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허봉.
이 봉우리는 당금 무당의 금지로 전대 무당 장문인이 은거하고 있는 곳이다.
오직 현 장문인과 그 사제들만이 출입 가능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는데 당허봉 중턱에 놓인 작은 모옥으로 두 노소(老少)가 다가가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사부님의 모옥입니다.”
“후아! 네.”
현평 진인의 말에 청명이 살 것 같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과연 작은 모옥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도착할 듯하니 힘든 산행도 곧 끝나리라.
청명이 한숨을 쉬며 주저앉자 현평 진인이 조심스레 청명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많이 힘드십니까?”
“...네, 힘들어요.”
주저앉은 청명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이제 겨우 모옥이 보였을 뿐이다.
거의 다 왔으니 이제 얼마 걷지 않아도 된다지만 더 걸을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했다.
현평 진인이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곧 청명이 다시 기운을 차린 듯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얼른 가요.”
“예.”
현평 진인이 다시 앞장섰다.
한참을 걸었을까?
모옥이 커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지쳐 버린 청명이 입을 비죽일 무렵 마침내 정갈하게 가꿔진 작은 모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옥 앞에 있는 작은 흙밭에 한 노도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평 진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노도인에게 읍했다.
“애구구!”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노도인이 허리를 두드려 가며 힘겹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조용히 현평 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평 진인도 읍하기를 멈추고 노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도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현평 진인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지금에야 문안을 오다니! 이 게으른 녀석!”
“아이구! 죄송합니다, 사부님!”
꿀밤을 맞은 현평 진인이 죽겠다고 엄살을 피웠다.
하지만 다 죽어가는 노인이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저 아픈 시늉만 할 뿐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아이구, 아파라!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그럼! 정정해야지! 내가 정정한 것이 불만이냐?”
노도인이 현평 진인을 노려보았다. 현평 진인이 얼른 시선을 깔고는 말했다.
“당연히 정정하셔야지요. 제자가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헐헐.”
노도인이 잠시 헐헐거리며 웃었다. 기운없는 어깨를 움직여 허리를 두드리며 웃던 노도인이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현무는?”
“...잘 있습니다.”
현무 진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진 현평 진인이 얼른 대답했다.
굳이 현무 사제의 이야기를 꺼내어 심려를 끼쳐 드릴 필요는 없으니 대충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노도인은 다 안다는 듯이 다시 꿀밤을 먹였다.
“예끼, 이놈아! 거짓말은!”
현평 진인이 깜짝 놀라며 노도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부께서는 어찌 아시고......?”
“이쯤 되면 다 아는 수가 있다, 이놈아!”
현평 진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현무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편치 않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노도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현평 진인의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 사형이시오?”
“네.”
“허허, 제가 바로 청허입니다.”
청명이 입을 비죽 내민 채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노도인 때문에 이 먼 길을 걸어야 했으니 노도인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노도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청허 진인은 청명과 잠시 눈길을 주고받고는 곧 현평 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만 내려가 있거라.”
“...예?”
“내려가서 현무나 돌보거라, 욘석아!”
현평 진인이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장문인인데 체면이 있지, 요 녀석이라는 말은 너무 심한 것이다.
비록 사사로이는 사부지만 사부 역시 무당의 제자. 장문인에게 이럴 수는 없다.
현평 진인이 사부를 몰래 흘겨보려는 찰나 다시 한 번 꿀밤이 작렬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게냐, 욘석아!”
“어... 어떻게.......”
“이쯤 되면 아는 수가 있대도.”
속으로 생각한 것을 바로 알아맞힌 사부에게 놀라 현평 진인이 눈을 홉뜨자 청허 진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곧 팔을 휘휘 저으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려가거라. 사형은 내가 잘 보내마.”
“...그럼 제자는 물러납니다.”
현평 진인이 조용히 읍했다. 그러고 보니 사부께서도 도를 이뤄 등선을 기다리는 상태. 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사부가 내려가라고 말씀하시니 자신은 내려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현평 진인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사백께서는 내려오시는 길을 아십니까?”
“네, 알아요.”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평 진인이 알았다는 듯 길게 읍하고는 곧 몸을 돌려 당허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허봉을 내려가는 현평 진인의 뒷모습을 보던 청허 진인이 곧 몸을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허 진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청명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청허 진인이 잠시 헐헐 하고 웃고는 입을 열었다.
“사형께서는 등선하신 겝니까?”
“아니요. 육신은 버렸는데 원시천존께서 인간지도를 배우고 오라고 쫓아내셨어요.”
“헐헐, 그렇군요.”
청허 진인이 헐헐거리며 웃자 청명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생각해 보니 저 노도인은 곧 선계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인간지도를 배우러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만약 인간지도를 배우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선계로 갈 일이 요원해지는 것이다.
생각 끝에 다시 청허 진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과연 웃는 모습이 얄밉게 보인다.
볼을 부풀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의 얼굴을 보고 청허 진인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청명은 노도인이 다시 웃자 약이 바짝 올라 노도인을 흘겨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곧 시무룩해져 버렸다.
잠시 조용히 있던 청명이 뭔가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선계에서.......”
“얼른 오라고 했겠지요?”
청명이 다시 볼을 부풀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청허 진인은 헐헐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곧 가야지요. 요놈의 제자들이 하도 말썽을 부려대서 조금 늦춘 겝니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청허 진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도를 깨우쳐 인간 세상의 인연을 모두 끊었건만 아직 마음에 한가닥 미망이 남아 있었다.
떨치려면 언제든 떨칠 수 있겠지만 떨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도록 떨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청허 진인의 얼굴을 보고 어느새 밝아진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난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데.”
자신은 신선의 경지에 올랐기에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쩌면 청허 사제는 인연에 연연하느라 등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괜한 우월감에 빙긋 웃던 청명은 곧 들려온 청허 진인의 말에 시무룩해져 버렸다.
“...사형께서도 인간지도를 공부하다 보면 연연하시게 될 겝니다.”
“.......”
청명이 다시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허 진인이 ‘어이구’ 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모옥 근처에 있는 나무로 걸어갔다.
걷는 것이 힘든 듯 허리를 두드리던 청허 진인이 곧 나무를 짚었다.
“만물과 내가 같으니[物娥一體] 나는 나무가 될 수 있지만[我化木] 나무는 내가 될 수 없지요[木不化我].”
나무를 어루만지며 청허 진인이 말했다.
하지만 청명은 청허 진인을 바라보지 않고 청허 진인이 짚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파릇파릇한 잎들을 세워 올리고 있었다.
나무가 푸른 잎들로 무성해지자 곧 꽃이 피어났다. 한순간에 만개한 꽃은 아름다웠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지기 시작했다.
한 송이 한 송이 꽃이 떨어지자 어느새 앙상하게 말라 버린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청허 진인이 나무에서 손을 떼었다.
나무는 마치 조금 전처럼 살짝 잎이 달린 나무로 변해갔다.
의아해진 청명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물이 같은데 어째서 나무는 내가 되지 못하나요?”
“그것이 인간지도입니다. 헐헐.......”
청허 진인의 말에 맞추어 이번에는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청명의 주위를 부드럽게 돌던 바람이 강력한 돌개바람으로 변했다.
청명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춤추었다.
“흐읍!”
청명이 신음 소리를 냈다.
잠시 신음 소리를 낸 청명이 부드럽게 팔을 들어 주위로 한 바퀴 돌리자 손이 닿았던 거리만큼의 바람이 금세 가라앉았다.
하지만 청명의 주위를 제외한 바깥은 여전히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청허 진인이 헐헐 웃으며 부드럽게 손을 젓자 바람이 멈추었다.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청허 진인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을 다른 것에 투영할 수 있답니다. 헐헐헐.......”
청허 진인이 헐헐거리며 웃었다.
청명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일들은 자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청허 사제가 말해준 이치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자신은 바람이 될 수 있지만[我化風] 바람은 내가 되지 못한다[風不化我].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생각에 빠져든 청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청허 진인이 웃음 지었다.
“헐헐... 세상을 경험하시면 곧 아시게 될 겝니다.”
“...네.”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다. 저것이 인간지도라면 그 이치를 자신이 깨닫게 될 때 자신은 선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오늘 깨달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 이치에 대해 궁리할 시간이 없다. 굳이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니 언젠가 자리잡고 궁리해 보면 될 일이다.
청명은 후일을 기약하자고 다짐했다. 조금은 밝아진 청명의 얼굴을 바라본 청허 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인연이 끝났군요.”
“.......”
청명도 느끼고 있었다. 사부의 명으로 이어진 인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부께서는 무당에서 쉬었다 떠나라는 배려뿐 아니라 세상을 떠돌 때 궁리해야 할 이치까지 남겨주셨다.
새삼 사부에게 고마워진 청명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돌았다.
청허 사제를 바라보니 조금 전처럼 얄밉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청명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헐헐.......”
대답없이 청허 진인이 웃었다.
청명은 잠시 청허 진인을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 당허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청명이 당허봉에 올라 청허 진인을 만날 때 태화궁 앞에서는 황허자가 불러온 운혜가 서 있었다.
운혜는 태화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울면 사부도 슬퍼하니 결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운혜는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는 태화궁 안으로 들어갔다. 장문인의 선실에는 현무 진인이 앉아 있었다.
“어, 운혜 왔냐?”
현무 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운혜를 반겼다. 운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불러요, 바쁜데?”
“으하핫! 짐 싸는 데 바쁠 게 무에 있겠느냐!”
현무 진인이 고개를 끄덕여 가며 웃었다. 운혜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봐요. 도복도 한 두어 벌 챙겨야지, 검에 꾸밀 수실도 챙겨야지, 가슴 가리개도 챙겨야지, 속곳도.......”
“험, 험! 그만 하거라.”
현무 진인이 민망한 듯 말했다.
“거 봐요. 바쁘다니까.”
“그래도 사부에게 인사는 해야지.”
“어련히 인사 안 올까 봐.”
운혜가 현무 진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모처럼 건강하게 깨어 말하는 운혜를 보니 절로 흐뭇해진 현무 진인이 다시 크게 웃었다.
“으하핫,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구나.”
“어쨌든 저, 강호로 나가요. 금방 돌아올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운혜는 무당 밖으로 나간다는 자신의 얼굴에서 혹여 사부에 대한 걱정이나 슬픔이 묻어 나올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부에게 슬픈 빛의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현무 진인이 그런 운혜의 마음을 아는 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강호로 나간다니 벌써 너도 다 컸구나. 본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냐 하면 말이다, 세상 밖에 나가면 주의해야 할 것이 많단다. 일단 너는 여아니까 춘약을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몸 버리는 수가 있어.”
운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현무 진인의 말이 이어졌다.
음식을 먹을 때는 꼭 은침으로 찔러보고 먹어야 한다느니,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돌아가라느니, 길 가다가 시비가 붙으면 성질 부리지 말고 잘 참으라느니, 비무하자고 덤비는 녀석이 있거든 말로 해서 풀라느니 하는 잡다한 이야기였다.
한참 동안이나 여러 가지 당부를 주워섬기는 현무 진인에게 운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현무 진인이 이런저런 당부 끝에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그때만큼은 이전처럼 미소 띤 얼굴이 아닌 굳은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마교를 만나면 반드시 도망치거라. 이것은 사부에게 꼭 약속해야 하느니.”
“...네.”
운혜도 조금 침울해진 얼굴로 옅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무 진인이 재차 물었다.
“꼭이다? 꼭 도망쳐야 한다?”
“네, 알았어요.”
“...으흠, 어쨌든 강호는 위험한 곳이야. 앞으로는 늘 조심하거라.”
운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조용히 서 있던 운혜가 곧 뭔가가 떠올랐는지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를 띠고는 현무 진인을 흘겨보았다.
“역시 여전히 사부 이야기는 더럽게 재미없어요.”
“...험! 험!”
현무 진인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운혜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잠시 웃던 운혜는 곧 현무 진인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더 재밌는 이야기는 없어요?”
“.......”
현무 진인이 운혜를 바라보았다.
사실 현무 진인은 언젠가 운혜가 자신의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말을 한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왔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재주가 없는지 도저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드는 것이 수월치 않자 현무 진인은 저잣거리에서 이야기책을 몇 권 사 열심히 탐독했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어느 정도 숙지했다 싶을 무렵 운혜를 불러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으나 운혜는 순음지체의 발동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로는 운혜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며 운혜를 보던 현무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한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 테냐?”
“...네.”
운혜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 진인은 긴장한 듯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곧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