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식 일백건휴(一白乾休)!”
본래 구궁(九宮)이란 방위를 뜻한다. 일백(一白), 이흑(二黑), 삼벽(三碧), 사록(四綠), 오황(五黃), 육백(六白), 칠적(七赤), 팔백(八白), 구자(九紫)에 건(乾),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離), 곤(坤), 태(兌)의 8괘를, 휴(休), 사(死), 상(傷), 두(杜), 개(開), 경(驚), 생(生), 경(景)의 팔문(八門)에 배합을 하여 그 운행하는 아홉 방위의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도가 전통의 방위법으로 그것을 무공으로 사용하면 적의 위치가 대부분 봉쇄된다. 다만 구궁검은 살검은 아닌지라 살상력이 낮은 검법이었다.
운풍이 검을 들어 좌측으로 찌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측으로 검을 움직였다.
일백에 건이라 함은 시전자의 머리 위에서 왼편을 뜻한다.
하지만 그곳에 휴를 배합하면 살검이 아니라 봉쇄, 즉 좌측의 검을 피해 우측으로 피하는 사람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든다.
청명이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손을 들어 검을 왼편으로 올렸다. 그 다음에 손을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갑자기 손이 뒤로 당겨진다.
운풍자를 보고 나름대로 따라해 본 것인데 왼편으로 올리자마자 쥐지도 않은 검이 저절로 뒤로 가버렸다.
운풍자가 그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은 일백에 건, 거기다가 이의 방향을 배합한 것으로 저렇게 하면 살검이 되어버린다.
“틀리셨습니다. 무당의 검은 본래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 그런 식으로 찌르면 사람이 죽어버립니다.”
“에, 그건 알지만 운풍 사손의 손을 따라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리는걸요.”
청명이 약간 풀이 죽어서 말했다. 하지만 운풍자는 엄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리하시면 무당의 검이 아니게 되니 규율에 어긋납니다. 살검을 연마하는 사람은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 근맥이 끊겨 파문됩니다.”
“네?!”
“그런 검은 쓰시면 아니 됩니다.”
운풍자가 엄히 말했다.
사실 무공을 하나도 모르는 청명이 그런 살검을 펼친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못하는 운풍자였다.
청명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운풍 사손이 저렇듯 엄히 말했으니 장문 사질에게 고해바치기라도 하면 자신은 단전이 파괴되고 사지 근맥이 끊겨 쫓겨날지도 모른다.
청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께 고할 건가요?”
“예?”
운풍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하지만 청명의 눈에는 그 시선이 당연한 걸 뭘 물어보느냐는 시선으로 보였다. 두려워진 청명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저, 정말 장문인께 고해바쳐서 저를 사지 근맥이 끊긴 사람으로 만들 건가요?”
“아, 아닙니다. 고하지 않겠습니다.”
운풍자가 당황한 듯 말했다. 당연히 논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청명 사조는 무공을 모르니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청명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몸이 부서질 뻔했다. 마음이 떠나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몸이 필요하다.
세상을 떠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정말 고해바치지 않을 거죠?”
“예, 물론입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운풍자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운풍자의 마음을 읽었을 때 의심이 있었으니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운혜 사손에게 혼날까 봐 마음을 읽지 못하니 다시 확인을 받아둬야 한다.
“정말 고해바치면 안 돼요? 고해바치면 운풍 사손은 돼지예요.”
“...돼지요?”
“네, 돼지요.”
청명이 아는 가장 심한 욕이 돼지였다. 사부는 한 번도 멍청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그 흔한 멍청이나 바보란 말도 몰랐다.
사부는 가끔 벽곡단을 먹는 자신을 보며 ‘그렇게 많이 먹으면 돼지가 된다’거나, ‘허허, 자꾸 게으름을 피우는 걸 보니 소가 되겠구나’라고만 했을 뿐이다.
“예, 돼지가 되기는 싫으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시작하지요.”
“네.”
청명이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운풍자가 다시 검을 들어 이번엔 모로 섰다.
이흑에 감, 생을 배합하여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이식, 이흑감생(二黑坎生)이었다.
모로 선 다음 왼 다리를 접어 들고 검을 위로 찌른다.
청명도 그 모습을 따라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검을 위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하단으로 찌른다. 저러면 상대는 필사(必死)한다.
운풍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살검을 쓰셨습니다. 구궁검은... 구궁검은.......”
운풍자는 드디어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공을 하나도 모른다던 사조께서 노린 듯이 살검만을 펼치고 있다.
“혹시 사조께서는 구궁검을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예? 아뇨. 저는 검을 든 적이 없어요.”
청명이 순진무구하게 대답했다.
운풍자는 잠시 의구심을 가져보았으나 사조께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럼 어떻게......?”
“네?”
“...아니, 왜 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으십니까?”
청명이 잠시 운풍자를 바라보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말하려다 말고 머뭇거리는 품새가 어색했지만 운풍자는 꾹 참고 기다렸다.
곧 청명이 입을 열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른 방향인데 운풍 사손의 마음은 이렇게 움직였어요. 제가 실수로 마음을 따라 흉내 내는 바람에... 저... 절대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느껴져서... 실수로.......”
청명이 당황하여 말했다. 말하고 보니 운혜 사손이 마음을 읽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제 운풍 사손도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청명이 겁먹은 눈으로 운풍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운풍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다.
“제...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청명이 혼날까 두려워 조심스러운 눈길로 운풍자를 올려다보았지만 운풍자는 크게 충격을 받아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이 검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자신의 마음이 이흑에 감과 사(死)를 배합했다. 자신의 마음이 살검을 펼쳤다.
“한 번만... 더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네.”
운풍자가 다시 일백건휴를 펼쳤다.
청명이 그 모습을 따라했는데 역시 손이 뒤로 뻗어 찌를 준비를 한다. 운풍자가 조용히 침묵했다.
청명은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자 화가 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해야 하는데 마음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는 실수를 계속 범하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해봤지만 또 무의식 중에 손이 뒤로 가버린다.
괜히 분한 마음이 든 청명이 다시 가르쳐 달라 말하려고 운풍자를 바라보았지만 운풍자는 자신 속으로 침잠한 상태였다.
‘살검, 나는 왜 살검을 펼쳤을까? 검으로 사람을 찔러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그것은 엄연히 실수였다. 나는 구궁검의 검로를 충실하게 따랐거늘....... 검은 본래 사람을 찌르도록 태어났지만 나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검은... 사람을... 찌르도록... 검은.......’
운풍자가 상념의 끝에서 검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 생각을 더 진행해 보려 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 덕분에 상념이 이어지질 않았다.
아니, 청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다. 의심과 의혹이라는 미망에서 자신을 건져 낸 사람이 바로 청명 사조였다.
그렇다면 검에 대한 의구심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운풍자가 말했다.
“사조, 검이란 무엇입니까?”
“네?”
“검이란 무엇입니까?”
“음... 운풍 사손이 가지고 있는 그거요?”
“네.”
청명이 꾀를 부렸다. 운풍자의 검법을 보고 저 검을 한 번 꼭 쥐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검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청명이 말했다.
“음...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검을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청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운풍 사손이 검을 주지 않을까 봐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운풍자는 순순히 검을 들어 청명에게 넘겼다.
“우와!”
“검이 무엇입니까?”
“이거 반짝반짝 빛나요! 너무 예쁘다!”
청명이 신이 나선 말했다. 그리고 검을 좌우로 움직여 보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가슴까지 시원해졌다.
운풍자가 말했다.
“검이 무엇입니까?”
운풍자가 다시 물어보자 청명은 잠시 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운풍자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쇳덩이요.”
운풍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지하게 물었건만 허튼 대답이 나온다. 절로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그게 뭡니까?”
“이, 이건 쇳덩이잖아요.”
청명이 조금 민망한 듯 말했다. 하지만 검은 쇳덩이일 뿐이다. 그저 쇳덩이를 가지고 심각하게 말하기도 좀 어색하다.
“저는 검의 효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검이 어떻게 쓰일지요. 검은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끝내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제야 청명은 이해를 했다. 지금 사손은 자신의 검이 어떻게 쓰일지, 자신의 검의 이치(劍理)가 어떤지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거라면 쉽다.
“이 검은 놀려고 만들어졌어요!”
이번엔 또 무슨 소린가! 청명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운풍자가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다시 말해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운풍 사손은 매일 이걸 가지고 놀았잖아요? 얘도 좋아하는데.”
“...예?”
청명은 두 번이나 말해주었으니까 됐다고 생각했다. 운풍자가 아직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검과 놀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나도 얘랑 놀고 싶어요! 이름이 뭔가요?”
“...운... 검... 입니다.......”
운풍자가 느릿하게 말했다. 운풍자의 머리 속은 폭발할 것 같았다. 내가 검이랑 놀았다고?
그때 청명이 중얼거렸다.
“만물이 하나고[萬物一如], 하나는 마음이지요[心以一]. 하지만 마음은 꼭 변화한답니다[心必動].”
“.......”
운풍자가 말을 잃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검도 나도 하나지만[我卽劍] 마음은 하나뿐이다[心以一].
내 마음이 살검을 원하면 살검을 쓸 것이고, 마음이 즐거우면 검도 즐거울 것이다.
운풍자는 검을 수련할 때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음이 하나니 검도 없고 나도 없다[無劍無我].
오로지 마음만이 있으니 검이 사람을 죽이려고 만들어졌든 놀려고, 만들어졌든 무슨 상관인가!
운풍자가 눈을 감았다. 운풍자의 주위에 옅게 바람이 불었다.
청명은 ‘운검, 안녕?’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곧 검을 던져 허공으로 띄웠다.
검은 부드럽게 날아 청명의 발치로 내려왔다.
“와아! 태워주려고?”
부드러운 바람에 둘러싸인 운풍자가 미소를 지을 때 청명이 신이 나서는 검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태청관 위로 떠올랐다.
“이야아!”
눈을 감고 있는 운풍자의 위로 청명과 검이 종횡무진 하늘을 수놓았다.
청명의 환호성은 태청관에 머물러 있는 모든 도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본래 운풍자와 청명이 있던 공터는 구석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청명이 검을 타고 활개를 치니 모든 도사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검선(劍仙)이다!”
“신선의 어검비행술(馭劍飛行術)이다!”
도사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더러는 벌써부터 청명에게 절을 했다. 무당에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도사가 생겼으니 무당의 홍복이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고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밑의 도사들이 당황하여 웅성댔다. 태사조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자신들도 인사를 해야 했다.
땅에 있는 도사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무당파 제십구대 제자 황선자가 태사조를 뵙습니다!”
“무당파 제십팔대 제자 운성자(雲省子)가 태사조를 뵙습니다!”
“무당파 제십팔대 제자 운검자(雲劍子)가 태사조를 뵙습니다!”
도사들이 동시에 외쳤다. 자신의 이름과 배분을 제외한 목소리가 일치했다.
한껏 크게 소리를 내어 태사조께 인사한 도사들은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태사조를 바라보았다.
과연 청명은 검을 타고 무당산을 휘젓고 있었다.
청명은 하늘에서 신선한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진 청명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모르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 청명과 운검은 태청관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당산의 다른 봉우리로 놀러간 것이다.
오직 남아 있는 도인들만이 소란스럽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인들의 소란 속에서 운풍자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사조도 없고 검도 없자 그냥 몸을 돌려 태청관으로 가버렸다.
본래 운검을 단 한 번도 남의 손에 맡긴 적이 없던 운풍자는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태청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