇌를 때리는 끔찍한 굉음.
눈동자가 까무룩 뒤로 넘어갔다.
낄낄… 킬킬킬… 웃는 사람들.
누군가 구경하고 있다.
비웃고 있다. 수군거린다. 손가락질하고 있다.
선생님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갑자기 없어진 문제일까.
학교 옆 보석 숍이 귀신처럼 털린 얘기일까.
졸업시험 문제를 훔쳤다고 그러는 것일까.
여자애를 당사자도 모르게 임신시킨 범인이라고 그러는 건지.
은행 앞을 지키던 경비원을 죽인 걸 두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솔직히 말해.
너지? 나만 알고 있을게. 맞지?
왜… 왜 그런 농담을 해. 나 아니야. 내가 그러지 않았어.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너 아니면 말이 안 돼. 너야 너.
아니야. 나 아니야. 믿는다더니, 부럽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 말 좀 들어 봐. 제발. 난 아니야. 믿어줘. 제발.
왈칵 눈물이 터졌다.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이 정신없이 덜덜거리는 얼굴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