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평 진인이 청명의 맥을 잡고 눈을 감았다.
“으으음.......”
“사형, 사백께서는 어떻습니까?”
현성 진인이 말했다. 몹시 다급하여 맘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맥을 짚고 싶건만 장문 사형이 있으니 그마저도 쉽지 않다.
“맥이 없네. 숨도 쉬지 않아. 한데.......”
현평 진인의 말을 끊고 황우자가 말했다. 주변의 도사들도 모두 당황한 눈치다.
“돌계단에서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뛰어왔습니다, 장문 진인! 태사조께서는 호풍환우도 하실 수 있고 이기어검도 하실 수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급사하실 리가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황우자가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살려내라고 강짜를 부리는 폼을 보니 짧은 시간 내에 어지간히 청명이 좋아졌나 보다.
현평 진인이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한데 몸이 따듯하구나.”
“......?”
운형자와 황우자, 그리고 주변의 운자배 도사들 모두가 황당한 듯이 현평 진인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현평 진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현평 진인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신선이 하는 일은 범인이 알 수 없다더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문 사백!”
현평 진인의 등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운형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선이 내려온 지 하루 만에 죽어버렸는데 웃다니! 장문인의 배포가 참으로 크다.
그때, 갑자기 청명이 눈을 떴다.
“누가 제 몸을 옮겼나요?”
“...헛?!”
황우자와 운형자는 물론 현성 진인과 대충은 짐작하고 있던 현평 진인까지 깜짝 놀랐다.
사람의 품에 안겨 있던 병자, 특히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눈을 뜰 때는 보통 ‘으음’ 하는 신음과 함께 일어나는 법이다.
사실 꼭 그러라는 법도 없는데 모두들 그런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나 보다.
하지만 청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처럼 발딱 눈을 떠버렸다.
“저... 제가.......”
황우자가 당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살아났으니 기쁨을 느껴야 되는데 어쩐지 느껴지는 것은 당혹과 함께 민망함뿐이다.
몸을 옮긴 것이 중죄인가 보다.
“아, 황우 증사손이 한 건가요?”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황우자를 바라본 청명은 잠시 한숨을 쉰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
“에휴! 저... 황우 증사손, 다음부터는 제가 몸을 버려두고 떠나면 그대로 두세요. 돌아올 때 찾기가 힘들거든요.”
“네? 네.......”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몸을 버릴 수도 있나? 황우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평 진인이 홍소를 터뜨렸다. 현평 진인이 처음 청명을 안았을 때에는 몸이 따듯했고, 맥을 쥐었을 때는 맥이 없다가 손을 떼고 나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즉, 말 그대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인데,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양신이 육신을 어느 때고 떠날 수 있단 뜻이다.
아마 필요에 따라 육신을 버릴 수도 있으리라.
“사백께서 그저 명상에 드신 것뿐인데 너희들이 호들갑을 떨었구나. 허허헛.”
말을 끝내고선 다시 홍소를 터뜨린다.
현성 진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형과 사백을 번갈아 보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어... 이놈! 운형자야, 내 수명이 십 년은 단축된 것 같다.”
“...사부, 죄송합니다.”
운형자와 황우자가 민망한 눈으로 현성 진인을 바라보았다.
현성 진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을 보니 ‘요놈들 때문에 십 년 감수했네’라고 말하는 듯하다.
민망해진 운형자가 황우자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네 녀석 때문에 이게 뭐야!’
‘.......’
황우자가 멋쩍게 운형자의 눈길을 피했다. 눈길을 피하다 바라보니 청명 사조께서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흠집이라도 났을까 싶어 훑어보는 장사치 같아 웃음이 나왔다.
사실 정확한 추측이었다. 청명은 잠시 몸을 두고 나간 사이에 흠집이라도 나진 않았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니 아무 상처도 없다.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던 현평 진인이 말했다.
“사백, 괜찮으시면 저와 한담이나 나누시지요.”
“네?”
청명이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다 말고 의아한 시선으로 현평 진인을 바라보았다.
“그저 대화나 하자는 말입니다.”
청명이 현평 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좋은 기분을 깨버릴 수는 없으니 꼼짝없이 장문인과 대화를 나누게 생겼다.
‘아아, 이런. 운혜 사손을 그냥 두고 나왔는데. 가서 운혜 사손이랑 놀고 싶은데.......’
청명이 울상을 지었다. 운혜와 어제처럼 땅따먹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체념해야 할 듯하다.
“네, 장문 사질. 대화를 나눠요.”
의기소침한 말투로 청명이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드시지요.”
차분한 목소리로 현평 진인이 말하고는 청명과 함께 태화궁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대며 남아 있던 운자배 도사들은 운형자와 황우자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야, 황우야, 산 사조를 죽었다고 말하다니 그거 기사멸조다?”
“황우자야, 호들갑 떠는 모습이 아주 어울리더라. 너는 이제 경기검(驚氣劍)이라고 별호를 붙여라. 괜히 나까지 놀랐지 않느냐!”
“.......”
황우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주위의 운자배 도사들은 낄낄대고 웃으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운형자가 황우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 자식! 너 때문에!”
“아이쿠! 죄송합니다, 운형 사숙!”
무서운 사숙의 눈초리에 황우자가 재빨리 신법을 펼쳐 도망쳤다. 그 뒤를 운형자가 쫓았다.
“거기 서! 이게 뭐냐, 너 때문에! 거기 안 서!”
“아, 죄송하다니까요! 그리고 사숙도 저와 같은 착각을 했잖습니까!”
“이게 어디서!”
태화궁의 소란이 짙어지고 있었다.
***
“사백, 예전에 했던 말씀을 다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태화궁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현평 진인이 말했다. 작은 탁자에는 도동이 가져다준 용정차가 놓여 있었다.
보통 황제나 마신다는 상급의 차이지만 무당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깊으니 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현평 진인이 차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무슨 말이오?”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청명 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제게 해주셨던 말씀 말입니다. 운혜 사질과 인연이 있다고.......”
“아, 그거요? 그거라면 운풍 사손과도 있는걸요!”
청명이 신나서 말했다.
“운풍 사손이 저에게 삼재검도 가르쳐 줬답니다!”
“허허헛!”
현평 진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현평 진인의 심사를 모르는 청명은 한껏 흥이 나서는 운혜에게 보여주었던 행동을 해 보였다.
몹시 신이 난 듯한 사백을 보니 차마 ‘저는 육십 년 전에 배웠던 무공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현평 진인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천의 초식이고요, 이것이 인의 초식이랍니다.”
손을 검을 쥔 듯이 그러모아 쥔 청명이 팔을 종횡으로 흔들어댔다.
“그리고 이게 지의 초식이랍니다.”
틀렸다. 먼저의 것이 지의 초식이고 뒤의 것이 인의 초식이다. 하지만 현평 진인은 잘못을 꼬집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허허허! 잘하시는군요, 사백. 무공을 배우셨다면 천하제일이 되셨을 겝니다.”
“그런가요?”
무공 시범을 다 보인 청명이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못내 자랑스러운 듯 얼굴에 흥분이 드러나 있었다.
손자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가까이 많은 사백이었지만 얼굴도 행동도 소년과 같으니 마치 손자를 보는 느낌이다.
물론 혼인도 하지 않았으니 손자가 있을 리가 없지만.
하지만 하던 이야기는 계속해야 했다.
“허헛! 운풍과도 인연이 있었군요, 사백. 하지만 그때는 분명 운혜 사질과 인연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네, 같이 세상을 떠돌아야 해요. 운풍 사손도 같이요.”
“.......”
아니길 바랐건만 정말 운혜를 무당 밖으로 끌고 갈 모양이다. 현평 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게다가 운풍자도 데리고 나간단다.
“사백께서는... 혹여 본인의 희망을 말씀하시는 겝니까?”
만약 이 모든 것이 청명의 희망이라면....... 진짜로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현평 진인은 잠시 기대를 가져보았다.
“아니요. 그것은 제 희망이 아니라 그렇게 될 거예요. 운혜 사손은 저와 함께 세상에 나갈 인연인걸요.”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오늘 운혜와 함께 있었다니 역시 정이 든 모양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평 진인이 말했다.
“하지만 운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네?”
“본래 운혜는 무당 밖으로 떠날 수 없답니다.”
“예? 왜요?”
청명이 의아한 듯 물었다. 설마 내가 인연을 잘못 안 것일까? 하지만 운혜는 분명히 자신과 함께 세상을 떠돌 인연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생각해 봐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장문 사질은 굳게 단정짓듯 말하고 있었다,
운혜를 데려갈 수 없다고. 장문인의 명이니 무당의 제자인 자신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신선이 되었으니 세속의 인연이 끊겨야 하건만 인간 세상을 배워오라는 원시천존의 명이 세속의 인연을 다시 이어버렸다.
“하지만... 운혜 사손은.......”
“그렇게만 알아주십시오, 사백.”
현평 진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청명이 의아한 듯, 그리고 서운한 듯 말을 잃고 버벅대자 그제야 현평 진인이 굳은 표정을 풀었다.
“허어, 우리 도문의 중대사가 운혜의 손에 달려 있답니다. 아니, 강호의 운명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네? 강호의 운명이오?”
청명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현평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라는 것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서 있지 않으니 말해봐야 소 귀에 경 읽기다.
“그저 데려가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시면 됩니다.”
현평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청명이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저것은 아마 체념의 표정이리라.
하지만 다음 청명의 말에 현평 진인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운혜 사손은 여기 있으면 죽는대요. 저랑 가야 돼요.”
“...예?”
“운혜 사손은 몸이 차가워진 채로 잠만 자다가 다른 사람에게 잡혀가서 죽게 돼요. 저랑 나가야 살 수 있단 말예요.”
청명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니 운혜가 죽는다고 해도 본래 아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아직 죽음이 찾아올 때도 아닌데 죽는다는 것은 역시 서글픈 일이다. 생각해 보니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운혜 사손이 죽으면 자신은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외롭게 인간 세상을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데려가야 되는데.......”
“...지금 잠만 자다가 다른 사람에게 잡혀간다고 하셨습니까?”
“네.”
현평 진인은 충격을 느꼈다. 머지않아 운혜를 노리고 마교의 인물들이 찾아올 것이다. 거기다가 벌써부터 순음지체의 효능이 발휘되고 있었다.
현무 사제는 운혜가 잠이 늘었고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순음지체의 효능이다.
그런 시기에 들려온 사백의 말은 현평 진인에게는 마치 예언처럼 들렸다.
“...조,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사백.”
현평 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하여튼 운혜 사손이 죽는단 말이에요!”
청명이 울상이 되어선 말했다.
“자, 자세한 건.......”
“모른다니까요!”
저러다가 정말로 울 것 같다. 하지만 현평 진인은 사백에게 자세한 것을 들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사백.”
“...네.”
“운혜가... 무당에 있으면 죽는다는 것입니까?”
“네.”
“자세한 것은 모르시구요?”
“네.”
“.......”
현평 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백께서는 신선이시니 아마 틀린 말은 하지 않으실 게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운혜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현평 진인이 말했다.
“혹여... 사백과 함께 나간다면... 운혜는 살 수 있습니까?”
청명이 말했다.
“잘 몰라요. 하지만 본래의 수명대로는 살 수 있어요. 제가 선계에 돌아갈 때까지 운혜 사손은 함께 있는걸요.”
무언가 미래를 보았던 것일까? 단편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백께서는 명확한 사실을 말하는 듯 보였다.
현평 진인이 신음성을 흘렸다.
‘무당에 있으면 운혜는.......’
운혜는 아무 일이 없다 해도 이 년이면 죽는다. 하지만 그 이 년의 시간이라도 선물해 주고 싶다.
무당의 품이 도움이 안 된다니 정말 세상으로 보내야 할 듯하다.
“으으음.......”
“저, 정말 운혜 사손을 데려가면 안 되나요?”
청명이 울상을 짓고는 말했다.
“...음, 내일 총회합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백께서는 오늘 저와 함께 이곳에 계시지요.”
“...네? 운혜 사손은.......”
“그리고 내일 총회합 때 그 말씀을 다시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아마... 운혜를 무당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와아! 정말요?”
청명이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는 말했다.
“내일 이야기만 하면 데리고 나갈 수 있다구요?”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청명에게 그것은 허락으로 들렸는가 보다. 청명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장문인실을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나는 운혜 사손과 세상에 나갈 수 있다! 운혜 사손과 세상에 나갈 수 있다!”
“허허... 허헛.......”
현평 진인의 마음도 편해졌다. 생각해 보니 사백이야말로 운혜를 지키기에 적당할지 모른다.
앞날을 저렇듯 훤히 알고 있으니 운혜가 어떤 위험에 처할까. 더군다나 만약 무당에 운혜가 있다는 정보가 세상에 알려져도 이미 운혜는 밖으로 나간 뒤일 것이다.
어쩌면 적들은 더 더욱 운혜를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당의 품에서 운혜를 놓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운풍도 인연자라 했으니... 운풍을 무림맹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사백과 함께 보내야겠구나.’
현평 진인은 내일 있을 총회합에서 다른 진인들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비록 신선의 말만을 믿은 도박과도 같은 결정이지만 현평 진인은 스스로의 결단을 믿었다. 아마도 사백은 운혜를 잘 지켜주리라.
환호하는 청명에게 현평 진인이 말했다.
“하나 그렇다고 하셔도 오늘은 운혜를 만나서는 아니 됩니다. 사백은 이곳에서 저와 함께 계셔야 할 겝니다.”
“어? 왜요?”
금세 시무룩해진 청명이었다.
“예, 제 사제가... 운혜와 할 일이 있답니다.”
“사질이 저 대신 운혜 사손과 노는 건가요?”
현평 진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운혜의 몸이 모두 깨어나기 전에 미봉책으로 개정대법을 시행할 것이다. 사제가 그 역할을 잘해줄 것이다.
“예, 대신 노는 것이지요.”
“...저도 가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청명이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