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우화등선
작가 : 촌부
작품등록일 : 20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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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화
작성일 : 16-07-15     조회 : 710     추천 : 0     분량 : 6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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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부터 강호에 무당제일검이 은거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무당제일검의 은거지는 천주봉 근처에 있는 작은 동굴이라 했는데 금지로 지정되어 장문인과 그 사제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마교주와 싸우다 그렇게 되었다, 주화입마에 들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 장문인이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헛소문이 퍼졌지만 무당제일검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의 별호를 바꾸어 불렀다.

 그의 새 별호는 다정검(多情劍)이었다.

 

 

 

 

 제2장 부자지정

 

 

 제1화 동상이몽(同床異夢)

 

 

 

 호북성 중앙에는 호광평야(湖廣平野), 장한(江漢平野) 등으로 불리는 대평원이 있다.

 이 넓고 비옥한 평원에는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평촌(平村)도 바로 그런 농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 중의 하나였다.

 비록 작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평원의 외곽에 위치한 평촌은 의도현(宜都縣)에 가까이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때문에 평촌의 시장은 마을치고는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

 

 늙은 거지는 평촌의 시장을 걷고 있었다.

 헝클어진 흰 수염과 누덕누덕 기워진 더러운 옷을 입은 늙은 거지는 형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 날카로운 눈빛은 구걸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늙은 거지 추걸개(追乞짵) 막현우(莫現旴)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다. 서둘러 구걸을 해야 저녁이라도 먹을 수 있으리라.

 시장을 둘러보던 추걸개의 눈이 빛을 발했다.

 ‘저놈이다!’

 추걸개는 시장을 유유히 걷고 있는 늙은 노인을 발견했다.

 발걸음의 보폭이 크지만 일정하고 숨소리가 고르면서도 느린 것을 보니 틀림없이 무공을 익혔을 터,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아도 개방도임을 알아보고 밥을 한 끼 사줄 것이다.

 추걸개는 야심찬 눈으로 노인을 주시했다.

 

 사실 추걸개가 주시하고 있는 노인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무려 십여 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겨우 호북성에 도착했건만 마중 나온 수하가 하나도 없다.

 전서구를 보내어 자신이 도착한다는 것을 미리 알렸는데도 염화대원 녀석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염화당주 귀곡자는 노기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타나라는 녀석들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늙은 거지가 걸어온다.

 ‘개방도....... 그것도 고위급이로다.’

 등 뒤의 결을 확인한 귀곡자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혹시 자신이 마교도라는 것이 들통날까 싶어 귀곡자는 얼른 기도를 가라앉혔다. 마공을 드러냈다가는 크게 사단이 날 터. 정체를 감추어야 했다.

 추걸개가 귀곡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와 마침내 그 앞에 섰다. 귀곡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알아챘나?’

 귀곡자 앞에 선 추걸개는 아무 말 없이 냉엄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추걸개의 시선에 귀곡자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침묵이 추걸개와 귀곡자 사이를 휘돌았다.

 곧 추걸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핫! 사실 본 노개(老 )는 벌써 이틀이나 굶었다오! 사해가 동도라 했으니 노사께서는 이 거지에게 밥이나 한 끼 사주시구랴!”

 개방의 위명을 믿은 추걸개의 말이었다. 추걸개는 귀곡자가 자신의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개방을 무시할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싫소.”

 정체가 들키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귀곡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추걸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마교도임을 들키지 않았다면 굳이 돈 들여 밥을 사줄 이유가 없다. 일반 거지라도 밥을 사줄까 말까 한데 상대는 개방의 장로다.

 “아니, 왜......? 나는 이틀은 굶었다니까.”

 “그래도 싫소.”

 추걸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붉어져 갔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개방의 많지 않은 규율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규칙이 그의 손을 막았다.

 구걸할 때는 무공을 써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바로 그것인데, 어겼다가는 일의 경중에 따라 파문 조치까지 되는 무서운 규칙이었다.

 개방은 어디까지나 거지들의 모임인 것이다.

 “저... 이틀 굶었는데... 그럼 만두라도 한 개만.......”

 “싫다니까.”

 “.......”

 추걸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러다가 정말 일반 양민에게 밥을 빌어먹게 생겼다.

 일반 양민은 거지라면 질색을 하는데 등 뒤의 결도 알아보지 못하는 양민이 많으니 자칫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구걸해야 한다.

 개방 장로 체면에 그럴 수는 없다.

 “제발... 만두 하나만.......”

 추걸개의 애절한 중얼거림을 들은 귀곡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추걸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추걸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곧 거지와 노인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졌다.

 “에이, 만두 한 개 가지고 쪼잔하기도 하오!”

 “싫다니까!”

 “그래도 만두 하나만.”

 “싫어!”

 거지와 노인의 날카로운 신경전에 시장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시장 안의 범부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여들어 껄껄 웃으며 장내를 바라보는데 그 틈에는 염화삼대주(炎火三隊主) 마규상(馬揆常)도 속해 있었다.

 “에이, 노인장, 그냥 밥 한 끼 사주시구려! 거 안 그렇게 생긴 분이 많이 쪼잔하네!”

 “으하핫! 그것도 그렇지만 저 거지도 끈질기기 짝이 없지 않은가!”

 구경하던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말참견을 시작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마규상도 짐짓 웃는 체하며 귀곡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염화삼대주 마규상이 대주를 뵈옵니다.”

 추걸개와 한바탕 대거리를 펼치던 귀곡자는 마규상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언성을 높였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별다른 수가 없다.

 “에잉, 이리 늦다니. 네놈은 나중에 두고 보자.”

 “존명.”

 마규상은 전음을 마치자마자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몰래 밀마를 두고 떠나면 당주께서 직접 오실 것이다.

 하지만 마규상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한 아이가 소란스러운 시장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마교의 제자를 구하러 나온 염화대의 특성상 무재가 뛰어나 보이는 아이가 지나가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마규상은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

 아이는 몹시 신이 난 듯 뛰어가고 있었다. 근골은 가히 무재(武材)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

 눈에 총기가 엿보이는 것이 근골뿐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한 듯하다.

 마규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주께서 와 계시니 지금 당장 일을 벌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어디에 사는 아이인지는 알아둬야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진다.

 남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마규상은 시장을 구경하는 체하며 아이의 뒤를 쫓았다.

 

 아이는 신나게 달려가다 시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좌판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야채와 채소가 널려 있는 좌판에 도착한 아이가 숨을 헐떡였다.

 “헥... 헤엑... 아버지!”

 “효원(孝元)이로구나.”

 “헤엑... 네!”

 좌판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일단 숨부터 고르거라.”

 “헤엑... 네.”

 헐떡이며 대답한 효원은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래도 숨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한참이나 헐떡대다가 겨우겨우 숨을 고른 효원이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레 외쳤다.

 “아버지, 송 문사님이 재질이 있다고 꼭 글을 가르쳐 주신대요!”

 “뭐? 참말이냐?”

 중년의 사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효원이 다시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 꼭 나오래요! 백수문(천자문)을 다 떼었다고 했더니 글을 써보래요. 그래서 써서 보여드렸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가르쳐 주신대요!”

 “아하핫! 잘했다! 네가 열심히 공부하더니 과연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효원의 말에 중년의 사내 성삼득(成三得)이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기회가 닿아 잠시 글을 가르쳤었는데 이내 글 선생이 떠나 버려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한으로 남았는데 이렇듯 새로운 문사님께 글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경사가 따로 없다.

 “하하하! 그럼! 네가 그리 총명한데 더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정말 장하구나.”

 삼득은 기쁜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득의 칭찬에 효원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거라. 새 글 선생이 생겼으니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야.”

 “네!”

 명랑한 효원의 대답에 삼득이 흐뭇하게 웃었다.

 효원은 잠시 미소를 짓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좌판을 둘러보았다. 좌판에 놓인 야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효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못 파셨네요?”

 “...으흠, 그래. 잘 팔리지 않는구나.”

 흐뭇하게 웃던 삼득이 쓰린 눈으로 야채들을 둘러보았다.

 작년에는 쌀을 재배했는데 쌀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곳간에 넣어두어야 했다.

 곳간에 쌀이 쌓인 것을 안 관아에서는 세금으로 절반이 넘는 쌀을 가져가 버렸고, 나머지 쌀을 어떻게든 팔아보려 했으나 결국 팔리지 않아 가난이 더욱 심해졌다.

 그 후로 조그맣게 밭을 일구어 야채를 길렀지만 이것도 잘 팔리지 않는다.

 삼득의 쓰린 속을 짐작한 효원이 걱정스럽게 삼득을 바라보았다. 삼득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너는 들어가 공부를 더 하거라. 나는 조금 더 팔아보다가 안 팔리면 들어가야겠구나.”

 “...저, 제가 도와 드릴게요, 아버지.”

 효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삼득은 엄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너는 가서 공부를 해야지. 파는 것은 아비 혼자 할 수 있으니 어서 집으로 가거라!”

 효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일을 도와드리고 싶지만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니 자신은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집으로 갈게요.”

 조금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효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득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효원은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원은 얼마 달리지 못해서 걸음을 늦추었다. 하늘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인 것이다.

 파란 하늘 사이로 몽실몽실 피어 있는 흰구름 속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풍경이었지만 효원은 왠지 하늘을 날아가는 새에게서 쉽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학... 인가?’

 부드러운 구름이 유영하듯 날아가는 학의 모습에 효원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걸어가면서 앞을 살피지 않으면 쉽게 사고가 생기는 법.

 효원은 어디선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소년 도사와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쿠!”

 “아얏!”

 효원은 물론이거니와 효원과 부딪친 소년 도사까지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사실 평촌에 도착한 청명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평촌까지 걸어오면서 적지 않은 마을과 도시들을 보았지만 운풍 사손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하니 기대감에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한껏 흥분한데다 볼거리도 많으니 마구 달려가서 구경을 하려던 청명은 자신처럼 마구 달리는 누군가와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부딪친 충격으로 넘어진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매운 통증에 청명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아야야! 아파라!”

 “아야!”

 마찬가지로 비명 소리를 내던 효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부딪친 사람을 보니 도복을 입고 있는 것이 도사 같다.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사람을 넘어뜨리게 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효원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옷가짐을 단정히 한 후 공손히 읍하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을 그만 보지 못해.......”

 “...예.”

 상대의 정중한 사과에 울상을 짓고 있던 청명도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앞을 확인하지 못했다지만 자신 역시 달리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다.

 “저도 죄송해요.”

 “예.”

 효원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숙여진 고개가 들리자 영준한 효원의 얼굴이 보였다.

 “헤헤.”

 효원의 얼굴을 본 청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인연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만 가시지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운풍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본래대로라면 무당의 어른을 넘어뜨린 저 소년을 크게 꾸중해야겠지만 사조께서 스스로를 죄송하다 하니 뭐라 할 말도 없다.

 그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풍자의 말에 청명은 다시 한 번 효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연이 느껴지는 듯하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랴.

 세상에 나왔다는 기쁨에 청명은 다시 신이 나서는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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