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노인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수백 척이 넘는 산봉우리가 들어왔다.
그가 방금 넘어온 산이다.
"늙긴 늙었어. 산 하나 넘었다고 숨이 차는구먼."
노인의 음성은 청년의 그것으로 착각할 만큼 맑고 청아했다.
그리고 눈처럼 흰 백발과 가슴까지 내려온 탐스러운 백염, 아이처럼 붉은 홍안은 그 맑고 청아한 음성을 어색하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은 사십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마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노인이 바라본 것은 검푸르게 일렁이는 광활한 바다였다.
"사십 년 만인가…….
여전한 모습이로다."
노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곳은 그가 오래전 대륙 전역을 여행하며 다닐 때 스치듯 지나갔던 곳이다.
그가 머문 시간은 이틀에 불과했지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어서 항상 그의 마음에 고향처럼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기억을 되새기며 찾아온 곳은 여전한 모습으로 그를 반겨주고 있는 듯해서 그는 유쾌해졌다.
소로를 걸어 내려가며 산들바람을 즐기던 노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채가 떠오른 눈으로 잠시 귀를 기울이던 노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한낮의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호야!"
등을 돌린 채 자신 앞을 막아선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입 다물어!"
등을 돌린 아이가 말했다.
이제 육칠 세에 불과한 아이의 음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음성이었다.
혁기룡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던 것이다.
관산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도 겁이 나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마저 주저앉는다면 눈앞의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늑대의 노란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졌다.
그것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숲을 헤치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한 노인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공포에 질려 곧 쓰러질 듯한 예닐곱 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와 그 아이를 바로 앞에서 막아선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면에는 이제 막 어른이 된 듯한 늑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접근하는 중이었다.
노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당장 뛰어들어 늑대를 물리치고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중 무언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늑대를 막아선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유현해졌다.
늑대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본래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심하게 배가 고플 때는 예외다.
그때는 늑대도 사람에게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 아이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접근하고 있는 늑대도 배가 홀쭉하고 털에 윤기가 없는 것이 오랫동안 굶은 듯했다.
'허, 아이의 기세가 늑대의 기세를 압도할 정도라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도다!'
노인은 내심 탄성을 토했다.
늑대를 노려보는 아이는 잘생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이 뚜렷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지금 눈을 부릅뜬 채 강렬한 시선으로 늑대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인한 정신력이 두려움을 극복했어.'
아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감탄은 계속되었다.
그는 흔들림없이 늑대를 노려보고 있는 눈과는 달리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아이의 손을 보고 있었다.
늑대를 막아선 아이도 뒤에 있는 아이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뒤에 있는 아이와는 달리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노인을 감탄하게 했다. 어른들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늑대도 소년의 기세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이의 기세가 아무리 강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크르르르!
포효와 함께 늑대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날카로운 늑대의 이빨과 시뻘건 입 안이 햇빛 아래 모두 드러났다.
쾅!
캥캥!
관산호는 자신을 덮치던 늑대가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거대한 망치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꼬리를 내린 늑대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리고 곧 그의 앞에 신선과도 같은 분위기의 노인이 나타났다.
"아이야, 네 이름이 뭔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맑고 시원한 음성이었다.
"관산호예요, 할아버지."
정신을 수습한 아이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것을 듣는 노인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제1장
인연은 다음을 기약하고
해안에서 이십여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중턱에 담장도 없는 허름한 초옥이 한 채 지어져 있었다.
이십 척이 넘는 나무들이 산 아래로 난 오솔길을 제외하곤 초옥의 주위에 빽빽한 숲을 이루며 담장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이곳에서는 보이지만 먼 곳에서는 눈에 띄지 도 않을 초라한 집이었다.
그런 초옥의 뒤편에 자그마하게 일구어진 화전은 바닷가임에도 이곳에 사는 사람이 어민이 아닌 화전민임을 알게 해주었다.
초옥의 문은 열려 있었다.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광동성의 낮은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찌는 듯이 무더웠다.
문을 닫으면 그 안은 온천을 연상케 할 정도로 더워져서 열어 놓은 것이다.
그나마 산속이기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초옥 안을 뒤덮은 열기를 밖으로 조금씩 밀어냈다.
초옥 안에는 구석에 놓인 허름한 침상 두 개와 가운데 놓인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벽에 걸린 크고 작은 옷 몇 벌과 식사를 만드는 도구 몇 개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방 안 창가 쪽의 침상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중년인은 밖에서 들려오는 창노한 음성에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형상이어서 그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골격이 커서 건강했다면 장부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외모를 갖고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중년인은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병약한 외형만큼이나 작고 힘없는 음성이었다.
"누워 있게. 그 몸에 무슨 예의를 차리는가!"
상체를 일으키는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중년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그것을 본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상으로 다가가 중년인의 가슴을 살짝 눌렀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중년인이 다시 상체를 침상에 뉘였다.
"늘 죄송합니다."
침상에 다시 누운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아는 나갔는가?"
침상 옆의 의자에 앉은 노인은 안쓰러운 눈길로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마을에 갔습니다. 아마 용이와 놀고 있을 겁니다."
"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말문을 닫고 가만히 중년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애로운 눈길이었지만 그 눈에 담긴 힘은 범상한 것이 아니어서 병약한 중년인이 받아내기엔 벅찬 것이었다.
중년인은 가볍게 시선을 내려 노인의 콧잔등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하교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내가 이전에 했던 제안에 대한 답을 듣고자 하네."
노인의 말에 중년인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중년인은 입을 열지 않았고, 노인 역시 중년인이 말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방 안의 침묵은 잠시 후 눈을 뜬 중년인이 입을 열며 깨졌다.
"후우, 끈질기시군요. 어르신께서 제 아이를 이처럼 아껴주시니 후생소배인 저로서는 마땅히 어르신의 말씀을 감사히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호아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해량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중년인은 입을 다물었다.
중년인의 꽉 다문 고집스런 입매를 바라보던 노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등허리 중간 어림까지 흘러내린 눈처럼 흰 머리카락과 가슴에 닿은 풍성한 은염, 그리고 불그레한 홍안과 바다처럼 깊고 맑은 눈. 노인이 입고 있는 백의는 용모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노인의 분위기를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노인은 깊게 가라앉아 바다를 연상시키는 맑은 눈으로 중년인의 눈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흠, 거절은 생각지 못했네. 이 늙은이가 그처럼 간절하게 부탁했건만."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네를 만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구먼. 내게 말하지 않기에 묻지는 않았네만 자네가 이런 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네. 자네에게도 이런 곳에 살게 된 사연이 있겠지. 호아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네. 하지만 호아는 나와 인연이 있고, 무엇보다도 보기 드문 자질을 갖고 있네. 자네가 남 모를 사연을 갖고 있고 또 가르칠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나와 호아의 인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네. 이어질 인연은 언젠가 이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단지 그 인연이 빨리 이어지느냐 늦게 이어지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하지만 그 시간이 늦춰진다면 나로서도 자네 아이의 자질을 충분히 다듬을 수 없게 될 수 있고, 그것은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네. 그러니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일세. 게다가 자네의 결심으로 호아의 자질이 묻힌다면 그 또한 바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는 겐가?"
노인의 어조에는 깊은 탄식이 서려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중년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하아, 내 결정이 호아의 앞날을 가로막는 것이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호아가 어르신을 따라가 무공을 익힌다면 언젠가 그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설령 호아가 어르신을 따라가 천외천의 무공을 배우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과 싸우는 것은 호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뿐인 것을…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 아닌가!'
중년인은 눈을 떴다.
고뇌에 찬 눈빛이다.
"어르신이 범상한 분이 아니심은 눈이 어두운 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빈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호아가 어르신과 인연이 있다 해도 그 아이가 무공을 배우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호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의 파리한 얼굴에 찰나지간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네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테지만 자네의 명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네. 길면 일 년, 짧으면 반년이 안 갈 수도 있네. 자네가 가고 난 후 내가 호아를 맡아 기르는 것은 어떤가? 자네도 이제 일곱 살짜리 아이를 홀로 세상에 남겨둘 생각은 아닐 터이니."
말을 하는 노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중년인의 행동에 의해 실망으로 바뀐 것은 순간이었다.
"이미 제 친구에게 호아를 부탁하는 전언을 보냈습니다. 제가 죽은 후에는 그 친구가 호아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호아는 그가 맡아 훌륭하게 키워줄 것입니다."
"허허허. 정말 고집스런 사람이로세."
하늘이 내린 기회가 지나감을 안타까워하는 노인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중년인의 눈을 바라보던 노인의 시선이 열린 문밖으로 향했다.
낮은 곳이긴 하나 산은 산이어서 밖은 어느새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맑은 노인의 눈에 그늘이 떠올랐다.
중년인의 병세를 돌보며 지낸 일 년 동안 그는 중년인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중년인은 비록 병약했지만 심지만은 굳세기 그지없어서 한번 마음먹은 것은 결코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거절이라 그의 번민은 더욱 깊었다.
'이대로 호아가 나이가 들어 근골이 굳고 경락이 약해지면 호아의 타고난 선기(仙氣)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데……. 호아가 내 눈에 띄었음은 분명 인연일진대 선기를 갖고 있음이 분명한 아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후일 다시 이어질 인연을 위해 심인지술을 사용해서라도 호아의 선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무언가를 망설이던 노인의 눈에 굳은 결심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심인지술(心印之術)은 노인의 사문에 전승되는 것 중 하나로 피시술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술자가 원하는 것을 피시술자의 마음속에 각인시켜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기이한 공부였다.
그것은 마도에 전해진다는 섭혼의 공부와 비슷했지만 섭혼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내공이 아닌 정신의 힘을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때문에 정신력이 극에 달하지 않은 사람은 익힐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초상승의 수법이었다.
무림이 아닌 선도를 익힌 사람들에게 비인부전되는 기법이기에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하기 어려운 공부이기도 했다.
노인의 사문은 자연스럽지 않은 모든 작위(作爲)를 극도로 억제했다.
무위(無爲)를 본령으로 삼는 그의 문파의 특성상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노인은 평생을 통해 작위스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인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연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중년인은 인연의 자연스런 이어짐을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