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주들은 회랑 밖으로 나서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으하! 죽는 줄 알았네! 제길, 교주 눈길만 봐도 오줌이 찔끔찔끔 새어 나오니 내 간이 이렇게 작은 줄은 몰랐소이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사내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키가 구 척이 넘어 보이는 것이 거인과 같은 형색이다.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이 청명이 선계에서 보았던 천군을 닮기도 했다.
“이보게, 석마당주(石魔堂主), 자네만 그런 것이 아니야. 이러다가 내가 내 명에 못 죽겠구먼.”
청수해 보이는 중년인이 따라 말을 이었다.
마치 문사와도 같은 모습이나 얼굴에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바로 지화당주(知火堂主) 영진(永進)이었다.
“그러게 교주님이 너무 강해도 문제라니까요. 저러면 도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내치는 대로 죽게 생겼잖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에요.”
비화당주 마현희가 말했다. 그녀 역시 긴장했는지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풍만한 여인의 몸이 땀에 젖어 있자 음탕한 상상이 절로 일어나는지 석마당주 조성욱(趙晟頊)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그게 뭐가 다행이란 말이오? 본좌가 하마터면 그대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날 뻔했거늘.”
비화당주가 석마당주를 흘겨보았다.
“시끄러워요. 제가 다행이라는 것은 환희불을 처단한 방식 때문이에요.”
“헐헐, 역시 그렇지? 교주가 그래도 막무가내는 아니니 다행이야. 아니 그런가?”
염화당주 귀곡자가 말했다. 사실 교주는 그냥 환희불을 죽여도 아무 상관 없을 것이다.
이곳 염마산에선 교주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으니 교도 하나쯤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거기다가 이미 교주는 염라대왕과도 비무한다는 소문이 돌 만큼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주는 남의 손을 빌려 환희불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환희불이 교묘하게도 증거를 남기지 않아 즉결 처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교주는 의외로 규율과 율법에 엄격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개차반으로 내키는 대로 교도들을 참살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요. 다행이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저는... 교주님이 더 무서워졌어요.”
“.......”
모든 당주들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렇다. 저런 강력한 무공에 지도력, 거기다가 교도들의 신임까지 얻는다면 당금 천하는 그야말로 교주의 천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미래는 어둡다.
“까짓, 좋잖아! 우리 백련교가 그동안 중원의 개잡종들에게 당한 것이 얼마야! 교주가 그걸 다 복수해 준다면 나는 내 목을 따라고 해도 따서 바치겠소!”
석마당주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마교는 그동안 너무 많은 박해를 받았다.
마교의 본래 이름은 마교가 아니었다. 본래의 이름은 백련교(白蓮敎). 미륵신앙을 토대로 한 순수한 종교였다.
남송(南宋) 초에 대교주 모자원(茅子元)을 모시고 처음 종교를 열었을 때만 해도 백련교도들은 모두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세상을 구원해 줄 미륵불이 현신할 것이며, 미륵불은 만인의 평등을 바탕으로 세속을 정화해 줄 것이니 우리는 모두 평등하고 오직 미륵 아래 모일지라!
백련교도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신분의 차이에 따라 박해받던 순진한 백성들은 평등한 세상이 열린다는 소리에 너도 나도 백련교에 가입했지만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송 말(宋末), 불교에서 백련교를 사이한 종교(邪敎)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등을 부르짖는 그들의 종교가 눈에 거슬렸던 당시의 정권 역시 백련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백련교는 송나라 때에 박해를 받아 몰락 지경에 이르렀고,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는 그래도 자기들의 국가라고 반원복송(反元復宋)을 외치며 다니다가 원 정부에게서 다시 한 번 박해를 받았다.
원이 몰락할 때 이번에야말로 새 시대가 열릴 줄 알았건만 명의 주원장은 그 힘만을 이용하고는 백련교도 주살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백련교도들은 마교라는 이름에 몰려 십만대산에까지 도망치기에 이르렀으니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독기를 품게 되었다.
더 강해지자! 더 강해져서 우리의 종교를 인정받자!
그 유명한 마교도들의 서열 다툼도 그 때문에 생겨난 규칙이었다. 더 강한 자가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된다.
그리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삶과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마교도들은 이 제도에 만족감을 표했다.
이십구 년 전, 전대 교주인 갈중위가 그 아들인 갈문혁에게 패했을 때도, 흑마 서중희가 마교의 교주로 등극할 때에도 마교도들은 아무런 반발도 보이지 않았다.
당주들이 침묵했다. 생각해 보면 교주가 정말 백련교의 오랜 한을 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침묵을 뚫고 지화당주가 말했다.
“교주께서 중원에 호된 맛을 보여주시면 그것도 좋겠지만 그것은 추후의 일. 사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음화신녀를 찾는 일이외다.”
석마당주가 의아한 눈으로 지화당주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주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일 텐데?”
“만약 그렇다고 해도 꼭 찾아야 하오.”
지화당주가 깊은 눈으로 염화당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염화당주는 시선을 돌리고 웃을 뿐이다.
“헐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마당주가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쳤다.
“아니, 도대체 음화신녀가 뭐기에 이렇게 호들갑이오, 호들갑은!”
어느새 음화신녀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 석마당주는 ‘그까짓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화당주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바보 같으니.”
비화당주가 피식 실소하며 석마당주를 바라보았다. 석마당주는 분노했다.
“뭐라? 본좌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한 사람은 이립―삼십 세― 이후로 없었다!”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많았다. 아마 석마당주에게 지금과 같은 고강한 무공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계속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비화당주가 다시 한 번 무시 해 주려고 입을 열 때 지화당주가 말했다.
“음화신녀는 특별한 대법으로 만들어진 신체의 여성을 말하는 것이오.”
석마당주가 지화당주에게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아는 걸 지껄이다니 너도 바보구나!”
“.......”
더 설명해 봤자 입만 아플 것 같다. 지화당주가 염화당주를 바라보았다.
“헐헐! 왜 나를 보나, 자네는?”
“염화당주께서 설명하시지요.”
“난 서둘러 염마산을 떠나야 되는데?”
염화당주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헐헐 웃음을 지었다.
“씨끄러워, 영감! 얼른 설명해!”
석마당주가 소리를 질렀다. 염화당주의 서열이 석마당주보다 높으니 엄연한 하극상이다.
“뭐라?”
염화당주가 눈을 치켜떴다. 석마당주도 지지 않고 염화당주를 노려보았다.
성질대로 하자면 목을 틀어쥐어서라도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지만 상대의 서열이 높으니 그럴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가만히 석마당주를 보던 염화당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대 때릴 기세로 서 있는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자신만 음화신녀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사실 모든 당주들은 음화신녀에 대해 들을 만큼 들어왔거늘 저 녀석은 들어도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음화신녀가 무엇이냐면.......”
염화당주가 말했다.
***
“선천적으로 음기(陰氣)가 강한 여성을 골라 임신시킨 후 음기가 강한 영약이나 빙정(氷精) 등을 복용시키네. 그러면 배 속의 아기가 음기로 인해 여아로 변하게 되고, 아이를 품은 지 팔 개월이 되었을 때 차가운 냉골에서 개정대법을 펼치면 여아는 순음지체(純陰之體)가 된다네. 물론 인위적인 것이라 십중팔구 실패할 확률이 높네만.”
“.......”
현평 진인이 침중한 눈길로 사제 현성 진인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당주들이 음화신녀에 대해 대화하고 있을 무렵 무당산에서도 순음지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평 진인의 옆에는 운풍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순음지체의 효능은 아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네. 음기로 인해 몸이 차가워지고 부족한 양기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열두 살이 넘으면 스무 살 때까지 수면만을 취하다가... 결국엔 죽게 된다네.”
현성 진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운풍자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 체질이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운풍자였지만 오랜 세월 운풍자를 봐온 현성 진인과 현평 진인은 그 눈에서 의혹을 읽을 수 있었다.
운풍자는 그게 작금의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현성 진인이 말했다.
“순음지체의 아이는 무당에 있네.”
흠칫.
무표정으로 서 있던 운풍자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무당에... 그 아이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운풍자가 차분하게, 그러나 현평 진인이 보기에는 당황한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숙?”
현성 진인이 운풍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질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운풍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현성 진인이 말을 이어나갔다.
“십칠 년 전 무림맹에 한 명의 여자가 찾아왔다네. 임신한 사람이었어. 아이를 낳고 곧 죽었네만 그 아이를 낳기 직전에 그녀는 충격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네.”
“...뭐라고 했습니까?”
“마교에서 만들어진 순음지체를 자신이 품고 있으며, 마교주는 그 아이를 이용해서 무공을 완성하려 한다는 이야기였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운풍자가 고개를 들었다.
“갈문혁의 무공은... 완성된 게 아니었습니까?”
“.......”
현성 진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현평 진인을 바라보았다.
현평 진인이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을 걸세. 내가 말하지.”
“.......”
현성 진인이 조용히 시립했다. 현평 진인이 말을 받아 이어나갔다.
“공진 성승(孔眞聖僧)께서 파월천마와 비무를 벌이셨을 당시였네. 비무는 성승의 승리로 끝났고, 강호에는 성승의 무공이 하늘에 달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파월천마의 몸에 심각한 이상 징후가 있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현평 진인이 차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파월천마가 익힌 파천화련공(破天火煉功)이 사실 양강지기만을 기르는 마공이었던 게지. 그것도... 음기를 축출하고 전신을 양기로만 채우는 무공.”
“전신을 양기로만 채운다......?”
운풍자가 의아한 듯이 현평 진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나 그렇게 된다면 필시 조화가 깨지게 될 것, 그리 된다면 육신의 붕괴가.......”
운풍자의 말을 끊고 현평 진인이 말했다.
“그래, 육신이 붕괴하게 되지.”
“.......”
본래 무공은 음기와 양기의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강호에서는 흔히 속성의 연공법을 마공으로, 만성의 연공법을 정공으로 분류하고는 하는데 이처럼 조화를 깨뜨리는 무공도 마공으로 분류된다.
어쩌면 속성의 연공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조화를 깨뜨리고 음기, 혹은 양기만을 키운다면 육신의 부조화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
운풍자가 조용히 침묵하고 있자 현평 진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고심했단다. 그 아이의 비밀이 너무 크니 처리가 곤란한 상황이었던 게지.”
“.......”
“몇몇 인사들은 아이를 죽이자고 했었다. 앞으로 마교주의 무공에 이용당할 화근거리가 될 것, 미리부터 그 싹을 제거하자는 거였어.”
순음지체의 아이가 태어났을 당시 점창파의 장문인과 당가의 가주는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무림지사(武林之士)들이 그 의견에 동감했고, 그 속에는 현평 진인도 있었다.
비록 살인을 해야 하는 일이지만 불가에서 말하듯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갈까! 자신이 희생하여 천하를 구할 수 있다면 아이도 좋아할 것이다. 아이는 무림에 화를 불러올 불행의 씨앗이었다.
하지만 살인에 앞서 현평 진인의 머리 속에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먼저... 아이의 얼굴을 봐야겠다.’
왜였을까? 왜 얼굴을 보고 싶었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때 자신은 아이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뜻대로 아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갓난아이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순진한 눈동자였다. 그리고는 까르륵 웃으며 자신의 수염을 잡아채었다.
현평 진인은 복잡한 심사가 담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지만 아이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릴 뿐이다.
보통 갓난아이는 주위의 환경에 민감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 울며불며 자지러지는데 이 아이는 웃는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조차 웃어주었다.
현평 진인은 더 이상 아이를 죽이자고 말하지 못했다.
결국 현평 진인은 그 아이를 무당의 제자로 삼기로 결정했고, 긴 시간에 걸쳐 무림맹의 무림지사들을 설득했다.
그 아이가 바로 운혜.......
별일이 없다 해도 이 년 안에 죽어버릴 슬픈 운명의 아이, 주위에 웃음을 주던 아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웃어 보이던 아이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운혜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운풍자가 말했다.
“무당의 품에 두어야겠지.”
“그렇다면......?”
“그래, 내가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이니라. 네가 강호를 좀 다녀와야겠다.”
현평 진인이 무거운 심사를 달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무림맹에 가서 마교를 조사해야겠다.”
조용히 시립하고 서 있던 운풍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목숨이 달린 일이니 제자는 조심하라.”
“심려치 마십시오.”
말을 마친 현평 진인은 조용히 운풍자를 주시했다. 무표정한 운풍자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현평 진인은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어떤 정보를 얻든지 무당에.......”
“.......”
말을 늘이던 현평 진인이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말을 맺었다.
“무당에 먼저 알리거라.”
현평 진인의 말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운풍자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운풍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흐음.......”
현평 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운풍자에게 이 모든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무림맹에서 마교를 조사하고 있으니 아무 말 없이 그 조사에 합류하라는 명을 내려도 무방한 것이다.
하지만 운풍자는 마교의 정보를 무림맹보다 무당에 먼저 알려야 했다. 무림맹의 인사들이 어떤 정보를 듣느냐에 따라 운혜의 생사가 갈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상념에 빠져 있던 현평 진인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
운풍자가 조용히 읍하고 태화궁을 빠져나가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현평 진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