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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기사
작가 : 호이지
작품등록일 : 20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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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을 위하여
작성일 : 17-06-01     조회 : 493     추천 : 0     분량 : 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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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형님과 내 화살은 똑같은 것이었다. 형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백발백중의 명궁이고, 실제로 멧돼지의 오른쪽 눈을 꿰뚫은 화살은 형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형님은 놈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형님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해갔다. 막다른 길에 몰린 맹수는 포탄처럼 사냥개들을 향해 돌진했다.

 

 나는 기다렸다.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방해하지 않을 때까지.

 공포에 질린 놈이 사정거리 안으로 덤벼들 때까지.

 

 존경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멧돼지를 잡은 사람은 나였다. 문제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형님의 활약이라 입을 모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오늘의 승자에게 약속되었던 활이 형님의 손에 떨어질 때까지도 상황을 몰랐다. 뒤늦게 강우를, 민하를, 형님의 호위무사인 하란까지 붙들고 늘어졌지만 이미 배는 풍악을 울리며 떠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무사들을 밀치고 뛰쳐나왔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아버지나 형님이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다행히 연무장은 비어 있었다. 사냥에 동원된 무사들이 각자 포상을 받거나, 휴식을 취하러 간 덕분이었다.

 

 좌대에 놓인 목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면을 향해 똑바로 겨눴다. 검 끝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 이곳에는 가상의 적이었다. 예법이나 형식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다.

 

 

 “하압!”

 

 

 목도가 허공을 찢고 가르면서 춤을 추었다. 텅 빈 공간을 거친 숨소리가 가득 채웠다. 숨이 가쁘고 어깨가 뻐근해질 때까지 휘둘렀지만,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억울했다. 여전히 분하고 화가 났다.

 

 사실 활 같은 건 별로 상관없었다. 아버지의 하사품이니만큼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까짓 거, 내가 받았어도 형님이 원한다면 기꺼이 내놓았을 터였다.

 

 슬픈 이유는 그들 때문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

 아버지와 형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크게 내딛으며 적의 급소를 찌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하였다.

 

 

 “그러다간 몸이 상하십니다.”

 

 

 민하의 잘못은 아니지만,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너도 내가 거짓말 한다고 생각해?”

 “아닙니다.”

 “그러면 왜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했어?”

 “어차피 큰 도련님의 물건이었으니까요.”

 

 

 민하는 담담했다.

 

 

 “사냥 대회는 명분일 뿐이지요. 모르셨습니까?”

 

 

 손에서 힘이 빠졌다. 민하가 다가와 목검을 받아 들었다.

 

 

 “보는 눈이 많은 집안입니다.”

 “…….”

 “우승자에게 주는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도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거랑은 다른 문제야!”

 “다르지 않습니다.”

 

 

 민하는 단호했다.

 

 

 “포상을 받을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큰 도련님의 실력이야, 모르는 자가 없고…….”

 “그럼 나는?”

 

 

 화가 치밀었다.

 

 

 “너도 내가 그렇게 못나 보이냐? 평생 형님 발끝도 못 쫓아갈 것 같아?”

 

 

 민하가 눈을 깜박였다. 달빛에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민하는 늘 침착했다. 어른스러운 그가 좋았지만, 가끔은 그 침착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웠다. 나는 소리쳤다.

 

 

 “됐어! 빤한 질문을 괜히 했네. 대답하기 곤란했을 텐데 미안하다.”

 “도련님께서 왜 그리 화를 내시는지 압니다.”

 “뭐?”

 

 

 민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잡과 응시, 거절당하셨지요?”

 “야!”

 “그러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펄펄 뛰실 거라고.”

 “입 다물지 못해?!”

 “다시 생각하십시오, 도련님. 명문 이가의 차남이 잡과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습니다. 현직에 계시는 큰 도련님의 얼굴에도 먹칠하는 꼴입니다. 똑똑하신 분이,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십니까?”

 

 

 민하가 왜 저렇게 말하는지 알았다. 녀석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았다.

 

 올해 나는 열다섯 살 생일을 맞았다. 아버지는 나를 불러다놓고 물었다. 어느 시험에 응시할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는 거였다.

 

 빠른 건 아니었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형님도 열다섯 살에 진로를 결정했다.

 어려서부터 뭐든 잘했던 형님은 어느 쪽이든 입맛대로 고를 수 있었다. 형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문과를 선택했고, 삼 년 만에 보란 듯이 급제했다. 장원이었다.

 

 아버지의 뜻은 이랬다. 형님이 문과에 급제했으니, 나는 무과에 응시했으면 하는 거였다. 형제가 나란히 장원을 한다면, 못 배웠다는 장사꾼 집안의 체면이 서고도 남는다.

 

 나는 형님보다 공부를 못했다. 사실 공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형님을 못 따라갔다. 그나마 내세울 거라면 활솜씨가 꽤……괜찮은 정도였다.

 

 은연중에 아버지는 기대했을 터였다. 장남은 남달리 머리가 좋고, 차남은 무예가 뛰어나니 둘 다 대접받는 관직으로 밀어 넣고 싶었을 터였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둘 중 어느 길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혹시 종교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항구도시를 통해 들어온 천주학이 널리 퍼져 나라가 떠들썩했다. 아버지는 눈을 부라리며 일갈했다. 허튼 생각한다면, 시험이고 뭐고 머리를 박박 밀어서 절간에 처넣겠다고.

 

 나는 종교에 심취한 게 아니었다. 다만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

 

 형님과 내게 서양 말을 가르쳐주러 집에 드나드는 올렉은 서역에서도 알아주는 기술관이었다. 그는 내가 몰래몰래 대장간에 드나들며 어깨 너머로 재주를 익히는 걸 놀라워했다. 서툰 실력으로 그린 단면도를 봐주고, 짚어주고, 고쳐줬다. 실전에서 막힐 때마다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해 오던 것들도 올렉의 손이 닿으면 놀라우리만치 쉽게 해결됐다.

 

 올렉은 서양의 발달한 문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전문 기술자들을 뽑는 시험이 있다는 것도 알려줬다. 나는 형님처럼 공부하러 밖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잡과라는 시험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버지에게 말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했다.

 민하에게 하소연했지만 냉정한 반응이 돌아왔다.

 

 민하는 내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과에 응시하기를 원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실력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어떤 결과를 내든지 형님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무과에 급제해도, 뭐든 잘하든 형님과 평생 비교당하면서 자괴감에 시달려야 할 터였다.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평생.

 그래. 어차피 그럴 거라면, 차라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하면서 비교 당하는 게 낫다.

 

 사실 이 집구석에서 아버지의 자식편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형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아들이었다. 가업을 잇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장남이었다.

 

 반면 나는 형님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형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처럼 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우릴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태양과 달.

 식상하지만 잘 어울리는 비유였다. 새삼스레 서운할 것도 없었다. 아랫것들은 누구에게 줄을 대야 하는지 잘 알았다. 나는 민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잡과라니, 집안 얼굴에 똥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두 눈을 감았다.

 

 

 “민하.”

 “네. 도련님.”

 “솔직히 말해봐. 너도 형님 모시고 싶지?”

 

 

 민하가 내 머리맡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건 아닙니다.”

 “정말?”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정말입니다, 작은 도련님.”

 

 

 민하의 목소리는 뚜렷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다 그러던데. 내 밑에 있으면 평생 진급도 못 할 거라고.”

 

 

 아버지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집안 무사들을 세 등급으로 나눴다. 언제고 활약할 수 있는 실전경험을 갖춘 1군, 혹독한 훈련을 거듭하며 1군으로의 승진을 노리는 2군, 평균 연령대가 어리고 아직 미숙하다는 평가를 받는 3군.

 

 민하는 3군의 대장이었다. 2군 무사들의 평균나이가 열여섯 살 전후임을 감안하면 진즉 승진했어야 할 나이였다. 실력이야 나를 가르칠 정도니 두말할 것도 없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민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저들 좋을 대로 하는 소리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난 네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도련님은 아무것도 모르셔도 됩니다. 제가 원해서 이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감동적인 소리 한다. 그런다고 뭐 떨어질 것 같아?”

 

 

 민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제가 남아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눈을 깜박였다. 투명한 지붕 너머, 화려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너도 누워봐. 별이 좋다.”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해.”

 “별 말입니까?”

 “아니, 저 유리 지붕. 어떻게 저렇게 다 보이지?”

 

 

 서역에 다녀온 아버지가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걸 마당에 펼쳐놨을 때,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세상에 앞뒤가 들여다보이는 물건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특별한 공정을 거친 물건이라 값도 어마어마하단다. 게다가 저걸 가공해서 연무장 지붕을 얹는다니!

 

 아버지의 말이라면 맹신하는 형님도 반대했다. 유리는 빛이 그대로 통과하는데다 열을 흡수해서, 가뜩이나 더운 연무장이 찜통이 될 거라고.

 

 그래도 아버지는 밀어붙였다. 수련을 끝낸 뒤 올려다보는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물 안 개구리인 너희는 모른다고 우겨댔다. 아버지는 기어이 멀쩡한 지붕을 뜯어냈다. 그때 어머니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했더라. 저 양반이 돌아오기만 하면 사단이라고?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아.”

 “…….”

 “지금 내 나이에 형님은 미래를 결정했어. 삶의 목표를 세웠다고.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자랐다. 옛날에는 서로 스스럼없이 대했다. 머리가 커져서 민하가 더 이상 나를 동생으로 대하지 않게 되었어도, 깍듯하게 도련님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게 되었어도, 어리광을 부리면 열에 두세 번 정도는 받아주었다. 지금처럼.

 

 

 “도련님은 큰 도련님과 다릅니다. 그게 제가 도련님을 따르는 이유고요.”

 

 

 민하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단호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쯤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이대로 남아주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피식 웃었다. 민하도 따라 웃었다.

 그때는 왜 민하가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안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가 유유부단한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형님을 닮아 승부욕으로 불타는 야심가였다면, 민하는 나를 좀 더 다르게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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