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 꼭 알아야 하는 거야?”
“그럼 블레드 선배는 알지?”
“응. 이곳 학생회장이잖아.”
“그거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다른 거 뭐?”
“윌로우 그룹을 몰라?”
“윌로우? 그게 뭔데?”
“…….”
카르젠의 대답에 류네아는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고, 그것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대 규모인 윌로우 그룹을 모르는 거야?”
모든 분야에 있어 최고의 자리에 있는 윌로우 그룹.
그 이름만으로도 경제의 흐름이 바뀐다고들 한다.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것에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그해 세계의 경제가 달라졌다.
“블레드 선배는 그런 윌로우 그룹의 후계자야. 소문에는 지금도 이미 윌로우 그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이 그에게 있다고들 하지.”
윌로우 그룹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창립일이 언제인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 전부터 ‘윌로우’라는 이름이 존재해 왔을 뿐이다.
세계에 불황이 닥치고, 경제에 위기가 찾아와 대부분의 기업들이 쓰러졌을 때도 거대한 거목처럼 타격을 받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 온 것이 바로 ‘윌로우’라는 이름을 가진 기업들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윌로우 그룹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회장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얼굴도, 나이도, 심지어 그룹의 주인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말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윌로우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동시에 여러 명이 말이다. 바로 블레드와 밀드란이 그들이었다.
세상은 그들의 존재에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윌로우 그룹의 후계자들. 그 문장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졌다.
더구나 잘난 외모를 가지고,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특히 정식 후계자로 이름이 난 블레드에 대해서는 그가 입은 옷 하나에도 패션의 흐름이 달라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습을 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례차례 엘브란스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보안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는 기자들이라도 그들의 사진 한 장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아! 일리언! 그거 제가 숨겨 놓은 초콜릿이죠!”
“맞아.”
“으악! 제가 나중에 아껴 먹으려고 숨겨 놓았던 건데!”
“그래서 어쩌라고.”
“뱉어내요! 뱉어내!”
“지랄.”
“……저기…….”
블레드와 밀드란에 대해 설명을 하던 류네아는 자신의 말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야!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처음부터 관심이 없던 일리언이라는 녀석은 내버려 두더라도, 질문을 던졌던 저 녀석은 대체 뭐냔 말이야!
“아, 미안. 계속해.”
“뭘 계속해! 다 했거든!”
“그래? 고마워.”
“그게 다야?”
“응?”
“블레드와 밀드란 선배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반응이 그게 다냐고.”
“응. 뭔가 다른 반응을 해야 하는 거야?”
“으악! 짜증나! 당연하지! 어떻게 반응이 그렇게 담백할 수가 있어! 적어도 ‘우아!’ 내지는 ‘이야! 대단해!’ 정도의 감탄사를 내뱉어야 정상…….”
“시끄러.”
“……!”
류네아는 자신의 얘기를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카르젠의 모습에 화를 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들려오는 일리언의 차가운 음성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더럽게 돈 많다는 거 아냐? 뭔 말이 그렇게 길어?”
“…….”
그리고 이어지는 일리언의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세계적인 대기업인 윌로우 그룹을 한낱 돈만 아는 사채업자 정도로 여기는 그 말에, 류네아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황당한 시선으로 일리언을 바라보았다.
“우아! 그런 거였어! 그 선배들 돈 엄청 많구나! 대단하네!”
게다가 자신의 긴 설명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카르젠까지 일리언의 말에 감탄사를 내뱉자, 류네아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니들 정체가 뭐야?”
“카르젠이라니까.”
“알 거 없어. 꺼져.”
류네아는 방긋방긋 웃는 카르젠과, 귀찮다며 벌레 쫓듯 손을 내젓는 일리언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피, 피곤해.’
그리고 그녀는 저들과의 잠깐 동안의 대화가 몇 시간 동안 마라톤을 한 것보다 더 피곤하다는 것을 느끼며, 책상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리아, 쟤들이랑 놀지 마. 무지 피곤해.”
류네아는 책상에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앙증맞게 생긴 동양인 여자, 리아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응? 으, 응.”
리아는 류네아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선을 조심스럽게 옮겨 일리언과 카르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마침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일리언과 시선이 마주치자 금세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
일리언은 시끄러운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는 이내 시선을 바로 하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을 뿐이었다.
“저, 저기…….”
“……?”
하지만 잠시 후,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리아로 인해 일리언은 다시 책에서 시선을 뗐다.
“아! 어제 날 완전히 무시하고 사라졌던!”
“죄, 죄송합니다!”
일리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던 리아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르젠의 모습에 움찔했다.
그러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니, 뭐,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카르젠은 깊이 고개를 숙이는 리아를 보며 오히려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내 이름은 카르젠. 넌?”
“리, 리아라고 합니다.”
“어느 나라?”
“한국.”
“아, 한국.”
카르젠과 잠시 인사를 나누던 리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미 자신들의 얘기에 신경을 끊은 채 책을 읽고 있는 일리언을 바라보았다.
“저기.”
“또 뭐냐.”
“저기…… 그러니깐.”
“저기고 거기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일리언은 우물쭈물하는 리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뭘?”
“그러니까 어제.”
“어제?”
“어제 일에 대해 소문내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네?”
“너한테 감사 받을 일 따윈 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그, 그러니깐.”
리아는 어젯밤 내내 자신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것을 염려하며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당한 남자들이야 여자에게 당했다는 말을 쪽팔려서라도 하고 다니지 않을 테지만, 그 모습을 본 일리언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도 얌전한 겉모습과는 달리,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화가 나거나 당황스러워지면 억제하지 못하고 다른 모습이 튀어나와 버리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이상한 소문이 돌아 집단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평소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수줍음 많은 성격 또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걱정에 휩싸여 밤을 지새워야 했던 리아는, 아침에 일어나 이곳으로 향하며 어제와 다름없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함께 소문을 내지 않은 일리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게…… 어제 일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그러나 큰 용기를 내서 일리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던 리아는 어제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자신에게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그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고맙다고 인사 하는 사람을 그렇게 무안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류네아가 다시 다가와 일리언에게 화를 내며 따지기 시작했다.
“무안? 내가 무슨 무안을 줬다는 거냐?”
“고맙다고 하면 그냥 알았다고 받으면 되지! 왜 사람을 무안을 주냐고!”
“그럼 넌 길 가다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 무작정 고맙다고 하면, 그냥 ‘네.’ 하고 인사 받고 지나가나 보지?”
“왜 모르는 사람이야! 네가 어제 리아가 덩치 큰 남자 네 명을 한 번에 쓰러뜨리는 모습을 봤다며! 그걸 소문 내지 않아서 고맙다고 하는 건데, 그걸 왜 안 받아주는 거야!”
“류, 류네아!”
“응? 헉!”
“…….”
“…….”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은 류네아의 말에 놀란 눈빛으로 리아를 바라보았고, 리아는 그들의 시선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빛으로 류네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또한 카르젠은 그게 진짜였냐는 듯 일리언과 리아를 번갈아 보았고, 일리언은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네아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며 한 마디 건넸다.
“제발 부탁이니 바보짓은 니들 자리에 돌아가서 해라.”
“흑…… 흐흑!”
“리, 리아!”
끝내 리아는 울먹이며 교실을 뛰어나갔고, 류네아는 황급히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시끄러운 녀석들이군.”
일리언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리아와 류네아를 보며 고개를 살며시 내저은 뒤,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조용히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
“그러니깐 이제 더 이상 니들이랑 상관없고 싶다고!”
“아, 왜 이러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다 같이 한번 친해져 보자고.”
뻔뻔함! 그 단어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이가 있다면 일리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재 자신의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서 있는 류네아를 가리킬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일리언은, 얼마 후 자신의 방을 찾아와 무작정 안으로 들어오는 류네아의 행동에 와락 표정을 구겼다.
거기다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리아의 모습에 더욱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어때요. 여기들 와서 앉아.”
하지만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는 카르젠으로 인해 일리언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낯가림이 심한 리아 대신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우연히 니들이 밀드란 선배와 얘기하는 것을 보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 뭐야.”
잠시 후, 일리언을 제외하고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리언은 귀찮은 인연은 만들고 싶지 않은 듯 그들에게 신경을 끊은 채 책상에 앉아 여전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럼 류네아가 리아의 룸메이트?”
“응. 리아와는 첫날에 바로 친해졌어.”
리아와 류네아는 현재 같은 기숙사 방을 쓰고 있었다.
망설임이 없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류네아는 수줍음이 많아 자신에게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는 리아에게 먼저 다가가, 그녀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류네아에게 편한 마음을 가지게 된 리아는 자신의 얘기도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고, 일리언과 있었던 일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에 류네아가 감사의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리아를 대신해 말을 전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 그 얘기나 계속해 봐.”
“에?”
“무슨 얘기요?”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세 사람은 순간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일리언의 음성에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윌로우.”
“뭐? 윌로우 그룹?”
“아니, 윌로우라는 성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