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봄이 지나가고 있는 바다는 햇빛을 받아 맑은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바다가 멀리 보이는 해안가의 언덕 위에 두 명의 장년인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른쪽의 장년인이 왼쪽의 장년인 가슴에 안긴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어서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기이하다 여겼을 터다.
하지만 왼쪽의 장년인의 품에 안기듯 앉아 있는 중년인의 몰골을 본다면 그러한 장면을 이상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살가죽이 뼈에 붙어 있는 듯 앙상해서 누가 보아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병색 짙은 얼굴을 한 장년인의 눈가에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호아를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나?"
병색 짙은 관현문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단단한 체구의 장년인이 관현문에게 물었다.
말을 한 장년인은 육 척이 넘는 훤칠한 키에 쏘는 듯한 호목을 갖고 있었다.
턱에는 고슴도치의 털을 연상시키는 무성한 구레나룻이 나 있어서 병색이 짙은 관현문과는 달리 강렬한 패기가 넘치는 사내로 그는 바로 강풍양이었다.
"잘 키워주면 되네. 그럼 지하에서도 자네에게 감사할 걸세."
관현문의 대답에 강풍양은 피식
"무공은 가르치지 말고 말이지?"
"그래."
강풍양의 말에 관현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호아가 무공을 익히기를 원하면? 우리 집 주변에는 온통 무공을 익힌 사람들뿐이어서 그들을 보면 어린아이에 불과한 호아는 분명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고, 또 무공을 배우고 싶어하게 될 거야. 대부분 그러니까."
"호신을 할 수 있는 간단한 권각술이면 몰라도 본격적인 무공은 안 돼. 적어도 열다섯까지는 막아주게."
"왜 열다섯인가?"
관현문의 말에 강풍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나이가 되면 호아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걸세. 그때도 무공을 익히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이전에는 안 돼."
관현문은 말과 함께 가슴에서 여러 겹으로 접은 서신을 꺼내 강풍양에게 건넸다.
그의 시선이 강풍양의 강렬한 시선과 부딪쳤다.
"열다섯이 되면 호아에게 이것을 주게. 이것을 읽고도 그 아이가 무공을 익히고자 한다면 별수없는 일이지."
관현문이 건네준 서신을 받아 품에 집어넣은 강풍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네는 무공을 알지 못하기에 느끼지 못하는 듯하네만 호아의 골격은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네. 보기 드문 자질이지. 하지만 그 아이가 열다섯에 무공을 배우고 싶어하게 되어도 그때는 상승무공을 익힐 수가 없는 시기가 돼.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도 있어."
강풍양의 말에 관현문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자네가 무공을 익혔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일세. 세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가치있게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고 복잡하네. 천하인 중 무공을 익힌 사람의 수가 일 푼이나 되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 할 구 푼이 넘지만 그래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네."
타협의 여지가 없는 관현문의 말에 강풍양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자네는 그 아이가 무공을 배우는 것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건가?"
그의 질문을 받은 관현문의 눈빛이 음울해졌다.
"무공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세. 호아가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한 무공을 배우고, 그래서 독보 강호가 가능한 수준이 된다고 하더라도 무공을 배우는 것은 그 아이에게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가 위험하지 않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네."
"그게 무슨 소린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풍양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관현문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호아가 무공을 익힌다면 그 무공을 쓰게 될 것이고, 그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나올 걸세. 그러면 그 아이를 찾는 자들이 생길 걸세. 그들이 호아를 찾으면 그 아이에게 결코 좋은 일이 생길 수가 없네. 호아가 무공을 익힌다면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얽히게 될 수밖에 없고, 그 얽힘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이 될 가능성이 구 할 구 푼 이상이지."
관현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호아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산호(山虎)라고 지은 것은 호아가 산중의 호랑이처럼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기 바랐기 때문일세."
"호아가 무공을 익히면 대체 누가 그 아이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건가?"
강풍양은 굵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지만 관현문은 흐릿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강호의 거파일세. 하지만 자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네.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고. 호아가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자네 또한 그들과 얽힐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무공을 익히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하필 왜 호아를 내게 맡기려 하는 건가?"
"자네라면 호아를 제대로 키워줄 것이라고 믿으니까."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그럼. 난 평생 단 두 사람을 믿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자네일세. 고마워해도 한참을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허참, 골샌님 신뢰를 받는 것이 무에 그리 고마워할 일이라고."
강풍양은 혀를 차며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에 물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눈을 깜박여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바람에 말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무림 중에 일류고수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을 모르는 강인함과 용맹으로 더 큰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죽은 사람처럼 연락을 하지 않다가 십여 년 만에 뜬금없이 연락을 해서는 아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그에 따르는 자네 주문이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닌가?"
강풍양의 퉁명스러운 말에 관현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자네니까. 쉬운 일이었다면 자네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야."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로구먼."
관현문을 보고 피식 웃어 보인 강풍양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물 비린내 섞인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해가 조금씩 서편으로 기울어가는 시간이었다.
* * *
금방 떼를 입힌 봉분은 바다가 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 위에 만들어졌다.
석 달 후면 여덟 살이 되는 관산호는 무릎을 꿇은 채 멍한 시선으로 봉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기운이 넘치던 얼굴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보일 만큼 해쓱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기운없는 모습이었다.
관산호의 뒤에 서서 울적한 눈빛으로 봉분을 내려다보던 강풍양이 보통 사람보다 배는 커다란 손을 들어 관산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관산호의 작은 머리가 그의 손 안에 쏙 들어갔다.
강풍양이 말문을 열었다.
"정해진 이별일지라도 그것과 맞닥뜨리는 사람은 언제나 가슴이 아픈 법이다. 하지만 너도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남아 있는 네가 이렇게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관산호가 고개를 들어 강풍양을 올려다보았다.
그 해맑은 눈에 어린 망연함에 강풍양은 마음이 아팠다.
관산호는 어린아이였지만 지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살며 그 나이에는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많이 본 탓에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무릎을 굽혀 관산호와 눈 높이를 맞춘 강풍양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대장부였다. 누구보다도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지. 네 아버지는 네가 그런 자신처럼 자라나 주기를 바랐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슬퍼하거라."
"…하지만 숙부님,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요."
관현문이 죽은 시간부터 이틀 동안 너무 운 탓에 관산호의 음성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탁했다.
목이 쉰 탓이었다.
강풍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슬프다. 네 아버지는 내 인생 최고의 친구였다. 하지만 사내는 슬픔을 가슴속에 담고 마음으로 슬퍼하는 법이다. 네 아버지는 네 가슴속에 평생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오늘 모두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강풍양의 일견 우락부락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던 관산호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를 따라 강풍양도 자리에서 일어나 관산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관산호가 그 손을 잡았다.
친구인 혁기룡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는 이미 작별 인사를 하고 온 뒤였기에 이제는 떠날 일만 남아 있었다.
화창한 초여름의 정오.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따스한 햇살 아래 누워 있는 쓸쓸한 봉분 하나뿐이었다.
후일 구주천하를 질타하며 철혈의 무인으로 경외의 대상이 될 관산호가 광동성을 떠나던 날의 모습은 배웅하는 이 하나 없이 그처럼 조촐했다.
제3장
철사보(鐵獅堡)
호북성(湖北省) 의창(宜昌).
당대 무림의 거대 문파 중 의창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문파는 없다.
하지만 의창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군소 문파 중에도 거파라 할 수는 없으나 명문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전통과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무가(武家)는 존재했다.
의창에 있는 문파로 무림 중에 명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문파.
그곳이 흔히 세인들에게 의창단가라 불리우는 철사보(鐵獅堡)였다.
철사보의 역사는 팔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무림의 거파 중 하나인 장강수로연맹의 호북지부 비연채와 평생을 두고 전쟁을 했던 호북 남부무림의 거목 철협(鐵俠) 단중렴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창 서부 외곽에 첫 삽을 뜬 것이 철사보의 시작이었다.
단중렴이 비연채와 전쟁을 치른 것은 장강의 상권에 개입하는 비연채의 패악을 보다 못한 의협심 때문이었다.
비연채의 패악과 간섭에 지쳐 있던 호북 남부의 상권이 그를 지원하게 되면서 단중렴은 자연스럽게 호북 남부무림에서 그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철사보와 비연채와의 길고 긴 전쟁은 무당파의 중재로 육십오 년 전 그쳤다.
하지만 철사보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당대에 와서는 의창 부근 이백여 리 내에서는 누구나 첫손가락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문파로 성장했다.
현재의 철사보주인 천성검(天星劒) 단규천은 단중렴의 손자이자 호북무림 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수다.
철사보는 삼협(三峽)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장강수로연맹 호북지부 비연채와 전쟁하며 장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남부의 상권을 확보했던 전력을 가진 문파였기에 그들이 쌓은 부는 일반의 무림세가보다 훨씬 컸다.
무당파의 중재로 비연채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 철사보는 장강을 이용하는 상인들의 호위와 의창 서부에서 나는 석탄의 탄광 개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축적된 부로 철사보는 막대한 전답을 보유할 수 있었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의창 서부 외곽에 있는 철사보는 십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고, 내원과 외원으로 나누어진 구조를 갖고 있었다.
내원에는 단씨 가의 사람들이 살고 가신들과 탄광 등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외원에 살았다.
내원과 외원의 인원을 합한다면 철사보 내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는 오천 명이 넘었다.
물론 그중 무공을 익힌 사람은 삼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일류고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어서 철사보의 명성을 호북 남부무림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철사보의 외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관산호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도 있었다.