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구, 머리야."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몸을 수습하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엔 온통 책이 가득했다. 한 면을 제외하곤 세 군데의 벽이 모두 책장인 것이었다.
'뭐냐, 이 당황스런 공간은......'
현실에서도 도서관 한 번 가보지 않은 시아에게는 이 공간의 책들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방 안 가득한 책들을 보니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하아......"
세 군대에서 유일하게 책이 없는 벽면엔 큰 창문에 침대, 책상이 놓여있었다. 저 곳만이 유일한 도피처라고 생각한 시아는 책들을 피해 책상으로 다가갔다.
"음?"
뽀얀 먼지가 쌓인 책상 위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부러진 펜과 글이 잔뜩 쓰여진 종이 몇 장 이었다. 시아는 종이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모르겠다. 밖은 어둡고 날은 추워져간다. 창으로 내려다보면 언젠가부터 그들이 와있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 딸마저 희생했거늘 무엇을 더 바라는 걸까.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딸의 생명과도 같았던 그것. 고뇌에 젖은 나에게 유일한 희망......"
첫 번째 종이는 여기서 끝나있었다. 종이를 한 장 넘겨 두 번째 장을 폈다.
"오늘 마법진에 새겨진 마나석을 빼내고 마나의 기운을 모두 덮어버렸다. 방 안에 있던 모든 것들도 그 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들이 결국은 환상을 깨버린 것이다. 이제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저택으로 들어올 테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마 그 아이는 눈물을 흘리 테지......"
두번째 장까지 다 읽은 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리는 이해력에 짜증을 느끼곤 다음 장으로 넘겼다.
"천상의 사다리, 그 앞에 마주서다. 천상의 안내자는 회색빛에 물들고 백색의 상아는 노래를 부른다. 시간의 굴레는 다시 돌아가고 붉은 화원은 푸르게 변한다.
화원의 소녀는 눈물을 흘리니 천상의 길이 열린다. 눈물의 대가로 열린 그 길, 나 그곳에서 바람의 노래를 부르리라? 뭐야, 이건."
한참을 들여다봐도 이해가 되지 않은 시아는 종이들을 휙 던져버리고 스킬창을 살폈다.
[던전 제작 Lv 1]
숙련도: 0/100%
소모MP: 없음
제한: 던전 제작자
쿨타임: 7일
던전의 외형과 내부, 기초를 제작한다. 제작된 던전은 소유권을 양도하거나 매매할 수 있다.
단, 양도와 매매는 4차 전직 이상부터 가능하다.
제작중인 던전: 없음(0%)
'그냥 스킬명만 외치면 되는 건가?'
"던전 제작."
-던전 제작을 시작합니다. 시전자를 기점으로 던전의 위치를 정합니다.
-시전자 소유의 저택이 확인되었습니다. '웨일리가의 저택'을 던전으로 제작하시겠습니까?
"Yes."
-던전의 형식을 정합니다. 형식은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일반형으로 설정됩니다. 4층과 5층은 단계형으로 설정됩니다.
-시전자가 머무를 최종 보스룸을 정합니다. 최종 보스룸으로 사용할 층을 선택해 주십시오.
보스라면 당연히 높은 곳에 살아야 하는 법.
"5층."
-5층을 최종 보스룸으로 사용합니다. 던전의 규모 상 중간보스는 한 마리만 배치할 수 있습니다. 던전의 최종보스가 자리를 비울시 임시적으로 중간보스가 던전의 최종보스로 설정됩니다.
-보스룸은 최종 보스룸으로 가는 게이트가 있는 4층으로 설정됩니다.
-층마다 몬스터를 배치합니다. 몬스터 도감에 기록된 몬스터만 배치 가능합니다.
-1층에 배치할 몬스터를 정해주십시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울."
-1층에 구울이 배치되었습니다. 2층에 배치할 몬스터를 정해주십시오.
"구울."
-2층에 구울이 배치되었습니다. 3층에 배치할 몬스터를 정해주십시오.
"구......울."
-3층에 구울이 배치되었습니다. 4층에 배치할 몬스터를 정해주십시오.
...... 나에게 선택권을 달라.
"크윽. 구울."
-4층에 구울이 배치되었습니다. 보스 몬스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이젠 보스까지...... 시아는 한 없이 비참해져갔다.
‘레벨 핑계대지 말고 사냥 좀 할 걸.’
후회하지만 어쩌리. 이미 지난 일인 것을. 시아는 정해져 있는 답을 외쳤다.
-보스 몬스터는 구울 로드로 설정됩니다.
-던전의 층마다 하급 마나석이 하나씩 소모됩니다. 총 다섯 개의 하급 마나석이 소모되었습니다.
-층마다 10g의 마나가루를 소모하여 리젠존을 형성합니다. 총 50g의 마나가루가 소모되었습니다.
-던전의 레벨과 난이도는 입장자들의 레벨에 비례하여 설정됩니다.
‘레벨 비례?’
시아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알림 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알기로 아킬라니아의 던전 중에 이벤트 던전을 제외하고는 레벨 비례로 된 던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레벨에 따라 변하는 몬스터의 수준이라니...... 그 뜻을 이해한 시아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구울밖에 없는 던전에 드디어 가치가 생긴 것이다.
-중급 마나석 한 개를 소모하여 던전을 활성화 시킵니다. 던전의 이름을 등록해 주십시오.
"Welcome to Ghoul house!"
(주)아킬라니의 운영 1팀에는 오늘도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형광등은 꺼져있고 수많은 모니터의 불빛만이 실내를 비췄다. 곳곳엔 좀비로 추정되는 존재들이 엎어져있고 벽면에는 '야근 타도, 유저 타도', '오늘도 무사히'등과 같은 팻말이 걸려있었다.
-카렌스 제국, 카렌시 외곽에 새로운 던전이 생성되었습니다.
"응?"
"던전?"
갑작스런 알림 음에 엎어져 있던 팀원들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 모니터를 확인했다.
"던전이면 메인 컴퓨터나 시나리오 팀 소관 아니에요?"
좀비들 중에서 제일 어린 신입이 모니터를 확인하며 의아한 빛을 내비쳤다.
"그러게. 시나리오랑 이벤트에 관계없는 던전은 모두 메인 컴퓨터 소관인데......"
"우리 부서는 유저들만 관리하잖아요?"
"그렇지... 유저?"
누군가의 말에 운영 1팀 모두가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 그러면 우린 또 야근이라고......"
이때 신입이 컴퓨터로 다가가 새로 생성된 던전에 관한 자료를 다운 받았다.
"저... 이거 유저가 만든 던전 같은데요?"
"으아악!"
"안 돼!"
사무실 곳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왔다. 유저가 만든 던전 때문에 야근을 하며 수습할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다.
"자, 모두 조용!"
절규하는 좀비들을 한 여인이 진정시켰다. 좀비들 사이에서 혼자만 말끔하고 화려한 그녀는 그 틈에서 유독 빛나보였다.
"부 팀장님. 우리 좀 살려줘요."
좀비들의 아우성에 그녀는 생긋이 웃어보였다.
"저도 야근은 싫어요. 그러니 우리가 살 길은 하나에요."
모든 팀원들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팀장님께 비밀로 하는 거. 다행히 오늘 외근이 있으셔서 못 들어오시니 우리끼리만 함구하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린 야근이라는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겠죠?"
"오오!"
"역시 부 팀장님이십니다!"
"부 팀장님 최고!"
"그러니 우리 모두 입을 다물자고요. 오케이?"
"오케이!"
던전을 다 만들고 지내는 날들은 너무 평화로워서 지루할 정도였다. 던전을 만들면 뭐하나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시아는 광고라도 하고 다닐까 고민을 하다가 곰팡이가 가득한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심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법진 앞으로 가서 선 시아가 마나가루를 조금 뿌리자 마법진이 빛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4층 보스룸으로 이동하자 방에 앉아있는 구울 로드가 보였다. 구울 로드는 시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어. 그래."
구울 로드의 인사를 받고 문을 열어서 나오자 괴음을 지르고 침을 흘리며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는 구울들이 보였다.
그 구울들을 가볍게 무시한 시아는 곧장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을 본 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보니까 폐허가 따로 없네.'
무려 오십년 간 방치돼 있었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이건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수북히 쌓인 먼지들과 천장 가득한 거미줄, 부서진 가구들까지.
이런 환경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판단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사냥하러 온 유저들도 먼지 때문에 죽게 생겼다.
청소를 하자고 결심한 시아가 3층으로 올라가 청소도구를 찾기 위해 방마다 문을 벌컥벌컥 열어재꼈다. 그 때마다 우어어 거리고 있던 구울들이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마지막 방까지 들여다봐도 청소도구가 보이지 않자 시아는 마지막 방에 있던 구울에게 말을 건넸다.
"야, 너 청소도구 못 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