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0년 전 <지리산 세석평전>
“아버지, 운명은 바꿀 수 없나요?”
“운명은 바꿀 수 없다니, 누가 그리 말하더냐?”
대족장은 딸 자운비를 따사롭게 바라보며 되물는다.
비록 여섯 살이나 총명함과 재기가 넘치는 신묘한 소녀다.
그 신묘함에 지혜까지 넘치는 게 다소 두렵기는 하지만.
“샤멘 어매가 말했습니다. 운명은 바꿀 수도 거스를 수도 없다고요.”
“아가, 운명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자운비는 칠흑 같이 깊은 눈으로 대족장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아버지.
하지만 그는 수리부족의 우두머리였다.
용맹하고 청렴하고 지혜로운 그는 종족의 영웅이자 신이었으며 숭배와 흠숭의 대상이었다.
아내를 일찍 여읜 그에게 남은 가족은 이제 외동딸인 자운비 뿐이다.
제 어미의 미모와 지혜를 쏙 빼닮은 딸 자운비.
거기까지만이어야 했다.
어쩌자고 제 어미의 운명까지 빼다 박은 것인지.
그래서 6살 나이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대족장은 어린 자운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자운비에게 말했다.
“아가, 저 하늘을 보아라. 하늘에 길이 있더냐?”
“아니요.”
“그런데도 별들은 겹치지 않고 저마다 빛을 내지 않더냐?"
"네 맞아요! 어떻게 별들은 저리도 많은데 서로 부딪치지 않죠? 참 신기해요 아버지."
"아가, 운명은 이미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그것은 빛나기 위해 갈고 닦아야 할 길이니 곧 너의 의지가 운명을 만드는 것이다.”
- 10년 후.
구릉지대에 모인 수리부족.
채화봉(횃불의 일종)을 든 팔선녀가 곱게 단장해 입장한다.
그리고 팔두령(청동방울)을 찬 대족장이 지엄한 모습으로 천신제단 앞에 선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천행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수리산 종족 부락민들이 벌떼처럼 운집하여 긴장된 시선을 모은다.
드디어 부락민들이 십 여 명씩 짝을 지어 탁춤 (발로 땅을 밟으면서 손발을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 을 춘다.
구가 구가 움 움. 구가 구가 움 움.
팔두령 소리가 끊임없이 신령을 부른다.
대족장의 목에 걸린 두 개의 청동거울이 빛을 발하고 있다.
거룩한 제단 위에는 오늘 갓 잡은 암 사슴 새끼가 올려져있다.
네 발이 묶인 채 버둥거리던 암사슴.
녀석은 대족장의 눈빛을 본 순간 제압당한 듯 움직임을 멈춘다.
제 몸을 한껏 희생하려는 짐승의 처연한 눈망울이 아름답다.
이제 대족장을 보위할 2인의 전사가 등장한다.
단정한 쓰개를 쓰고 양 팔에는 가죽줄을 감았다.
그들도 허리춤에 청동방울을 하나씩 달고 있다.
수리부족의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다.
이들이 태양을 향해 돌아선다.
탄탄한 근육질의 구릿빛 몸이 쏟아지는 빛을 받아 번쩍인다.
40대 후반의 대족장이 뒤를 돌아본다.
전사 2인이 양쪽에 서서 그를 호위한다.
당당하게 대족장 옆에 선 전사 2인의 얼굴에도 빛이 난다.
스물 두 살의 미소년 전사 수랑과 거친 살쾡이의 눈빛을 가진 30대 후반의 호가.
수랑이 정의로운 용맹가라면 호가는 전략적인 실리주의자다.
대족장의 가슴에서 청동거울 두개가 빛을 번쩍 발한다.
수리부족원 모두가 경탄하며 고개를 숙인다.
수랑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춤에 찬 청동방울을 앞으로 내밀어 경배를 표한다.
그런데 모두들 대족장을 향해 경배와 흠숭을 표현하는 이 거룩한 순간에.
달도끼를 든 호가는, 대족장의 동경을 훔쳐보고 있다.
호가의 번뜩이는 눈빛은 집요하고도 끈적하다.
두 전사의 뒤쪽으로는, 샤멘 할매(50대 후반)와 이제 막 꽃다운 나이의 생일을 맞은 16세의 자운비가 서있다.
청동장신구로 한껏 치장한 자운비.
그 칠흑 같은 눈동자에 더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매끄러운 머릿결과 백옥같은 피부는 가히 꽃중의 꽃답다.
수랑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자운비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웃음꽃이 만개하고 있다.
그렇다. 대족장인 아버지께 운명을 거론하던 지난날의 여섯 살 자운비는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숨기지 못한 죄.
그것이 살인을 부를 줄이야.
대족장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다.
태양을 부르고 우주를 부르며 사냥에서의 승리는 오로지 자연의 은총이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대족장의 의식에 맞추어 수랑은 청동방울을 흔든다.
평소에는 전사의 창에 꽂고 다니는 간두령이지만,
제천의식에서는 소리를 부르는 영물이다.
소리는 신을 뜻하기에 청동방울은 아무나 함부로 휘두를 수 없다.
부락민들의 탁춤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가고,
수랑의 청동방울이 세차게 흔들린다.
대족장이 입속으로 주문을 외운 후 돌칼로 사슴의 배를 가른다.
확 튀는 피--
대족장의 손에도 사슴의 피가 묻는다.
그 피를 맛보는 대족장.
그런데!
갑자기 대족장의 얼굴이 파랗게 변색된다.
수랑과 호가에게 손을 뻗치려던 대족장은, 그대로 휘청하며 제단에 고꾸라진다!
“군장어른!”
“아버지!”
수랑과 자운비가 대족장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그를 흔들어본다.
“아버지! 아버지!”
“군장어른! 군장어른!”
탁춤을 추던 부락민들이 춤을 멈추고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쓰러진 대족장을 보며 홀로 음흉한 미소를 날리는 자!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엄청난 우박이 떨어진다.
부락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번개가 내려친다.
쫘악-
천신제단의 선바위가 두쪽이 난다!
프롤로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