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2년전.
서울 강남의 한 복판에서 일어났던 믿지 못할 붕괴.
1995년 6월 29일.
연호와 엄마의 눈앞에서 강남의 초대형 삼풍백화점이 폭삭 주저앉은 그날 이후.
연호와 엄마는 두문불출하며 쪽방에 숨어지내고 있었다.
세인들은 열살 소년 연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화점이 무너지기 직전에 입구에 서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기이한 아이.
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본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가 귀신을 본다,는 소문은 세간에 삽시간에 파다하게 퍼졌다.
아이야, 네가 본 걸 말해봐.
그게 너한테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니?
말.해.봐
말.해.봐
넌 미리 알고 있었지?
넌 그래서 살아남은 거지?
말.해.봐
말.해.봐
괴이한 소문과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어린 연호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연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연호는 본 것이 아니라 들었던 것이다.
[들어가면 안돼]
연호의 귓가에서 어떤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연호는 엄마가 연호의 귀에 대고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엄마는 가끔 어린 연호의 귀에 귓바람을 불며 연호를 놀리고는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호의 얼굴에 따귀가 날아들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빨리 들어가지 않는다며 연호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한테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연호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더욱 심하게 화를 냈다.
[너 또 왜 이상한 소리야! 미쳤어! 정신병이 또 도진 거야!]
[아냐! 아냐! 엄만 왜 나한테 거짓말 해! 엄마가 말해놓고 왜 거짓말 해!]
[난 아무 말도 안했어 이 바보야! 넌 나쁜 놈이야!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엄마 미워! 엄마 싫어!]
[넌 저주 받았어! 넌 악마야!]
[엄마 미워!]
[네 말이 틀렸다는 걸 내가 증명해줄 거야. 따라와! 어서!]
엄마는 무섭게 화를 냈다.
그리고 연호의 손목을 덥썩 잡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아프다고 소리치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연호의 발목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들어가면 죽어.]
연호는 엄마가 또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다리를 붙잡지 말라고 말했다.
[이 악마!]
별안간 또 한번 따귀가 날아들었다.
[네 영혼은 악마에게 사로잡혔어! 넌 괴물이야!]
[왜 때려! 아냐! 아니야! 난 악마가 아니야!]
[넌 괴물이야!]
그 순간 천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천둥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건 정말 세상이 뒤집히는 소리였다.
비명과 아수라장의 현장에서
연호와 엄마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한참을 서있었다.
* * *
그날 이후 엄마는 연호 옆에 오지 않았다.
엄마는 연호의 귀에 더 이상 귓바람도 불어주지 않았다.
연호가 다가가면 진저리를 치고 구석으로 도망갔다.
연호는 슬픔에 잠겨 혼자서 어둠 속에 있었다.
엄마는 밥도 차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 * *
천둥소리와 뺨을 갈기던 잿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온다.
1995년 그날의 흙바람.
그 무서운 흙바람.
엄마가 사라진 그날의 슬픔이 확 밀려온다.
엄마. 가지마 제발. 엄마~~~~~~~
연호는 눈을 떴다.
또 꿈이다.
아까부터 알람 시계가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
연호는 능숙하게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오전 7시.
향수 개발부 연구실에 도착한 연호는 정확히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슈트 상의를 벗고 연구복으로 갈아입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송지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성분분리를 하고 날밤을 샌 그녀.
사자머리를 한 채 하품을 쫙쫙 하며
선임들의 출근 전까지 눈을 좀 붙여볼까 고민 중이던 그때.
그 찰나에 문이 열리고 까칠대마왕 팀장이 들어온 것이다.
지수는 숨죽인 채 가만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연호는 지수의 인기척을 귀신처럼 잡아낸 것이다.
“강주임 책상에 분석표 있을 거야. 가져와”
“네?”
“원래 그렇게 굼뜬가! 왜 자꾸 두 번 말하게 해.”
얼음처럼 차가운 연호의 말투에
지수는 똥줄이 바짝 탄다.
‘정신 차리자, 송지수!’
지수는 재빨리 강주임 책상으로 다가가 파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연호의 차가운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에 둔 거야!’
지수의 손이 마구 떨린다.
그 바람에 파일 더미가 와르르 쏟아졌다.
‘맙소사. 망했다.’
놀란 지수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뭉치들을 허겁지겁 줍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연호의 고함소리가 귓청을 때릴 것 같다.
‘어! 이거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진 파일 속에, 찾고 있던 분석표가 보였다.
“여기.”
지수가 간신히 찾은 분석표를 연호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연호의 눈이 허공을 향해 멍하게 있다.
마치 지수의 목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팀장님?”
순간 연호가 무섭게 지수를 쏘아본다.
병원에서 봤던 바로 그 눈빛이다.
심장을 파고들 것처럼 무섭게 노려보는 푸른 눈빛.
연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얼음처럼 굳은 지수의 팔을 꽉 잡았다.
“방금전 뭐라고 말했어?”
“네?”
“나한테 말했잖아. 어서 가라구!”
“전 그런 말 안했어요 팀장님.”
“거짓말 마! 내가 장님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연호는 이를 갈며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아파요, 팀장님. 이거 놔주세요!”
“왜 이런 이상한 장난을 하는 거지?”
연호가 지수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따지듯 물었다.
“왜 이러세요! 전 아무 말도 안했다구요!”
지수가 붙잡힌 팔을 빼내려 애를 쓰는 사이,
연호는 지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야!”
지수가 비명을 확 지른다.
순간 연호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그건. 방금 내 손에 잡힌 그거?”
연호는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지수는 아픈 팔을 꽉 움켜쥐며 연호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당신 나한테 왜 이래!”
송지수가 연호를 향해 와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난다.
연호는 말없이 눈썹을 모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지수의 손을 붙잡았는데.
그런데, 지수의 손은 오그라진 주먹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쁜 놈.”
연호를 향해 욕을 내뱉은 지수는
연구실 문을 박차고 울면서 뛰어나갔다.
* * *
오후 1시.
튀어나간 지수는 아직까지 연구실로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출근한 연구원들은 연호의 눈치를 살피며 잔뜩 긴장해 있었다.
강주임의 입을 통해 지수와 연호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호는 지수의 행적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책상위에 놓인 야생 식물 표본의 향기를 일일이 맡아보며 새 향수개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서른의 연호.
그는 업계1위의 향수회사 수석연구원이다.
2013약속, 2014환생, 2015 눈물.
지난 3년간 연호가 개발하고 빅 히트를 친 향수의 이름이다.
현재 연호는 2016년 새 시제품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성분분리 작업을 막 끝낸 강주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뭐가 문제야?”
강주임은 또 한번 움찔 놀랐다.
연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연호는, 보이지 않는 대신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초감각적 능력을 보이고는 했다.
마치, 세상 모든 일을 환히 꿰뚫어보는 초인처럼.
연호는 강주임의 미세한 숨소리만 듣고도 문제가 발생했음을 캐치해냈다.
“크레마토그래피 결과가 안 좋습니다, 팀장님. 향기가 좋다했더니 독성이 검출됐어요.”
(*크레마토그래피 ; 휘발성 향을 분석하는 방법)
예상했던 참담한 결과였다.
연호는 표본식물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팀장님, 아무래도 국내산 야생식물을 이용한 향수개발은 무리인 것 같아요. 내달에 시제품이 나와야 하는데 어떡하죠?”
“야생식물 종자은행에서는 뭐래?”
강주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 숨만 푹푹 내쉬었다.
“되는 일이 없군!”
연호는 벌떡 일어나 가운을 벗어 던졌다.
정말 지독히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어제는 개안 수술에 실패했다.
그리고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을 다시 꾸게 되었다.
그도 모자라 소송인지 송지순지 뭔가 하는 인턴은 오늘 오전 울며서 뛰쳐 나간 후 연락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암울한 상황에서 사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송지수라는 인턴이다.
바람.
바람이 필요하다.
숨통 막히는 연구실을 잠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연호는 입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닫힌 문에 머리를 쾅 부딪쳤다.
“팀장님!”
놀란 강주임이 달려와 연호를 부축했다.
“문 닫아두지 말랬잖아!”
연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주임은 얼른 문을 열어준다.
화가 난 연호가 씩씩대며 복도로 나오자
강주임이 얼른 따라 나섰다.
“팀장님,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송지수 인턴은 해고 조치 가능한지 인사부에 알아보겠습니다.”
“왜?”
“인턴 주제에 이렇게 함부로 무단 행동을... 아무튼 죄송합니다.”
연호는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버튼을 눌렀다.
“장애인 우선채용 조건 때문에 뽑았는데요, 아무래도 손에 문제가 있다 보니 실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팀장님. 제가 안목이 모자라서.”
“강주임, 이 엘리베이터가 올라갈까 내려갈까.”
“아, 예. 팀장님. 지금 올라오는 중입니다.”
“강주임은 눈이 잘 보이니 바로 답하는군. 난 매번 고민하면서 결정해. 미세한 소리와 주변의 진동을 분석하면서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 후에 올라가는 게 확실하다고 90%쯤 장담할 수 있을 때 버튼을 누르지.”
“아... 전 그런줄은 몰랐습니다. 워낙 능숙하게 모든 것을 잘 하셔서요.”
“만약,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셨습니다, 라는 음성 안내만 있어도 사실, 이렇게 머리 터지도록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강주임은 무슨 말인가 싶어 연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날 그렇게 빤히 보면 답이 나와! 당신은 아무 생각도 못하는 멍청이야 강주임."
연호의 비난에 강주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것에 씨름하고 살아! 그래서 동기인 강주임 당신보다 먼저 진급했고 팀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장애인 운운해봐. 송지수 인턴이 당신 자리를 꿰차게 만들어줄 테니까.”
강주임의 이마에 핏줄이 튕겨나온다.
강주임은 똥씹은 표정으로 연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연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연호는 능숙하게 올라탔다.
연호의 푸른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망할 놈! 그놈의 눈 영원히 보이지 마라!”
저주 같은 악담을 퍼부으며 강주임은 분노했다.
놈의 말대로 강주임과 연호는 입사동기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놈은 남달랐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실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명민하게 행동했고
완벽한 일솜씨를 자랑했다.
강주임은 씩씩대며 복도를 서성였다.
도무지 분이 삭히지 않는 표정이다.
지수는 아까부터 비상문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서 팀장인 연호와 강주임이 나눈 이야기를 모두 다 듣고 있었다.
지수는 오그라든 자신의 오른쪽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처럼, 엄마처럼, 지수의 손도 오그라들었다.
할머니는, 엄마는, 자신의 손을 오그라들게 만든 그놈의 물건을
불과 열 살도 채 안된 지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지수에게
‘아가 업보요, 의무란다.’ 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그놈의 고통스런 저주의 삶을 어린 지수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지수는 할머니의 삶, 엄마의 삶에서 뛰쳐나와 홀로 도시로 상경했다.
하지만 이미 오그라든 손은 남들에게 괴리감을 주었고 아웃사이더의 고통스런 삶을 안겼다.
지수의 오른쪽 손이 오그라든 것을 알게 되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한결같이 몸서리를 치며 지수를 밀어냈다.
사실 어제 한연호 팀장의 문병에 갔다온 뒤에도 지수는 암담했다.
새롭게 취직한 조향연구원 인턴자리 역시 쉽지 않겠다는 절망적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오늘 아침 한연호 팀장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지수는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해 튀쳐 나갔었다.
그런데
한연호 팀장이 보기 좋게 강주임에게 한방을 날렸던 것이다.
갈 곳 없어 방황하며 오전을 보내고
연구실 앞에 돌아와 서성이던 지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울며불며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건만, 갈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용기도 없어서 몇 번이나 복도를 서성이던 즘.
갑자기 연구실 문이 열리고
연호와 강주임이 나오자
재빨리 비상구로 도망을 쳤던 지수였는데.
그런데 자신을 비하하는 강주임에게
까칠 밤송이 팀장이 한방을 날려주다니.
의외였고 놀라웠다.
이제껏 그 누구도 지수를 위해 그렇게 통쾌하게 한방을 날려준 남자는 없었다.
* * *
김박사와 혜주는 박물관 미라 안치실 앞에 서있었다.
유리관 속에 놓여 있는 미라는 마치 숨 쉬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혜주의 가슴에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옷에 다발적으로 번져있는 얼룩 분석 결과는 어떠냐?”
“염분이라네요.”
“뭐? 바닷물이란 말야?”
“그건 아니구요. 소량의 염분만 검출 됐어요.”
“소량의 염분? 구성 성분이 그게 다란 말이야?”
“네.”
“이상하군. 그것만으로 사람이 썩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돼.”
“그것보다도 소량의 염분으로 구성된 그 성분이 뭘까요? 무색에 무취에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너무 미세한 성분은 과학적으로도 분석이 용이하지 않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
난관중의 난관이었다.
품위 있는 외관을 갖추고 청동방울을 소지한 2500년전 전사의 미라.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품위까지 느껴지는 저 남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배계급의 상징인 고인돌 무덤이 아닌
버려진 듯한 돌멩이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그렇게 험하게 버려진 사체인데
더욱 이례적이고 특이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완전한 상태인 미라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보존처리도 되지 않은 채.
특이점이라고는 옷에 번진 누런 얼룩이 다였고
그것의 성분이 소량의 염분이라는 결과가 전부였다.
"지금 이 난관에서 벗어나려면 일반적인 감각이 아닌 특별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특별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
"촉각과 후각이 귀신같은 사람이요.”
“이를테면?”
“아버지도 아시면서.”
혜주는 씩 미소 지었다.
“조향사 한연호. 그 남자가 지금 필요하다구요.”
-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